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으로 바라보는 21세기 한국 사회와 교회
이승구 지음 / SFC출판부(학생신앙운동출판부)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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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에 들어선지 얼마 안 되는 지금, 혼란과 무질서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국가 외부로 눈을 돌려보자. 나라와 나라가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서로 으르렁 거리고 있다. 그로 인해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테러가 발생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그와 동시에 곳곳에서 이전과는 다른 양상의 자연재해가 계속 발생하여 수많은 인명 피해를 유발하는 것은 물론 막대한 경제적 피해를 가져오고 있다.

 우리 내부로 관심을 바꿔보자. 사회는 바른 가치관을 상실하여 불법이 난무한다. 무엇을 하려면 뒷돈이 필요하다. 법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그것을 지키면 어리석은 사람 취급을 받는다. 가정이 파괴되어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하지 못하고 있다. 밤마다 거리를 배회하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 종교인은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바르지 못한 행동으로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있다. 이타적이기는커녕 누구보다 이기적인 모습으로 종교에 대한 적개심을 증가시키고 있다.

 이러한 총체적 혼란과 무질서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 무모하고, 어리석어 보인다.

 

 '기독교 세계관으로 바라보는 21세기 한국사회와 교회'

 

 이 책은 21세기 한국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책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미와 정체성을 바로 잡아준다. 그 삶의 방식을 가르쳐준다.

 1부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내용과 그 의미와 그에 따르는 삶의 방식 등을 알려준다.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지식을 제공한다. 2부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삶 속에서 맞딱뜨리는 문제들을 대하는 자세와 그것의 대처 방안을 제시한다. 이를테면 테러와 전쟁, 환경 문제, 통일 등 실질적이면서도 주요한 쟁점에 대한 방향을 지시한다. 2부에서는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었다면 마지막 3부에서는 교회적인 문제를 다룬다. 특히 교회가 혼란을 겪고 있는 현실적 문제들인 교회에서의 여성 사역자 문제, 주 5일 근무제 문제, 사도 및 선지자들의 존재 문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문제 등에 대한 고찰과 답, 그리고 해결안을 제시한다.

 이 책을 읽을 때 가장 유의해야 할 점은 저자가 지적하듯 이 책에 담긴 내용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단지 한 가지 대안과 방향을 제시하는 것임을 유의해서 더 나은 이해와 방안을 찾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특히 이 책이 씌어진 시점을 고려하여 현재 다르게 접근해야 할 문제가 있다. 주 5일 근무제의 경우 이 책이 씌어질 당시에는 곧 시행을 앞두고 있었기에 중대한 사안이었다. 그로 인해 교회가 고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해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이러한 면들을 생각한다면 저자가 제시한 각각의 방안들은 참고 할 만한, 또 하나의 바람직한 해결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제시된 각각의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한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 책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의 밑바탕을 그리는데 도움을 얻을 것이다. 

 

 혼란한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는 먼저 구비 되어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분명하고도 바른 기독교 세계관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믿는 내용과 믿는 대상, 믿는 이유와 방법 등 기독교의 기본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으면 생활 중에 맞닥뜨리는 여러 문제에 바르고 기민한 대처가 어렵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행동을 하기 힘들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가 지탄 받는 이유 중 하나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지금 바로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왜 믿는 지 등 자신이 믿는 바를 확실히 알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마땅히 갖추고 있어야 할 지식과 이해가 없다면 그것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고백과는 달리 계속 모순된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일상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이 나아갈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헤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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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이승구 지음 / SFC출판부(학생신앙운동출판부)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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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관은 '세계를 보는 관점 혹은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인생관과 통한다.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며 받아들이냐에 따라 그에 대응하는 행동이 달라진다. 그리고 인생이 바뀐다. 따라서 세계관을 형성하는 문제는 무척 중요하다. 세계관을 어떻게 형성하는지에 따라 삶의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반으로하여 세계관을 만드는 것이 좋을까? 이 시대는 절대 진리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던, 다원주의 시대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옳고, 마찬가지로 네가 생각하는 것이 옳게 여겨지는 시대이다. 세상을 바라보고 평가하는데 마땅히 정해진 가치가 없다.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기준이 될 만한 틀이 없다. 사회 혼란은 여기서 발생한다. 

 오늘날에는 사회 윤리와 도덕의 명확한 기준이 없다. 정치, 경제, 문화 등에서 사람들이 나아갈 방향과 울타리를 정해주는 부동의 준거(準據)가 없다. 상황에 따라 기준이 계속 달라진다. 더욱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의 행동에 일정부분 제약을 가해야 할 법 마저 일관된 기준이 없다. 따라서 사람들은 혼란을 느끼고, 예전에는 상상도 못할 마구잡이 행동을 하게 된다.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이 책은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지 알려준다. 그 정의에서부터 그것에 담겨 있는 내용까지,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를 다루고 있다. 1장에서는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앞으로 다룰 내용을 개관한다. 이후 2장부터는 본격적으로 기독교 세계관의 내용, 그 토대를 살펴본다. 각 장은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 그와 관련된 신학과 철학적 기본적인 지식이 없으면 어지러움을 느낄 수도 있다. 따라서 각 장마다 탐구 및 토의를 위한 질문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은 기독교 세계관 입문서로 적격인 책은 아니다. 앞서 말한 어려움 때문이다. 신앙과 지식이 어린 독자들을 위한 배려가 부족하다. 한 마디로 내용이 쉽지 않다. 물론 이 책이 대상으로 삼는 독자층이 애초에 그들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은 반대로 신학과 기독교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어느 정도 있는 이들에게는 적격인 책이다.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을 더욱 깊게 탐구하고 토론하기 위한 관문으로 삼기에 좋은 책이다. 이 책의 이러한 장단점을 잘 파악하여 이 책을 적절히 사용한다면 기독교 세계관 형성에 큰 도움을 얻을 것이다.

 

 오늘날 명확하고, 일관된 세계관은 기독교만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다른 종교와 철학도 나름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긴 하다. 그러나 그들은, 특히나 철학은 계속적으로 변한다. 전 시대의 사상에 대한 반동으로 새로운 사상이 태어난다. 이렇게 철학적 세계관은 바뀌고 또 바뀐다. 따라서 세계관 형성에 참고 할 만한 것이 못 된다.

 반면 기독교 세계관은 언제나 한결 같다. 기독교 세계관 불변의 진리인 성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직 기독교 세계관만이 사람들에게 삶의 진정한 목적과 의미와 바른 방향과 옳은 행동의 기준을 마련해 줄 수 있다. 기독교 세계관은 단연 최상의, 이상적인 준거이다. 기독교 세계관 외에 다른 세계관은 번잡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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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란 무엇인가
마틴 로이드 존스 지음, 이길상 옮김 / 복있는사람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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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현대 기독교 신학사를 살펴보면 참으로 재미있다. 다양한 신학사상이 출현했고, 몰락했다. 여러 신학사상들이 서로 대립과 반목을 반복했다. 이를 간단히 정리해 보자.
 19세기에 슐라이어미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 - 1834)는 성서비평을 발전시켜 자유주의 신학(liberal theology)의 탄생을 주도한다. 18세기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의 이성과 감정 및 경험 등을 강조하며 교회의 신학, 전통 등을 크게 변질시켰다. 이것은 온 유럽을 휩쓸었고, 19세기 중반에는 북미 대륙으로 침투한다.
 정통신학을 변질시킨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대로 미국 개신교회에서는 전통신앙을 지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그 결과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 예수의 신성 등을 주장하는 근본주의(Fundamentalism)가 등장했다. 전통을 지키기 위한 그 시도는 좋았으나, 근본주의자들은 극단으로 치우쳐서 개혁적 변화를 반대하고, 원리주의화, 정치화 되어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한편 1차 세계대전으로 신학 뿐만 아니라 철학 등에서 인간의 이성과 경험 등을 추구하는 낙관적 사조에 대한 회의가 일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서 칼 바르트(Karl Barth, 1886 - 1968)는 자유주의 신학, 다시 말해서 자연신학에 반대하며 신정통주의(Neo-orthodoxy)를 발전시킨다. 이는 정통주의로 돌아가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 중심을 회복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바르트의 노력은 계시를 강조하는 '말씀의 신학'으로 꽃을 피운다. 그러나 바르트는 한때 실존주의 철학과 맞닿아 있다는 비난을 받았고, 무엇보다 일반계시를 부정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시대의 요구는 언제나 변하기 마련이다. 옛사상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새사상이 탄생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교회의 권위를 반대하고, 과학이나 합리성을 강조하며 기계 문명과 도시 생활 등을 중시하는 (신학과는 거의 무관하지만) 모더니즘(Modernism)이 탄생한다. 다시 2차 세계대전 이후 20세기 중반, 모더니즘에 반발하여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사상이 새로 전파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매우 포괄적인 사상이기에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종교적인 특징만을 살펴본다면, 이것은 진리에 대한 반대를 주장한다. 즉 진리는 하나가 아니라 그것에 이르는 방법은 여러 가지라고 말한다. 이는 기독교의 절대 진리를 부정하며 다른 여러 종교를 포용하는 다원주의(Pluralism)의 한 양상이다.
 이러한 신학사의 틈바구니에서 눈여겨 볼 만 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복음주의(Evangelicalism)'라 불리우는 신학운동이다. 복음주의는 하나의 뚜렷한 성격을 지니고 있지 않고 다양성을 띄기에 한 번에 살펴보기는 힘들다. 어쨌든 이는 주로 종교개혁 전통과 17세기 청교도 운동 및 18세기 영국의 경건주의 운동과 미국의 대각성 운동 등에서 그 모체를 찾아 볼 수 있다. 20세기에 복음주의는 (위에서 가장 처음 이야기한)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며 기독교의 전통신앙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복음주의는 현재 진보적 움직임을 보이는 신복음주의(Neo-Evangelical)로 탈바꿈하였다.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이 책은 국내 외로 매우 유명한, 마지막 청교도이자 복음주의 설교자로 불리는 영국의 마틴 로이드 존스(David Martyn Lloyd-Jones, 1899 - 1981) 목사가 쓴 책이다. 정확하게는 그가 1971년 국제 복음주의 학생회(IFES) 컨퍼런스에서 세 차례 강의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에서 로이드 존스는 복음주의의 최근(물론 1971년 당시)의 역사를 간략히 개관하고, 자유주의 신학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의 상황을 염려한다. 복음주의의 변질과 변화를 예고하고, 걱정한다. 이에 따라 그는 교회의 분열을 단호히 반대하고, 복음주의자들이 취해야 할 마땅한 자세를 가르친다. 또한 복음주의의 본질을 제시하며 그것을 붙들 것을 강조한다.
 로이드 존스가 강의한지 정확히 30년이 지났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의 메시지가 아직도 효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이를 긍정적으로 본다면 로이드 존스의 안목에 깊이가 있고, 그의 분별력이 참으로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정적으로 본다면 3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우리는 같은 문제로 고민하며 씨름하고 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아직도 같은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한 채 도리어 악화되고 확장되어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그렇기에 로이드 존스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게 된다. 로이드 존스 만큼 깊은 혜안으로 바른 말을 하는 이가 적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 시대는 다원주의 시대이다. 과장하여 말하면, 이 시대는 모든 것이 종교인 시대이다. 종교를 부인하는 무신론자들조차 일종의 종교성을 띄고 있다. 과학이 절대적 가치로 자리 잡은 지금, 그것을 신봉하는 이들은 부인을 하지만 과학에 대한 맹신은 또 다른 종교적 성향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금은 극심한 혼돈의 시대이다. 기독교 일각에서는 연합을 주장한다. 겉보기에는 분명히 옳다. 그러나 단지 실리를 추구하는 것일 뿐 진지함이 없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진정한 연합이 아니라 단지 야합에 불과하다. 다른 한쪽에서는 교회 및 기독교 단체가 내부적으로 대립과 반목을 거듭하고 있다. 그리스도인과 무신론자의 대립은 말할 것도 없다. 혼란이 극심하고, 분열이 반복되고 있다. 무엇 하나 정리가 안 되고 계속 어질러지기만 한다. 참으로 어수선한 시대이다. 
 이렇게 정신없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로이드 존스의 목소리를 빌리면 참된 복음주의자가 되어야 하고, 좀 더 본질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우선 무엇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워야 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윽고 이 시대 어딘가로 표류하여 정체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이 오셨을 때, 그분을 못 알아보고 당신은 누구시냐며 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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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받는 보수신학 - 개정증보판
김의환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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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세기 초반, 미국 보수주의를 상징하는, 개혁주의 신학의 보루였던 프린스턴 신학대가 진보주의인 자유주의 신학에 넘어갔다. 이로 말미암아 축출된 메이첸(J. Gresham Machen) 교수는 반틸(Cornelius Van Til) 등 일단의 교수들과 함께 보수주의 신학을 지키기 위해 1929년,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대를 설립한다. 그로부터 약 10년 뒤, 한국 교회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도전받는 보수신학'

 

 이 책의 저자는 총신대 및 칼빈대 총장 등을 역임한 바 있는 고(故) 김의환 교수이다. 그는 보수신학을 대표하는 신학자로 개혁주의 신학을 보존하고 및 발전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책에서 김 교수는 한국 교회 보수신학의 역사를 살펴보고, 현재를 진단하며 미래를 예측한다.
 총 14장으로 되어 있는 이 책에서 저자는 먼저 자유주의 신학의 흐름을 간략히 살펴본다. 신약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보수 신학을 위협하는 자유주의 신학이 어떻게 이어져 내려왔는지 개관한다. 이어 다시 역사를 더듬어서 한국 보수 신학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평양신학교의 태동과 발전 및 자유주의에 의한 분열상 등을 살펴본다. 더불어 세계 보수 신학의 동향도 둘러본다. 그 외에 보수주의 교회를 여러 관점에서 분석한다.
 이 책을 통해 독자는 한국 보수신학 및 보수주의 교회의 역사와 발전 및 현재 동향을 살펴볼 수 있다. 동시에 그 문제점과 부족한 부분을 진단받음으로 미래를 대비 할 수 있는 안목을 얻을 수 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개정증보판은 1970년에 나온 초판에 비해 분량이 대폭(100페이지 이상) 늘어났지만 내용의 개정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추가된 후반 7장을 제외하고, 전반 7장은 글의 전개를 통해 짐작하건데 1970대 초판의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초판 이후 40여년이 지난 우리의 실정에는 맞지 않는 내용과 진단이 있다. 게다가 중복되는 내용이 여럿 있어 지면 낭비를 초래했다.
 이러한 몇 가지 아쉬운 점을 제외하면 이 책은 한국 보수신학의 면면을 살펴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보수신학의 자세와 역할을 배우게 될 것이다. 나아가 21세기에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도전을 맞이해야 하는지 그 방향성을 깨닫게 될 것이다.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보수신학의 토양을 다진 한국 보수주의 교회는 평양신학교의 뼈아픈 분열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이후 해방, 6.25 동란, 그리고 급속한 경제 발전 등으로 이어지는 민족의 급박한 역사와 함께 한국 보수주의 교회는 때론 발전하는가 하면 또 때론 정체를 겪기도 하였다. 안팎으로 끊임없는 분열과 대립을 겪으며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21세기가 되어 한국 보수주의 교회는 또 다른 전기를 맞고 있다. 번영신학, 교회성장 운동, 신비주의 영성 등 각종 비성경적이고, 비기독교적인 것들의 도전으로 지독한 몸살을 앓고 있다. 이에 바른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할 보수신학이 도리어 갈피를 못 잡고 있다. 보수주의 교회와 보수신학은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 유일한 방법, 최상의 해결책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성경을 더욱 꼭 붙드는 것이다.
 진리는 만고불편(萬古不變)하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기에 진리인 것이다. 성경이 진리인 것은 지난 2천년 역사가 증명한다. 아무리 모진 풍파를 겪고, 거센 도전에 직면 했어도 성경은 꿋꿋이 살아남았다. 성경에 반하는 수많은 이설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반면 오직 성경만이 여전히 생동감 넘치는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성경이 진리가 아니었다면 그 또한 진작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새 도전에 직면하여 보수신학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진리인 성경을 붙들어야 할 것이다. 시대 상황에 맞춰 성경을 해석 할 것이 아니라, 개혁주의 신학의 해석을 바탕으로 성경 말씀을 시대에 분명히 가르쳐야 할 것이다. 성경의 권위를 더욱 높고, 견고히 세워야 할 것이다. 성경의 객관적 권위가 사라진다면 보수신학은 곧 무너질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은 분명하다. 교회에는 오직 멸망만이 주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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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이렇게 형성하라 - 성경적 영성에 대한 바른 길잡이
이태복 지음 / 지평서원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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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는 급속한 산업 발전으로 물질적 풍요를 이루었다. 물질적 풍요는 부를 최고의 가치로 만들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부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게 해준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따라서 사람들은 온통 부를 축적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이로 인해 정신 건강은 소홀히 여겨졌다.
 사람들은 차츰 이것의 병폐를 깨닫기 시작했다. 부는 여전히 중요한 가치였다. 하지만 그것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무언가 부족함을 느꼈다. 이에 따라 21세기에 들어서자마자 세계적으로 웰빙(Well-being)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의 관심은 정신과 육체의 건강으로 옮겨졌다.
 웰빙의 여파로 웰빙 음식, 단전호흡과 요가, 뉴에이지 음악, 여행과 독서 등의 여가와 취미 생활이 강조 되고, 각광을 받았다. 사람들의 관심은 부의 축적보다 몸과 마음의 휴식에 쏟아졌다. 삶의 여유에 초점이 맞춰졌다. 원하는 무언가를 얻는 것보다 잘 먹고, 잘 사는데 관심이 집중 되었다. 외적인 면보다 내적인, 나 자신에 집중이 가해졌다. 이러한 웰빙을 다른 말로 대체한다면 (물론 꼭 들어맞지는 않지만) '영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웰빙과 영성을 동일시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영성과 일면을 공유하고 있다.
 '영성(Spirituality)'을 한 마디로 정의 한다면 나는 '내적 삶의 고양(高揚)'이라고 말하고 싶다. 영성은 '나'라는 존재의 중요성과 이 세상에서의 삶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내적인 성품을 계발하고, 정신 건강을 고양하기 위한 방편이다. 영성의 본질은 자연 혹은 우주와의 합일의 추구에 있다. 나보다 더 커다란 실제와의 합일을 통해 영적인 성품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리려는 노력이다. 신성(神性)의 영역에 도달하여 자아의 완성을 이루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신성(神性)과의 합일을 통해 신적 존재가 되려는 일종의 종교적 열망이다. 영성에 대한 관심은 이러한 비종교적 (사실은 너무나 종교적인) 영역에서 만이 아니라 종교 영역, 기독교에서도 웰빙과 맞물려 크게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독교 영성은 비종교적 영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비종교적 영성은 초월적 존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기독교의 영성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터럭 같은 인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비종교적 영성은 혼합주의 또는 절충주의라고 한다면 기독교 영성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의 순수주의 혹은 단일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기독교 영성은 점점 혼합주의에 물들어 가고 있는 매우 우려 할 만한 양태를 보이고 있다.

 

 '영성 이렇게 형성하라'

 

 이 책은 기독교, 다시 말해서 성경적 영성에 대한 바른 안내서이다. 성경적 영성은 무엇인지, 그것은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려준다. 성경적 영성을 얻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가르쳐준다.


 이 책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기독교 영성의 핵심사항
 청교도 영성과 신비주의 영성의 대비
 적용

 

 본문은 총 7장으로 되어 있다. 각 장은 위의 구조와 같이 먼저 성경을 통해 그 장에 해당하는 핵심사항을 살펴본다. 그 다음으로 청교도 영성과 신비주의 영성을 서로 대조대비 시켜 청교도 영성의 장점을 드러내고, 신비주의 영성의 단점을 지적한다. 물론 서로의 단점과 장점도 감추지는 않는다. 끝으로 성경적 영성의 적용 방법을 정리하여 알려준다.
 본서에서 강조하는 영성 형성의 방법은 아래와 같다.

 

 영성의 규범 : 성경
 영성의 수원지 : 거듭남
 영성의 대상 : 삼위 하나님
 영성의 방법 : 영적 훈련(말씀 연구, 묵상, 기도)
 영성의 산실 : 교회(설교와 성례, 주일 성수, 성도의 교제)
 영성의 추진력 : 확신
 영성의 목표 : 경건의 실천(412p)

 

 저자는 이러한 과정과 방법을 통해 올바른 성경적 영성을 형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7 가지 중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된다. 하나라도 빠뜨리면 안 된다. 7 가지를 고루 갖추고, 실천해야 함을 강조한다. 
 정리하면, 저자는 오늘날 기독교에 틈탄 신비주의 영성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반대 한다. 청교도 영성 추구의 이유를 논증하고, 그 우수성을 조리 있게 변론한다. 성경을 기반으로 한 영성 형성의 본질적 방법을 잘 가르쳐 준다. 이 책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올바른 성경적 영성 형성의 지도(map)'

라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은  읽기가 쉽다. 전개가 탁월하다. 내용이 명료하다. 초신자도 쉽게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 성경적이다. '성경적'임을 내세우지만 실은 헛물만 켜고 있는 다른 책들과 달리 진정으로 성경적이다. 참으로 건실한 책이다.
 본인은 사람들이 다른데서 영성 형성의 방법을 찾는 것을 염려한다. 엉뚱한 영성 형성의 방법을 통해 비기독교적 영성을 형성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지 말 것을 당부한다. 이 책을 통해 올바른 영성 형성 방법을 배우고,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 노력 할 것을 크리스천 모두에게 촉구한다.

 

 중세 수도원을 중심으로 발흥한 신비주의 영성(물론 신비주의 영성의 기원은 그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은 종교 개혁을 통해 철퇴를 맞았다. 종교 개혁자들과 그 뒤를 잇는 청교도들을 통해 성경적 영성이 강조되고, 전파 되었다. 그렇게 잘못된 영성이 뿌리가 뽑힌 듯 보였다. 그러나 그 생명력은 질겼다. 오늘날 신비주의 영성이 되살아나 기독교를 잠식하고 있다. 그것이 마치 진정한 기독교 영성인 것처럼 많은 성도들에게 시나브로 전파되고 있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청교도, 개혁주의 서적이 기독교 서적 시장에서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신비주의 및 뉴에이지 영성가들의 책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잘못된 신비주의 영성이 마치 올바른 기독교 영성인 양 많은 신앙서적과 기독교의 메이저 단체를 통해 전파 되고 있다. 기독교 영성은 혼합주의로 물들어 있다. 종교 개혁의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인 '성경으로'를 다시 높이 올려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신비주의 영성은 겉모양은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다. 도리어 성경과 멀어지도록 만든다. 신비주의 영성의 하나님을 추구하는 열심은 분명히 본받을 만하다. 그러나 그 열심은 잘못된 방향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든다.
 기독교는 성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성경과 조금이라도 다른 주장을 하면 기독교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성경이 말하는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추구하면 결국 하나님과 멀어지게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제시하는 방법만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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