[eBook]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총총 시리즈
황선우.김혼비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7월
평점 :
판매중지


선우씨의 말을 되새겨보는 장수님의 얼굴에서 근심에 눌려 있던 부분이 점차 구김 없이 펴지다가 환해지는 것을 보면서 이쪽에서 나온 힘이 저쪽으로 흘러가 어떤 생기 띤 변화를 가져오는 정직한 회로를 지켜보는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얼마 전 크리스마스 새 단장을 한 친구네 사무실에서 스위치를 켜면 크리스마스트리에 휘감긴 전구들에 동시에 불이 반짝 들어오는 것을 보는, 너무나 당연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워서 몇 번 더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하며 신기해하는 기쁨과도 닮았어요. 크리스마스 같은 모임이었습니다.

어느 사회적 모임에서 만나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보다는 주로 특정 주제가 있거나 일과 관련한 전문적인 이야기를 나누어온 사람이 사실은 누군가의 딸이고, 그 관계망 안에서 남이 모를 무거운 짐들을 홀로 짊어지고 사는 존재이며, 꺾이기 쉬운 무방비한 인간이라는 것을 상가만큼 여실히 깨닫게 해주는 장소는 없는 것 같아요.

큰 웃음 끝에 흔이 "10대, 20대에도 듣지 못한 말을 40대에 듣는 것을 보면 요즘 내가 진짜 못나고 못 미덥고 나약해 뵈나보다"라고 씁쓸해하길래, 네가 아니라 세상이 못 미더워진 거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다단계니, 사이비종교니, 보이스피싱이니, 사기 수법이 워낙 고도로 발달하고 다양해지니 무언가를 덥석 믿기에는 너무 많은 걸 걸어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고요.(

상가를 나설 때마다 늘 마주하게 되는 진실도 마음에 다시 새겨봅니다. 나도, 내 주변 사람들도, 죽음을 품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 것. 가슴 한켠에 저마다 깊은 슬픔을 묻고 사는 존재라는 것도.

"몇 년 다니면 그렇게 잘 칠 수 있어요?"
"응, 탁구는 10년은 배워야 해. 그래야 좀 쳤다고 할 수 있어."
팔다리를 우아하게 펼치며 눈에 안 보일 정도로 빠른 공을 쳐내는 선배님들에게 처음 이런 얘기를 들었을 때는 상징적인 숫자로서의 ‘10년’을 말하는 줄 알았어요.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 뚜렷한 시간의 단위 말이죠. 그런데 이제는, 이 속도로는, 정말 말 그대로 10년 걸릴 수도 있겠다고 수긍하게 되었습니다.

흔님에게 화환을 보내준 것, 정말 고마워요. 이상하게 나까지 위로받은 것 같아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어지네요. 혼비씨의 한 해에도 그런 다정함이 종종 함께하기를, 그리고 흔님 어머님께는 가방 속에 목탁을 넣어 다니는 수상한 친구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덩크처럼 ‘애초부터’ 불가능한 게 훨씬 더 많다는 차가운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중년이 되어 다시 만화 『슬램덩크』를 완독하니, 진짜 포기를 모르는 게 아니라 실은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그런 말로나마 스스로를 일으켜세운다는 게 보이더군요.

"見義不爲 無勇也 견의불위 무용야: 의로움을 보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도 좋고, 어진 사람이 되는 것도 좋지만, 저는 정말이지 용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물론 『논어』에서 공자님은 ‘지’나 ‘인’이 ‘용’에 우선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고, 저 역시 일견 동감하는 바이지만, 그래도 공자님이 21세기 한국에서 임산부로 환생한다면 생각이 바뀌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연사, 오늘의 편지를 마무리하며 소리 높여 외쳐봅니다. 우리에게는 군자비추, 공자에게는 임신강추.

『논어』의 주된 내용은 정치는 이렇게 해야 한다, 군자는 저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자님은 아주 금욕적인 사람이라 제 가치관과 부딪쳐 반발심이 드는 부분도 있습니다. "君子 食無求飽 居無求安 군자 식무구포 거무구안: 군자는 먹는 것에 대해 배부름을 추구하지 않고, 거처하는 데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는다." 아니, 기본적인 식사와 거주에서 만족을 얻지 못한다면 군자가 되어서 다 무슨 소용이죠?
제가 깜짝 놀라 분개하며 이 내용을 전했더니 김하나 작가가 이렇게 답하더군요.
"군자 너무 별론데? 그거 하지 말자, 군자비추."
그뒤로 군자비추君子非推는 우리집의 유행 사자성어가 되었습니다. 특히 맛있는 것을 배불리 먹거나 한껏 게으름을 부리면서 행복해할 때는 군자가 아닌 일개 소인이라 다행스럽습니다.

정신이 신체를 지배하는가, 신체가 정신을 지배하는가에 대한 오랜 논란이 있죠. 제가 볼 때는 아무래도 더 아픈 쪽이 덜 아픈 쪽을 지배하는 것 같습니다.

제 위와 장은 그동안 얼마나 큰 안락 속에서 탐욕을 부려왔는지조차 몰랐던 커다란 무지에 대한 벌을 받았나봅니다.

아픈 뒤로 뭔가가 달라진 것 같아요. 한의사 선생님의 말대로라면 몸에 생긴 ‘꺾임’이 매사에 어떤 과속방지턱 같은 걸 만들어놓은 것 같습니다. 일할 때 속도가 잘 나지 않고, 집안일을 조금 하고 나면 금세 눕고 싶고, 운동할 때 일정 심박수 이상으로는 격렬해지지 않아요.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평온하기도 합니다. 좀처럼 아프지 않으면서 타인에게도 굳세기만 할 것을 요구하는 강인함과는 다르게, 이런 꺾임을 여러 번 반복해본 사람이 갖게 되는 내면의 단단함도 있지 않을까요? 내가 아프지 않을 때도 언제든 아플 수 있음을 알고, 어딘가 아픈 사람이 존재함을 알면 좋겠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잘 알아채고 도울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같이 위와 장이 튼튼한 사람에게는 꽤나 어려운 일이지만 포기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임신을 해보지 않아도 임신이 힘든 일이라는 걸 아는 것이, 사람다움일 테니까요.

천만다행으로, 극도의 긴장상태에 몰리면 일부 극도의 내향인들에게서 생존본능처럼 발현되는 ‘긴장성 외향인 돌변증’ 덕에 평소보다도 높은 텐션으로 무사히 잘 끝냈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서늘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날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떤 마음과 마음을 장난스레 이어붙여 세상이 가끔씩 툭툭 던지는 유쾌한 농담들이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이왕이면 선하고 어진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꿈을 계속 꾸게 만들어요. 그래서 누가 오해받기 쉬운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왜 술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술은 언제나 저를 조금 허술하게 만드는데, 허술한 사람에게 세상이 좀더 농담을 잘 던져서 그렇다고요.

양력보다 음력이 한 해에 11일 정도 짧기 때문에 점점 차이가 벌어지는데, 계절이 어긋나버리는 걸 막기 위해 간간이 윤달을 넣는다고 합니다. 덤달이라고도 부르는 이때는 평소와 다른 여벌의 시간이라 무슨 일을 해도 탈이 생기거나 부정을 타지 않는다고 해요. 그래서 수의를 만들거나 산소를 이장하는 등의 일을 몰아서 치르는 거죠. 재미있는 개념 아닌가요? 19년마다 7번의 윤달을 넣는다고 하는데, 뭔가 정확하게 여닫는 거대한 시간의 문을 슬쩍 열어두고 숨차게 쫓아오던 지각생들을 받아주는 신화 같은 느낌이 듭니다.

잔디와 제사가 해야 할 일, 의무의 영역이라면 꽃은 하지 않아도 되는 일, 잉여의 영역입니다. 다정함이란 어쩌면 사람에게 필요 이상의 마음을 쓰는 일이겠지요. 혼비씨가 지하철 앞에 선 사람의 안색을 살피고, 그분이 소리쳐 혼비씨를 깨워주는 풍경처럼 말이죠. 이런 종류의 다정함이 하루에 하나씩 곁에 쌓인다면 저는 천국이나 알프스, 아이비리그를 그리며 살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평소에도 24절기 챙기는 일을 좋아합니다. 절기는 태양이 걷는 스물네 보의 발걸음이고, 그에 맞춰 정처 없이 흐르는 시간에 스물네 개의 매듭을 묶는 것이어서, 함께 걷는 것을 좋아하고 매듭짓는 것을 좋아하는 저에게는 무척 매력적인 개념이에요. 물론 절기의 의미를 되새기기에 좋은 최적의 장소를 찾아 최상의 음식으로 누가 봐도 그럴듯하게 챙기지는 못합니다

경칩에 뭐라도 하겠다고 밤 11시에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개구리처럼 뛰어다니는 중년들이라니 뭔가 애잔하지 않습니까……

저 역시 항상 보고 싶은 전시나 듣고 싶은 강의가 한가득이면서도, 여유 시간이 생기면 결국 집에 눌러앉아 책을 읽는 가장 편리하고 게으른 선택을 하고 맙니다.

무엇보다 게을러서 책 읽는 취미가 저절로 생긴 것 같아요. 책은 그냥 손만 뻗으면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이니까요.

시간이 사람에게 하는 일이 그사이 어김없이 우리에게도 일어났다. 풍경 사이로 끊임없이 일상의 피로를,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늙음과 죽음을, 죽은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흘려보내는 것 말이다. 누구나 마음속에 태풍을 안고서 잔잔하게 살아가듯 그 모두를 품고도 되도록 명랑한 소식을 전하려 애썼지만 실패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덜 검열하고 덜 재촉했던 건 모니터 저편에서 기다릴 수신인의 존재 덕분이었다.

내가 이렇게 열 통의 편지를 쓰다니 놀라운 일이다.(몇몇 친구들은 "이야, 너한테 편지를 받으려면 계약을 해야 하는 거구나?"라고 마구 놀렸는데 맙소사, 나는 정말 자본주의의 쓰레기다……)

‘당연히 최선을 다하겠지만 죽을 만큼 최선을 다하지는 않는 것’을 실현하는 여러 방법이 있을 텐데, 그중 ‘함께 나눠서 하는 것’도 있다는 것을, 꼭 물리적인 몫의 나눔이 아니더라도 함께 꾸준히 일상을, 웃음을, 마음을 나누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앞으로도 잊지 않으려고 한다.

번아웃은 그 자체로도 문제지만, 번아웃이 일 효율을 깡그리 앗아가는 통에 한 번 붙든 일이 끝나질 않아 마음놓고 놀거나 쉴 시간까지 사라지는 게 가장 문제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휴식과 저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다리마저 불태워 없애버리는 게 번아웃이더군요.

누군가는 속이 빈 나무를 두드리는 데 집중하며, 또다른 누군가는 속이 빈 플라스틱 공을 쫓아다니는 데 몰두하며 자신만의 번뇌를 다스리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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