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명작에는 해설이 따로 필요 없는 법이다. 그저 거기서 받은 감동을 되새기면서 즐거워하면 그만이다. 마치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아르헨티나와 축구 경기를 한 날, 멋진 골 장면을 되새기고 또 되새기며 즐거워하는 축구팬의 모습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만약에 감은사 답사기를 내 맘대로 쓰는 것을 편집자가 조건 없이 허락해준다면 나는 원고지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쓰고 싶다.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은사……

감은사에 한번이라도 다녀온 분은 나의 이런 심정을 충분히 이해해줄 것이고, 또 거기에 다녀온 다음에는 모두 내게 공감할 것이 분명한데, 나는 지금 어젯밤 그 멋진 축구 경기를 못 보고 잠만 실컷 잔 사람들을 상대로 상황을 다시 떠올려 해설해야 하는 어려움을 안고 있는 셈이다.

감은사터 전경 | 쌍탑일금당(雙塔一金堂)의 정연한 가람배치로 이후 통일신라 절집의 한 모범이 되었다.

감은사터 쌍탑 | 쌍탑이 연출하는 공간감은 단탑과 달리 장중하고 드라마틱한 분위기가 있다.

이견대에서 바라본 대왕암 | 조선시대 정조 때 경주 부윤을 지낸 홍양호는 여기서 문무대왕의 뜻에 감사하는 제사를 올렸다.

신문왕은(…) 681년 7월 7일에 즉위하였다.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를 세웠다. 사중기(寺中記)에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짓다가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 바다의 용이 되었는데, 그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여 682년에 마쳤다. 금당 계단 아래를 파헤쳐 동쪽에 한 구멍을 내었으니 그것은 용이 들어와 서리게 하기 위한 것이다. 생각건대 유조로 장골(葬骨)케 한 곳을 대왕암이라 하고 절은 감은사라 하였으며, 그후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 하였다.

감은사의 가람 배치는 정연한 쌍탑일금당(雙塔一金堂)으로 모든 군더더기 장식은 배제하였다. 이것은 이후 불국사에서도 볼 수 있는 가람 배치의 모범을 보인 것이다. 또 여기에 세워진 한 쌍의 삼층석탑, 이 감은사탑은 이후 통일신라에 유행하는 삼층석탑의 시원(始原)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것의 조형적 발전은 불국사 석가탑에서 절정에 달하게 된다.
우리는 역사를 되새길 때 흔히 완성된 결실에서 그 가치를 논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미술 문화를 이야기할 때면 그 문화의 전성기 유물을 중심으로 논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전성기 양식 못지않게 시원 양식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 전성기의 전형을 파괴하는 양식적 도전을 보여주는데 이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전성기 양식은 정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만 시원 양식의 웅장한 힘은 갖추지 못하며, 말기의 도전적 양식이 갖고 있는 파격과 변형의 맛을 지닐 수 없다. 그 모든 과정은 오직 그 시대 문화적 기류와 취미의 변화를 의미할 따름인 것이다. 그렇게 인식할 때 우리는 문화와 역사의 역동성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석탑의 나라다. 중국의 전탑(벽돌탑)과 일본의 목탑(목조건축)과 비교해서 생긴 말이다. 중국에서 처음 불교가 들어올 때는 목조건축 형식의 목탑이 유행하여 황룡사 구층탑 같은 거대한 건물을 세우게도 되었다. 이것을 석탑으로 전향하는 작업을 해낸 것은 역시 백제 사람들이었다.
익산 미륵사터에 남아 있는 한 쌍의 구층석탑은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인데, 돌로 지었을 뿐 거의 목조건축을 모방한 것이었다. 이를 발전시켜 건축 부재의 표현을 간소화하면서 석탑이라는 양식, 기단부와 각층의 몸돌과 지붕 그리고 상륜부라는 구조의 틀을 보여준 것은 부여 정림사터 오층석탑이었다. 정림사 오층석탑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 완결미를 갖고 있는 또 다른 명작이다. 나의 답사기가 부여로 향할 때 나는 이 탑 앞에 아주 오래 머물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아하다는 감정을 조형적으로 표현해낸 모범답안이었다.

감은사터 삼층석탑 | 튼실한 이중 기단에 삼층탑신이 알맞게 체감하는 구조다. 안정감과 상승감을 동시에 충족한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기본형이 여기서 만들어졌다.

정림사탑은 대단히 우아하고 세련된 멋을 갖추고 있다. 고상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그러나 정림사탑에는 힘이 없다. 1층의 몸체가 훤출하여 상승감이 돋보이지만 이를 받쳐주는 안정감이 약하다.
감은사를 조영하던 정신은 통일된 새 국가의 건설이라는 힘찬 의지의 반영이었으니 백제 식의 오층석탑은 통일신라에 어울릴 수가 없었다. 장중하고, 엄숙하고 안정되며, 굳센 의지의 탑을 원했던 것이다.
그 조건을 충족하려면 상승감과 안정감이 동시에 살아나야 한다. 그러나 상승감과 안정감은 서로 배치되는 미감이다. 상승감이 살아나면 안정감이 약해지고, 안정감이 강조되면 상승감이 죽는다. 그것을 결합할 수 있는 방법, 그것은 기단과 몸체의 확연한 분리였다. 기단부의 강조에서 안정감을 취하고, 몸체의 경쾌한 체감률에서 상승감을 획득하는 이른바 이성기단(二成基壇)의 삼층석탑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감은사탑은 우리나라 삼층석탑 중 가장 큰 규모로 높이 총 13미터, 몸체 위에 꽂혀 있는 상륜부 고리인 쇠꼬챙이〔擦柱〕의 높이 3.9미터를 제외해도 9.1미터가 되는 장중한 스케일이다. 그리고 그 기세는 결코 허세를 부리는 과장된 상승이 아니다. 대지에 굳건히 뿌리내린 팽창된 힘을 유지하고 있어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엄정한 기품이 서려 있다.

불국사 석가탑 |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의 모범답안이라고 할까. 통일신라의 삼층석탑은 여기에서 형식의 완성을 이룩하게 되었다.

감은사탑에 비할 때 석가탑은 그 스케일이 3분의 2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왜소함이 아니라 알맞은 크기로의 축소였다. 감은사탑은 누가 보든 생각보다 크다고 말한다. 그 크기 때문에 1층 몸돌은 한 장의 돌로 만들지 못하고 네 개의 기둥돌을 세운 다음 네 장의 돌판을 붙여놓고 그 속을 자갈로 채웠던 것이다. 그래서 감은사탑은 오늘날 뱀의 소굴이 되었다. 내가 학생들에게 "감은사탑에 올라가서 사진 찍다가는 뱀에게 물려 클레오파트라 뒤따르게 된다"고 말하면, 학생들은 내가 탑에 오르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말인 줄로만 안다. 그러나 내 말을 무시하고 기단부 갑석에 쭉 늘어앉아 사진 찍다가 1층 몸돌 기둥과 돌판 사이로 뱀이 고개를 내미는 바람에 자지러진 학생이 있었다. 이는 고선사탑도 마찬가지다.

감은사탑은 석양의 실루엣이 정말 아름답다. 토함산으로 넘어간 태양이 홍채를 뿌려 배경을 은은하게 물들일 때 감은사탑은 장엄의 극치를 보여준다.

정림사터 오층석탑 | 백제 사람들이 만든 석탑의 이상은 여기에 있었다. 우아하면서 부드러운 인상. 그러나 여기엔 힘과 안정감이 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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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7. 명문당/파한집

햇곡식 푸릇푸릇 아직 논밭에 자라는데 아전들 벌써 세금 걷는다 야단이네.
힘써 농사지어 나라를 살찌우는 것은 우리이거늘어째서 이리도 극성스럽게 침탈하는가.
(・・・) 붉은 알몸 짧은 갈옷으로 가리고 하루에도 밭 갈기를 얼마였던가?
벼 싹 파릇파릇해지면 가라지 김매기에 괴로울 따름.
풍년 들어 천 종의 곡식을 거둔다 해도 한갓 관청에 바치는 것일 뿐.
어쩌지 못하고 다 빼앗긴 채 돌아오니 가진 것이라고는 한 알도 없네.

이 글은 고려 농민의 어려운 사정을 읊은 것이다. 사실 조선 시대에서도 이와비슷한 글을 찾기란 어렵지 않으며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농민의 삶은 고됐고 국가나 지배층은 백성을 행복하게 이끌지 못했다. 그나마 안정적일 때는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했지만 전란이 일어나거나 역병이 돌면 그마저도힘들었고, 귀족이나 지주의 착취가 심해지면 도망을 가서 산이나 섬에서 생계를연명하거나 도적떼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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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하면 제로 점으로 내려가라

왜 큰 부자들은 대부분 하나같이 가난하였던 과거를 갖고 있을까? 어째서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태어나 부자가 된 사람들보다는 하류층에서 태어나 큰 부자가 된 사람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더 많은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중요한 사실은, 가난을 일찍 경험한 사람들은 가난하였던 생활 수준이 출발점이었기에 그곳으로 언제라도 ‘되돌아가는 것’을 부끄럽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이 잘못되어 갖고 있던 것을 모두 다 날리는 실패를 당하게 되어도 제로 점으로 ‘되돌아가’ 재출발을 할 줄 안다. 수없이 많은 부자들이 사업이나 투자에서 실패하거나 홍수나 화재 등으로 전 재산을 날렸다가도 재기에 성공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나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어려움이 닥칠 때 제로 점으로 가려고 하지 않는다. 제로 점에서 출발하였던 경험이 없는 그들에게 있어서 제로 점으로 가는 것은 ‘되돌아’ 가는 것이 아니라 개척하여야 하는 미지의 불안한 공포로 비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은 실패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실패 자체를 너무 두려워하다 보니 되는 일도 별로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은 곳에서의 삶을 체험하여야 나중에 경제적 문제에 부딪혔을 때 지혜롭게 헤쳐 나갈 수 있음을 나는 지금도 믿는다.

왜 재산을 갖고 이민을 간 사람들보다는 빈털터리로 이민을 간 사람들이 그 낯선 땅에서 성공하는 경우가 더 많은가. 밑바닥에서 아무것도 없이 닥치는 대로 아무 일이나 하면서 그곳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아주 낮은 생활 수준으로 살아가며 돈을 모았기 때문이다. 제로 점에서 살게 되면 모든 것이 플러스의 희망으로 쌓여만 간다. 돈이 쌓이고 희망이 쌓여 간다. 빚이 있는데도 삶의 질과 품위를 유지하려고 들면 그 빚을 갚아야 하기 때문에 돈은 쌓이지 않고 희망은 갉아먹힌다. 마이너스의 희망뿐이다. 그것이 절망이다.

내가 말한다. 경제적으로 실패하였다면 저 아래 낮은 곳으로 내려가라. 체면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그 체면에 "흠집을 내라scratch". 출발점을 저 낮은 곳에 다시 "그어라scratch". 당신이 놓치려고 하지 않는 생활수준이라는 것을 "지워 버리고scratch" 새로운 "출발점scratch"에서, "무에서from scratch", "근근이 살아가면서scratch along" "돈을 모아라scratch up. 그러면 "돈scratch"이 쌓이게 된다. 이것이 실패로부터 탈출하는 비결이다. 스크래치하라!

사람들은 ‘하면 된다’라고 말하였지만 나는 도무지 할 것이 없었다. 뭘 하면 된다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살다 보면, 해도 해도 아무것도 안 될 것같이 보일 때가 있다. 어떠한 대안도 보이지 않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절망적인 때가 있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실망, 좌절이 절망 속에서 계속 쌓이면 자살의 유혹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한 경우 자살은 함부로 저지르는 무의미한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이 처한 고통이나 위기 상황, 상실감 등으로부터의 탈출구로 잘못 여겨지기도 한다. 나도 그렇게 오해했었으니까.

다행스럽게도 절망의 골짜기에는 밑바닥이 없다. 아무리 깊이 떨어져도 우리를 산산조각으로 부서뜨릴 절망이란 이 세상에는 없다는 말이다. 우리를 파괴시키는 것은 우리 자신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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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의 여러 모습 | 우리나라 사찰은 주어진 자연환경에 따라 자연과 어울리는 방식이 다양하게 나타났다.
1.내소사 2.무위사 3.개심사 4.운문사

질서의 미덕과 정서적 해방의 기쁨
영주 부석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집이다. 그러나 아름답다는 형용사로는 부석사의 장쾌함을 담아내지 못하며, 장쾌하다는 표현으로는 정연한 자태를 나타내지 못한다. 부석사는 오직 한마디, 위대한 건축이라고 부를 때만 그 온당한 가치를 받아낼 수 있다.

부석사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무량수전에 있다.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이라서가 아니며, 그것이 국보 제18호라서도 아니다.
부석사의 아름다움은 모든 길과 집과 자연이 이 무량수전을 위해 제자리에서 제 몫을 하고 있는 절묘한 구조와 장대한 스케일에 있다.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법성게(法性偈)」에서 말한바 "모든 것이 원만하게 조화하여 두 모습으로 나뉨이 없고, 하나가 곧 모두요 모두가 곧 하나됨"이라는 원융(圓融)의 경지를 보여주는 가람 배치가 부석사이다. 그러니까 부석사는 곧 저 오묘하고 장엄한 화엄세계의 이미지를 건축이라는 시각매체로 구현한 것이다. 이 또한 이미지와 이미지의 만남이며,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의 대화일 것이다.

무량수전 | 현존하는 최고의 목조건축으로 우리나라 팔작지붕집의 시원양식이다. 늠름한 기품과 조용한 멋이 함께 살아 있다.

무량수전에 이르면 자연의 장대한 경관이 펼쳐진다. 남쪽으로 치달리는 소백산맥의 줄기가 한눈에 들어오며 그것은 곧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서막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제 우리는 상처받지 않은 위대한 자연으로 돌아온 것이다.
무량수전에서 한 호흡 가다듬고 조사당, 응진전으로 오르는 길은 떡갈나무와 산죽이 싱그러운 흙길이다. 자연으로 돌아온 우리를 포근히 감싸주는 여운이다.
인공과 자연의 만남에서 인공의 세계로, 거기에서 다시 자연과 그 여운에로 이르는 부석사 순롓길은 장장 시오리(약6킬로미터)이건만 이 조화로움 덕분에 어느 순례자도 힘겨움 없이, 지루함 없이 오를 수 있다.
지금 나는 저 극락세계에 오르는 행복한 순롓길을 여러분과 함께 가고 있는 것이다.

별스러운 수식이 있을 리 없는 이 부석사 진입로야말로 현대인에게 침묵의 충언과 준엄한 꾸짖음 그리고 포근한 애무의 손길을 던져주는 조선땅 최고의 명상로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비탈길은 사람의 발길을 느긋하게 잡아놓는다. 제아무리 잰걸음의 성급한 현대인이라도 이 비탈길에 와서는 발목이 잡힌다. 사람은 걸어다닐 때 머릿속이 가장 맑다고 한다.

부석사로 오르는 은행나무 가로수길 | 적당한 경사면의 쾌적한 순롓길로 멀리 일주문이 있어 거리를 가늠케 한다.

그러나 비탈길은 그런 경박과 멍청함을 용서하지 않는다. 아무리 완만해도 비탈인지라 하체는 긴장하고 있다. 꾹꾹 누르는 발걸음의 무게가 순례자의 마음속에 기여하는 바는 결코 적지 않다. 그래서 사람의 생각은 걷는 발뒤꿈치에서 시작한다는 말도 있는 것이다.

사과나무의 줄기는 직선으로 뻗고 직선으로 올라간다. 그렇게 되도록 가지치기를 해야 사과가 잘 열린다. 한 줄기에 수십 개씩 달리는 열매의 하중을 견디려면 줄기는 굵고 곧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모든 사과나무는 운동선수의 팔뚝처럼 굳세고 힘있어 보인다. 곧게 뻗어 오른 사과나무의 줄기와 가지를 보면 대지에 굳게 뿌리를 내린 채 하늘을 향해 역기를 드는 역도 선수의 용틀임을 느끼게 된다. 그러한 사과나무의 힘은 꽃이 필 때도 열매를 맺을 때도 아닌 마른 줄기의 늦가을이 제격이다.
내 사랑하는 사과나무의 생김새는 그 자체로 위대한 조형성을 보여준다. 묵은 줄기는 은회색이고 새 가지는 자색을 띠는 색감은 유연한 느낌을 주지만 형체는 어느 모로 보아도 불균형을 이루면서 전체는 완벽한 힘의 미학을 견지하고 있다.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뿌리에서 나온다. 나는 그 사실을 나중에 알고 나서 더욱더 사과나무를 동경하게 되었다.

비탈길이 끝나고 낮은 돌계단을 올라 천왕문에 이르면 여기부터가 부석사 경내다. 사천왕이 지키고 있으니 이 안쪽은 도솔천이다. 여기에서 요사채를 거쳐 범종루, 안양루를 지나 무량수전에 다다르기까지 우리는 9단의 석축 돌계단을 넘어야 한다. 극락세계 9품(品) 만다라의 이미지를 건축적 구조로 구현한 것이다.

부석사의 돌축대들은 불국사처럼 지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해인사 경판고처럼 장대석을 사용한 것도 아니다. 제멋대로 생긴 크고 작은 자연석의 갖가지 형태들을 다치게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를 맞추어 쌓았다. 다시 말하여 낱낱의 개성을 죽이지 않으면서 무질서를 질서로 환원한 이 석축들은 자연스런 아름다움이라기보다도 의상대사가 말한바 "하나가 곧 모두요 모두가 곧 하나됨"을 입증하는 상징적 이미지까지 서려 있다. 불국사의 돌축대가 인공과 자연의 조화를 극명하게 보여준 최고의 명작이라면, 부석사 돌축대는 자연과 인공을 하나로 융화한 더 높은 원융의 경지라고 말할 수 있다.

무량수전 앞 석등 | 받침대에 상큼하게 올라앉은 이 석등엔 조각이 아주 정교하게 새겨 있다.

범종루에서 다시 세 계단을 오르면 그것이 상품단(上品壇)이 되며 마지막 계단은 안양루(安養樓) 누각 밑을 거쳐 무량수전 앞마당에 당도하게 되어 있다. 마지막 돌계단을 오르면 우리는 아름다운 자태에 정교한 조각 솜씨를 보여주는 아담한 석등과 마주하게 된다. 이 석등의 구조와 조각은 국보 제17호로 지정된 명작 중의 명작이다. 아마도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석등 중에서 가장 화려한 조각 솜씨를 자랑할 것이다. 섬세하고 화려하다는 감정은 단아한 기품과는 거리가 멀 수 있다. 그러나 이 석등의 조각은 완벽한 기법이라는 형식의 힘이 받쳐주고 있기 때문에 화려하면서도 단아하다. 마치 불국사 다보탑의 화려함이 석가탑의 단아함과 상충하지 않음과 같으니 아마도 저 아래 있는 당간지주를 깎은 석공의 솜씨이리라.

무량수전 건축의 아름다움은 외관보다도 내관에 더 잘 드러나 있다. 건물 안의 천장을 막지 않고 모든 부재들을 노출시켜 기둥, 들보, 서까래 등의 얼키설키 엮임이 리듬을 연출하며 공간을 확대해주는 효과는 우리 목조건축의 큰 특징이다. 그래서 외관상으로는 별로 크지 않은 듯한 집도 내부로 들어서면 탁 트인 공간 속에 압도되는 스케일의 위용을 느낄 수 있다. 무량수전은 특히나 예의 배흘림기둥들이 훤칠하게 뻗어 있어 눈맛이 사뭇 시원한데 결구(結構,일정한 형태로 얼개를 만드는 것) 방식은 아주 간결하여 강약의 리듬이 한눈에 들어온다.

부석사의 절정인 무량수전은 그 건축의 아름다움보다도 무량수전이 내려다보고 있는 경관이 장관이다. 바로 이 장쾌한 경관이 한눈에 들어오기에 무량수전을 여기에 건립한 것이며, 앞마당 끝에 안양루를 세운 것도 이 경관을 바라보기 위함이다.

무량수전에서 내려다본 경치 |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 서서 바라보면 멀리 소백산맥의 줄기가 부석사의 장대한 정원인 양 아스라이 펼쳐진다.

무량수전 앞 안양루에서 내려다보는 그 경관에 취해 시인은 저마다 시를 읊고 문사는 저마다 글을 지어 그 자취가 누대에 가득한데, 권력의 상좌에 있던 이들은 또 다른 기념 방식이 있었다. 그것은 현판 글씨를 써서 다는 일이다. 무량수전의 현판은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 침입 때 안동으로 피난 온 적이 있는데 몇 달 뒤 귀경길에 들러 무량수전이라 휘호한 것을 새겼다고 하며, 안양루 앞에 걸린 부석사라는 현판은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쓴 것이다. 우리 같은 민초들은 일없이 빈 바람을 가슴에 품으며 산자락이 닿는 데까지 눈길을 닿게 하여 벅찬 감동의 심호흡을 들이켤 뿐이건만 한 터럭 아쉬움도 남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끝없는 예찬을 보내는 부석사의 아름다움은 1980년의 보수공사 때 문화재위원들이 내린 아주 현명하고 위대한 판단 덕분이었다. 그 당시 보수공사 보고서를 보면 한결같이 부석사의 구조를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 범위에서만 해야 한다는 의견이었고 그렇게 시행되었다. 문자 그대로 고색창연한 절을 유지하게끔 한 것이다.

2018년 부석사는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 봉정사, 통도사와 함께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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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6. 학문•철학/시집살이

친영의 예법을 왕실에서 먼저 실시하여 사대부들로 하여금 본받게 하라. 파원군 윤평이 숙신옹주를 친히 맞아가니 본국에서의 진영이 여기로부터 비롯됐다.
이는 《세종실록》의 내용으로, ‘진영‘은 결혼 후 여성이 남성의 집에서 생활하는 시집살이를 말한다. 조선 전기만 해도 일반적인 문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를 잘못이라고 여긴 세종이 바로잡기 위해 의지적으로 친영 제도를 관철시킨 것이다.

남성 중심의 유교 문화는 중국 송나라에서부터 본격화됐다. 성리학의 영향 때문이다. 송나라 이후 여성에 대한 예법은 ‘삼종지도‘, ‘칠거지악‘으로 집약된다. 삼종지도란 여성이 지켜야 할 세 가지 도리로, 집에서는 아버지를, 시집가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따라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칠거지악은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일곱 가지 이유다. 일곱 가지란 시부모를 불순하게 대하는 것, 자식을 못 낳거나 음란하고 질투가 심하고 고질병이 있거나 수다스럽고 도둑질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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