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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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를 지배하는 자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 과거를 지배한다." 

 사람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 그리고 세뇌가 이루어지는 사회. 어찌보면 참으로 무섭고 숨박힐 듯 답답한 그런 사회가 과연 존재할까? 물론 존재한다. 과거 20세기 전체주의 사회가 그랬고, 오늘 존재하는 북한 공산정권이 그렇다. 그러나 이들 사회에서는 감시와 통제가 사회 전체에 미치기는 하였지만 기술적 한계로 구석구석에까지 미치지는 못하였다. 반면 여기에 철저한 감시와 통제가 이루어지는 사회가 있다. 

 '1984' 

 이 소설 속에는 전체주의가 어떠한 의미에서 온전하고도 과도하게 실행되는 사회가 등장한다. 오세아니아라는 통합 국가에서는 빅 브라더라는 인물의 독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을 감시하기 위한 텔레스크린이 집안은 물론 거리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이 기기는 사람들의 행동과 소리를 정확히 잡아내고, 당에 어긋나는 행동이나 말을 하면 즉각 경고 음성이 나온다. 당원들은 하루 종일 이 텔레스크린의 감시를 받으며 생활을 한다.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 본 소설 속의 사회는, 이제는 기술적으로는 충분히 실현 가능하지만 인도적, 도덕적 차원에서는 결코 등장할 수 없는 사회인 것만 같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제 2의 히틀러가 등장한다면 그런 사회가 등장할지도 모를 일이다.  

 주인공 윈스턴은 텔레스크린이 자신을 볼 수 없는 방 안 한 구석에서 당에 대한 작은 일탈을 시작한다. 윈스턴은 당의 체제에 반대하기 위해 한 여자와 금지된 사랑을 나누고, 당의 전복을 꿈꾸며 비밀리에 형제단에 가입한다. 그러나 그의 일탈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결국 그는 스스로 예상 했듯이 붙잡히고, 고문을 당한다. 윈스턴은 갖은 고문을 받으며 당을 부정하고 거부하지만 점차 세뇌되어 간다. 그리고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온갖 죄를 자백한다. 그렇게 자존심이 무너져 가면서도 그 자신은 단 하나의 자존심만은 지켰다고 자부한다. 바로 사랑하는 연인인 줄리아에 대한 감정은 지켰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101호실로 향하게 된 그는 마지막 자존심마저 버린다.  

 본 소설은 사회 감시 및 통제 그리고 세뇌가 얼마나 무섭고 혐오스러운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 인간의 힘이 정부 권력 앞에서는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잘 보여준다. 왜 다수의 사람들이 체제를 전복시키지 못하는지 그 무력함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주인공인 위스턴을 통해 한 인간의 의지는 누군가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조정하고 바꿀 수 있음을, 강압과 세뇌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의지조차 지킬 수 없는 한 없이 나약한 존재임을 알게 한다. 

 마치 이 소설은 그 속에 등장하는 통제 사회가 등장 할 것을 예고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때를 위해 미리 경고하는 듯하다. 한 사람 혹은 소수의 힘과 노력은 국가 권력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님을 말이다. 그때가 도래하면 그냥 순응하라고 말이다. 아니 어쩌면 조지 오웰은 그런 사회가 등장 할 수도 있음을 예견하여 만약 그런 사회가 등장하면 그에 반하는 방법의 실마리를 제공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오웰은 철저히 통제된 사회의 등장을 감지하여 그런 사회에서의 인간의 무력함을 미리 보여줌으로써 아예 그런 사회가 등장하지 못하도록 노력할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경고하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1984' 속 사회를 단순히 소설 속 이야기로만 취급하기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다. 각국의 정상들과 주요 인물들이 암암리에, 그리고 공공연하게 세계단일정부(New World Order)를 언급하여 그 탄생을 암시하고 있다. UN(United Nations)은 그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과연 언젠가 세계단일정부가 등장할까? 그리고 만약 등장한다면 그 사회는 '1984' 속 사회를 구현하여 사람들을 지배할까? 우리로서는 전혀 알 수 없다. 그 키는 세계 최상위 권력층에 있는 일부의 사람들만이 쥐고 있고, 그 외에 우리는 심각한 정보 부재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장담할 수 있는 앞날은 없다. 혹 앞날을 예상 할 수 있더라도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촉각을 곤두세우며 세계의 변화를 예의 주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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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믿음의 글들 240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강유나 옮김 / 홍성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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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독교 변증가인 C. S. 루이스가 큐피드와 프시케의 신화를 읽고 영감을 받아 쓴 이 책은 다소 어려운 주제를 갖고 있다. 나의 얼굴과 신의 얼굴을 찾기 위한 기다림과 노력. 신과 대면을 대면하기 전 나의 얼굴, 자신을 알아가는 여정이 그려져 있다.  

 이야기는 글롬 왕국에서 시작된다. 글롬의 왕 트롬은 후계자로 삼을 왕자를 얻기 위해 새 왕비를 맞이하지만 또 딸을 얻는다. 장녀인 오루알은 막내 동생 프시케를 또 딸이라며 다른 딸들과 더불어 멀리한 아버지 대신 정성을 다해 보살핀다. 그러던 중 몇 해에 걸쳐 글롬에 흉년이 닥치고 웅깃의 신전 사제는 신에게 바칠 재물로 프시케를 요구한다. 결국 프시케는 재물로 바쳐진다. 오루알은 동생을 무척 사랑했던 나머지 동생의 시신이라도 수습하기 위해 재물을 받친 곳에 몰래 찾아간다. 그런데 뜻밖에도 프시케는 살아 있었다! 그것도 건강한 모습으로! 프시케가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한 오루알은 프시케에게 성으로 함께 돌아가자고 설득한다. 하지만 프시케는 완강히 거부한다. 이에 어쩔 수 없이 한 발 물러난 후에 다시 그녀를 찾은 오루알은 극단적인 방법으로 맞선다. 급기야 오루알은 프시케에게 요구해서는 안 될 요구까지 한다. 그 요구의 결과는 참으로 잔인한 것이었는데...  

 본인은 이 글에 등장하는 한 가지 사건을 통해 성경 속 이야기가 떠올랐다. 오루알이 프시케에게 남편의 얼굴을 확인하라는 잔인한 요구를 하는 장면은 뱀이 하와에게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라고 유혹하는 이야기와 매치 되었다.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한 프시케는 그 댓가로 결국 유배를 가게 되는데 이는 마치 아담과 하와가 동산에서 쫓겨나는 것과 같았다. 인물을 달리하여 오루알이 자신의 얼굴을 항상 베일로 가리고 다니며 자신의 사랑의 타인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자지 자신을 향한 것이었음을 깨닫는 장면은 인간 죄성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하나님을 대면하기를 고대하는 우리 인간은 먼저 자신을 찾는 과정을 겪는다. 즉 성화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닮아가고, 그럼으로써 그분을 대면하기 위한 준비를 해 나간다. 이는 마치 오루알이 자신의 얼굴을 가린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얼굴을 찾기 전까지는 신을 볼 수 없는 오루알. 그녀의 모습은 마치 우리 인간을 대변하는 것 같다.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기 때문에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은 아니다.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분명히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 세계관과 연결하여 읽기에는 무리가 있는 소설이지만 읽고 생각하면 몇 가지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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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나아갈 길 - 기독교 세계관적 교회론 탐구
이승구 지음 / SFC출판부(학생신앙운동출판부)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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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계속 변하고 있다. 그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오늘의 모습은 어제와 다르다. 또다른 내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어제는 먼지 쌓인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고, 내일은 순수한 백지 상태와 같다. 오늘은 그저 페이지를 넘기는 그 순간일 뿐이다.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

 본서는 이승구 교수의 기독교 세계관 시리즈 제 3권에 해당한다. 본서에서 저자는 교회론의 영역에서 한국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절기, 예배, 헌상, 설교, 경건 등 교회의 매우 현실적인 문제들을 다루며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생활과 신앙 생활의 바른 방향을 가르친다. 천국, 구원, 종말 등 몇 가지 성경적, 신학적 문제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돕는다. 한 마디로 여러 문제들을 통해 바른 신앙 생활의 모범을 제시하고, 그리스도인의 정향성을 지시한다.
 본서에서 제시하는 각각의 안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기존에 가르치던 성경에 근거하고, 충실한 전통을 그대로 살리고 있다. 저자는 성경적 전통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그것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필요한 것임을 밝힌다. 교회의 본질은 옛것을 폐기한 새로운 변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옛것의 바른 적용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따라서 본서에서 새로운 것을 기대한다면 실망 할 것이다. 저자의 주장들이 어찌 보면 참 고루해 보일 수도 있다. 세상은 변하는데 교회는 전혀 변하려 하지 않음을 답답하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본서를 제대로 읽었다면 교회의 전통이 왜 중요하고, 왜 그것을 지켜야 하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세상'은 변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또 계속 변해야 하지만, '교회'는 변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고 계속 변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끝까지 고수해야 할 정체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정체성, 다시 말해서 성경에 근거한 교회의 목적과 사명은 교회에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순종을 요구한다. 혹 그 두 가지가 교회에 요구하는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불순종에서 순종으로의 변화이다.
 교회는 세상의 요구에 따라 변화할 때에는 결코 건강해지지 않는다. 이것은 교회다움을 잃는 첩경이다. 교회는 (성경에 근거한) 옛것을 지킬 때에만 건강해진다. 주님의 요구에 충실하고, 그분의 뜻을 실현할 때에 교회는 더욱 교회다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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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신앙의 기초 세트 - 전3권 (양장) 개혁주의 신앙의 기초
김은수 지음 / SFC출판부(학생신앙운동출판부)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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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세트의 각 권은 본문이 약 250여 페이지 내외로 평균적인 양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세 권의 합은 700페이지가 넘기 때문에 한 권으로 본다면 결코 얇은 책이 아니다. 그럼에도 본서는 그 내용이 상당히 간명하여 읽기가 쉽다. 술술 잘 읽힌다. 빠르게 읽을 수 있다. 물론 기본적 신학 지식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읽는 속도와 이해 정도가 달라질 것이다.
 (각 권 평은 따로 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세트 평가를 간단히 한다면, 먼저 단점을 이야기 하고 싶다.

 첫째, 혹 김헌수 목사님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해서와 같은 강해를 기대한다면 실망 할 수도 있다. 위에 세트는 강해서가 아니기 때문에 깊고 넓은 설명이 없다. 둘째, 해설서이기 때문에 삶에 대한 신학적 적용점은 있지만 일상에서의 적용점은 제시되지 않는다. 셋째, 주석을 미주로 처리 했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그런데 주석에서 참고 할 만한 내용이 꽤 있는 상황에서 각주가 아니라 미주로 처리하였기에 보기가 매우 불편하다. 넷째, 여담으로 칼라를 잘못 선택한 것 같다. 2권의 연두색과 3권의 흑갈색(?)이 책을 예쁘게 하는 효과를 낳긴 했지만 동시에 몇몇 문답과 성구가 잘 보이지 않는 역효과가 발생 했다. 때문에 몇몇 문답은 눈이 아파서 읽지를 못했다.

 이제 장점을 이야기 한다면 해설서만의 특징이 돋보인다. 첫째, 핵심적인 해석이 단연 일품이다. 군더더기가 없다. 덕분에 내용을 명확히 알고 이해할 수 있다. 둘째, 각 문답과 관련된 교리가 제시 된다. 각 문답을 개혁주의 교리를 바탕으로 최대한 간결하면서도 명확히 가르쳐 준다. 이는 곧, 바르고 건전한 교리의 습득을 의미한다. 셋째, 여러 성구가 포함되어 있다. 문답마다 그에 상응하는 성구가 바로 아래 삽입되어 있어 큰 도움과 참고가 된다. 여담으로 몇몇 성구는 해당 문답과 안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억지로 끼워 넣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성구가 있다. 넷째, 소요리 문답에는 빠져 있는 교회의 표지와 교회의 사명 등 교회론을 추가하고 있어 완성도를 높였다. 이는 참으로 적절한 조치라는 생각이 든다.

 이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이렇게 총평을 하고 싶다. 장점을 높이 사서 소요리 문답 해설서라고 제한 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개혁주의 조직신학서라고 해도 괜찮을 세트라는 생각이 든다.

 평을 마무리 하며 제한하고 싶은 게 있다. 강해가 아니기 때문에 생길 수밖에 없는 (단점으로 언급한) 본 세트의 미비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최낙재 목사님의 소요리문답 강해세트를 함께 읽는다면 참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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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 101가지 성경 이야기 2 한국 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 101가지 성경 이야기 2
윤석준 지음 / 부흥과개혁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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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 시간에 웃음 소리가 꽃핀다. 그런데 아멘 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왜 그럴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한국 교회 강단에는 온전한 설교, 설교다운 설교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설교자들은 설교 시간 거의 대부분을 예화로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한다.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하지만 회중들의 입에서는 좀처럼 '아멘'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습관적으로 '아멘'을 강요한다. "믿으시는 분은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아멘'은 진리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아멘'은 진리를 전하면 하지 말라고 해도 자연스레 터져 나오게 되어 있다. 진리를 전하지 않는데 어찌 회중들의 입에서 '아멘'이 나올 수 있을까? 설교자들은 그 사실을 잊었나보다.
 진리가 사라진 강단.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땅의 너무나 많은 교회의 현실임에는 분명하다. 혹 진리를 전하더라도 성경을 바로 해석하지 못하고, 잘못된 해석을 전하는 경우도 있다. 내 마음대로 해석.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 성경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잣대와 인본주의 사고 방식으로 성경 내용을 바라본다. 오늘 나의 상황에 성경 내용을 끼워 맞춘다. 그렇게 바라본, 그렇게 전하는 성경 내용은 더 이상 진리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은 위기일까? 기회일까? 과연 한국 교회는 대안을 찾을 수 있을까?

 '한국 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 101가지 성경 이야기2'

 이 책은 한국 교회의 많은 설교자 혹은 평신 들이 잘못 알고, 이해하며 전하는 101가지 성경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전편에서는 (1, 2권이 다음 구분과 같이 딱 나눠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주로 해석학적 오류, 인문/도덕적 관점 등의 개입으로 인한 오류를 지적하는 반면 후편인 본서에서는 이해 부족과 오해 및 신학적 관점 차이 등으로 인한 오류를 지적한다. 이와 동시에 개혁신학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구속사적 해석'을 강조한다. 본서는 그러한 해석적 특징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그러한 해석의 관점에서 오류들을 교정한다.
 따라서 저자가 강조하는 '구속사적 해석'의 전통, 다시 말해서 개혁주의 신학을 따르지 않는 이들은 일부 동의할 수 없는 해석과 입장 차이가 느껴질 것이다. 대표적으로 10장 '성령, 방언, 신유, 축사에 관하여' 등을 들 수 있다. 입장과 관점이 어떠하든

 "종교개혁 이후,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라 불리는 신학 전통 안에서 가장 풍성하고 균형 잡힌 성경 해석의 열매들이 맺혔습니다."(10p)

라는 백금산 목사의 추천사의 말에는 비교적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그렇지 않더라도 오늘의 강단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면 본서에 담긴 종교개혁 전통을 계승하는 '구속사적 해석',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본서의 내용을 조금 더 관심있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다음과 같이 정리, 총평하고 싶다. 첫째, '구속사적 해석'이 해석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어느 해석이 가장 정확한 해석인지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야 할 수 있겠지만 (아래서 간략히 이야기 할) 성경에 담긴 구속사를 생각한다면, 성경은 '구속사적 해석'으로 해석하는 게 가장 안전하며 알맞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본서는 가히 바른 성경 해석의 시작과 끝이자 참다운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여기서 주의 할 점은 저자가 내놓은 결과물이 더 이상의 이견이 없는 해석이라는 말이 아니다. 저자의 해석학적 방법과 지향점이 재림 전, 현재로서는 가장 안전하며 표준으로 삼을 만한 바른 해석법이라는 말이다. 둘째, 바른 성경 해석에 대한 저자의 열정이 돋보인다. 몇몇 본문에서 보여지는 저자의 통렬한 일갈은 비록 그 어조에 있어 다소 강하게 느껴지기는 하나 그만큼 잘못된 성경 해석에 대한 저자의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저자의 강한 외침 속에 바른 성경 해석에 대한 열정과 촉구가 담겨 있음이 느껴진다. 성경 해석에 있어 저자가 얼마나 엄격하고 바른 해석을 위해 얼마나 사력을 다하는지 엿보인다. 이상과 같은 저자의 노력과 열정이 담긴 본서는 참으로 참고 할 만하고, 읽을만 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다. 꽤 두꺼운 책임에도 독자는 읽는 내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쏙 빠져들 것이다.   

 예화를 통해 덕담이나 교훈만 전하며 진리 전하기는 등한시 하거나, 잘못된 성경 해석을 통해 진리 아닌 진리를 전하는 것 모두가 옳지 않다. 그것은 설교자의 바른 자세가 아니다. 설교자가 행할 바가 아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분 대신 전하는 자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누구보다 더 경건한 마음과 바른 자세로, 그리고 옳은 견지에서 성경을 바라보고 해석하며 진중하게 전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의 많은 설교자들은 농담 따먹기와 신변잡기나 하며 만담가 수준에 조차도 못 미치는 수준을 보인다.
 설교자는 진리를 전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을 위해 설교자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해야 할 책임이 있다. 강단에서 진리가 전파되지 않으면 교인들의 바른 신앙을 보장할 수 없다. 온전한 말씀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건강한 교회, 온전한 교회는 있을 수 없다. 바른 말씀은 교회의 밑바탕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교회의 3대 표지인 말씀, 성례, 치리 중 말씀의 바른 전파가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이다.
 성경은 '창조', '타락', '구속', '재창조' 라는 큰 틀을 따라 내용이 구성되어 있다. 즉 성경에는 명백히 인류 구속사가 담겨 있다. 따라서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는 '구속사적 해석'이 요구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계획하신 게 무엇인지,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시고 성취하신 게 무엇인지 또한 성령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적용시키시는 게 무엇인지가 성경에 어떻게 담겨 있는지를 정확히 짚어내야 한다. 인물과 인물, 사건과 사건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해 어떻게 역사(役事)하시는지를 깨달아야 하며 그분이 쓰신 구속사의 흐름과 과정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른 성경 해석의 밑바탕이다. 바른 설교란 성경에 담긴 이러한 구속사를 전하는 것이다.
 바른 성경 해석과 바른 설교가 절실히 그리운 오늘이다. 그 두 가지가 절실히 필요한 지금이다. 바른 성경 해석이 설교를 통해 교인들에게 전해질 때 교인들은 구속사의 연장선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며 종말의 때인 지금을 온전히 살 수 있다.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와 전파가 회복 될 때 강단은 활력과 열정을 회복 할 수 있다. 그때에 회중석에서는 아멘이 터져 나오고, 찬양이 울려 퍼질 것이다. 한국 교회가 처한 작금의 위기는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시간이다. 기회는 바른 성경 해석과 바른 말씀 전파에 있다. 이 기회를 살릴 것인가? 아니면 놓칠 것인가? 한국 교회는 지금 그 기로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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