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 어떻게 되는가 비교신학 시리즈 3
존 샌더스.가브리엘 파크레.로날드 내쉬 지음, 박승민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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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될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전에 태어난 사람, 예수님이 오신 후에 태어났지만 복음 전도자가 그에게 이르지 못한 사람. 이렇게 복음을 듣지도, 들을 수도 없던 시대와 지역에 살던 사람은 어떻게 될까? 과연 그런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성경에서는 이에 대해 답을 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사고와 관점에서는 이렇게 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하실 것이다."

라고 말이다.
 


 '복음을 듣지 못한사람 어떻게 되는가?'

 이 책은 미전도인의 운명에 대한 세 가지 관점을 담고 있다. 포괄적 구원론, 신적 견인론, 제한적 구원론이라는 세 관점에서 미전도인의 운명을 예상한다.
 먼저 포괄적 구원론은

 "성부는 일반 계시와 양심, 인간 문화를 통해 성자와 성령으로 미전도인에게 다가가신다. 오직 예수님의 구원 사역만이 미전도인을 위한 구원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의 속죄 사역을 속죄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에게조차 적용하신다. 만약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계시에 대해 믿음으로 반응한다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그들에게 적용하실 것이다."(51, 52p)

라고 본다.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미전도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복음을 직접적으로 듣지 못해도 계시에 기초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참으로 기쁜 말이 아닐 수 없다. 미전도인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그 믿음이, 그 계시가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무엇으로 확신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주장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7)고 한 말과 전면 배치된다. 그리고 계시가 아니라 독생자를 믿어야 영생을 얻는다(요 3:16)고 한 말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구원에 이른다는(롬 10:9, 10) 말씀과 어긋난다. 포괄적 구원론은 그 의도는 좋으나 말씀과 너무도 대조적이다.
 신적 견인론은 사후에도 믿음의 여지가 주어져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관점은 택함 받은 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그 영원한 안전으로 구원에서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는 견인의 교리를 이렇게 해석한다.  

 "하나님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인류 전체에게 알리시기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다시 말해 복음을 모든 개개인에게 전파하시는 끝까지 인내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110p)

 즉 하나님의 인내하심으로 불신자의 죽음 후에도 하나님은 선택한 불신자를 얻으려 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옆에 있던 한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는 말씀을 통해 유추해 볼 때 인간은 죽음 즉시 구원의 여부가 판가름 난다고 할 수 있다. 죽음으면 그걸로 끝이다. 그 이후에도 구원의 여지가 있다면 급기야 어떠한 악한이라도 구원 받을 것이라는 주장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제한적 구원론은 익히 알고 있는, 복음을 듣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전통적 주장이므로 생략한다. 다만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 본 관점의 논찬자는 다른 두 관점의 논찬자들을 반박하기 위해 자신의 지면을 다 써버린 점이 무척 아쉽게 느껴진다. 그 마음은 이해하나 올바른 논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관점을 대변하는 것이 더 적절한 응수였겠다는 생각이 든다. 반박은 (지면으로 인해 한계가 있지만) 논평을 통해서만 함이 더 올바른 처사였을 것이다.
 다양한 의견을 살펴봄으로 처음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 한다면 실패할 것이다. 머리만 아프고, 답은 더욱 오리무중이 될 것이다. 인본위적으로 본다면 포괄적 구원론이 더 맞는 듯하다. 반대로 철저히 성경적으로 본다면 제한적 구원론이 맞는 듯하다. 사랑과 인내를 강조하면 신적 견인론이 더 그럴 듯하다. 어느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본서는 학문적 논의를 위해서라면 참고하기에 좋은 책이지만, 신앙을 위해서라면 결코 도움이 안 되는 책이다.
 이제 본인의 의견을 제시함으로 처음의 질문에 답을 하고, 본 평을 마무리 하려 한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될까? 서두에서 말했듯이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대로 하실 것이라고 말하는 게 가장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는 이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리는 그 답을 하나님의 뜻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경은 간접적으로 이에 대해 답을 한다. 우리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답을 찾을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에 귀기울이고, 말씀을 따라야 한다. 성경에서 뭐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못 박아 말한다. 이것 하나로 충분한 답이 된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을 것이다. 복음을 듣긴 하였으나 그 자신의 고집으로 믿음을 거부한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모든 시대를 막론하고 전도인이 이르지 못하여 복음을 듣지 못하고 따라서 믿지 못할 수밖에 없던 사람들은 어쩌면 좋다는 말인가? 우리는 이에 대한 답도 할 수가 있다.
 간단히 말하면 그런 사람들은 택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택자에게는 분명히 복음이 전해질 것이다. 복음을 들어야 믿음을 가질 수 있고, 믿음이 있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도인이 이르지 못하여 불신자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택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너무 가혹하게 들리는가? 그렇다 하여도 어쩔 수 없다. 택자가 아니라면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설령 복음을 수백, 수천 번 들어도, 아무리 믿음을 권유 받아도 믿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 자신의 죄와 악으로 인함이지 하나님의 차별로 인함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전도인이 이르지 않아 구원을 얻지 못한 불신자도 그 자신의 죄와 악으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이는 참으로 이해가 안 되고, 무척 기가막히는 말이다. 인간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이 악해 보인다. 그러나 본인도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하나님의 주권을 우리가 쥐락펴락 할 수 없고, 그릇의 운명은 토기장이에게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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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란 무엇인가 - 존 스토트가 성경에서 발견한 다섯 가지 설교자상
존 R. 스토트 지음, 채경락 옮김 / IVP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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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하면 아마도 우리는 목회자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예배 때마다 강단에 서서 말씀은 전하는 자를 말이다. 양들에게 말씀을 먹여 바른 길로 가도록 하는 목회자는 분명히 '설교자'가 맞다. 따라서 그 '설교자'는 참으로 책임이 무겁다. '설교' 즉 가르침을 통해 양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설교자란 무엇인가'

 이 책은 얼마 전 생을 마감한 존 스토트의 책이다. 복음주의권에서 진리를 수호하고 전하며 많은 가르침을 남긴 그는 본서에서도 귀한 가르침을 전한다. 이 책은 "1961년 미국 풀러 신학교의 페이튼 강연에서 강연한 내용을 확장하여 1964년에 단행본으로 출간"(책 소개 인용)한 것이다. 출간 된지 거의 50년이 되어 감에도 그 메시지가 살아있는 듯하다.
 스토트는 '청지기, '사자', '증인', '아버지', '종' 이렇게 다섯 가지의 이미지를 통해 설교자의 자세와 능력, 설교의 방법을 등을 말한다. 설교자의 역할에 대해 조목조목 전하는 이 책을 통해 일반 독자는 설교자를 알아가고, 설교를 대하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설교자는 설교자로서의 바른 태도를 익히고, 잘못된 모습을 수정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얇고 작은 책이지만 스토트가 제시하는 설교자의 모습을 통해 설교자는 보다 나은 설교자가 되는데 도움을 얻고, 독자는 설교자와 설교의 귀중함을 느낄 것이다. 설교자들에게 이 책은 필독서로 추천 할 만하다.

 '설교'는 단순히 지식의 전달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가르치기 위한 것이지만, 그것을 포함하는 것이지 가르침이 전부는 아니다. '설교'는 가르침을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돌봄의 한 방법이다. 가르치면서 사랑을 전하고, 삶의 방법을 알려준다. 따라서 '설교자'는 어깨가 매우 무겁다. 양들을 가르치는 동시에 돌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모범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설교'를 목숨과 같이 여겨야 한다. 결코 가볍게 설교해서는 안 된다. 내용은 물론 그 의도에 진지함과 진정성 및 바른 방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설교'는 말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시에 '설교'를 하는 '설교자'는 철저한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말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행동과 삶을 통해 자신의 '설교'를 누구보다 철저히 실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설교자'는 신뢰를 얻을 수 없으며 그 '설교'에는 귄위가 없다. 물론 그 권위는 말씀 그 자체에 있는, 그것이 주는 귄위이지 '설교자'가 임의로, 그리고 그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에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설교'는 아무런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설교자'는 강단에서 하는 말을 통해 양들을 가르치며 돌본다. 올바른 설교자라면 말씀에 권위를 갖는 동시에 우월함이 아니라 겸손과 사랑과 말씀의 실천으로 그 말씀의 권위를 뒷받침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단지 수다쟁이에 불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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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기원
필립 W. 컴포트 지음, 김광남 옮김 / 엔크리스토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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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한 권이다. 말씀은 하나요, 둘이 아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66권의, 각기 다른 내용과 형식의 책이 수집되어 있다. 역사서도 있고, 시집도 있다. 편지도 있다. 이처럼 성경은 외견 상 한 권이지만 그 안에는 다른 내용과 형식의 책이 들어 있다.
 그 각각의 내용은 다르지만 지향점은 모두 같다. 즉 66권 모두 삼위 하나님의 주권과 창조, 인간의 타락과 구원 등을 바라본다. 66권 각각에 담긴 내용과 그 내용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동일한 것을 바라본다. 그렇기에 우리는 66권을 하나로 취급한다.
  이야기를 다시 뒤집어 보자. 우리는 비록 성경 그 자체는 단수로 취급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 안에는 각기 다른 66권의 책이 들어있다. 즉 그 66권은 작성 시기가 서로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시기 수천 년 전에서부터 그분의 탄생 후 100여 년에 이르기까지 각 권은 실로 긴 시차를 두고 작성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기원과 형성 과정, 그 긴 역사를 살펴봄을 몇 가지 유익을 누릴 수 있다. 각각의 그러한 배경지식을 쌓으면 내용과 목적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인간에게 관여하시는 하나님의 세심한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성경의 기원'

 이 책은 성경의 기원을 설명하는 책이다. 기본적으로 성경의 권위와 영감, 무오성 및 신구약 정경 형성사 등을 살펴본다. 그리고 문학 비평과 사본학 등의 학문적 방법을 이용하여 성경의 형성과 구성을 살펴본다.
 다양한 측면으로 성경을 살펴보는, 내용의 특성상 단일 저자에 의한 책은 아니다. 14명의 저자가 각기 맡은 주제를 약간 전문적으로 다룬다. 독자들에게 학문적 측면에서 꽤 풍성하고, 가치있는 자료를 제공한다. 여기에 해외 서적이기 때문에 포함되지 않은 한글 성경의 역사를 역자가 추가하여 그 세심한 배려를 느끼게 하고, 책의 가치를 더한다.
 개인적으로는 사본학 부분의 자료가 약간 아쉽게 느껴지지만 어쨌든 이 책은 성경의 기원을 알기 위한 개론서로 퍽 좋다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성경 기원을 알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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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국 개혁주의 부활 - 신세대 개혁주의 새바람 Young, Restless, Reformed : A Journalist's Journey with the New Calvinists 현대 개혁주의 부활 2
콜린 한센 지음, 조현학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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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주의라 하면 벤자민 워필드의 말을 빌어 "가장 성경적인 기독교"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우월감이나 교만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다. 그만큼 본질을 간직하려 한다는 걸 뜻한다. 진리에 온전히 순종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세상은 지속적으로 진리를 거부하고, 교회가 본질에서 벗어날 것을 종용하고 있다. 각종 전략으로 교회에 침투하여 일부가 타락하거나 본질을 잃도록 만들었다. 그 일환으로 잘못된 신학을 만들어 전통적, 성경적 가르침을 훼손하였다. 그 결과 여러 교파와 교단들은 일정 부분 본질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개혁주의는 이에 몸부림을 치며 본질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자신을 성경에 비추어 계속 개혁되어 나갔고, 개혁되는 중이다.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 잘못된 것은 고쳐나가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개혁주의가 다른 입장에서는 당연히 달가워 보일 리가 없다. 혼자 전통을 고집하며 입장을 달리하니 말이다.
 종교 개혁 이후 청교도에 시대에 이르러 개혁주의는 화려한 꽃을 피웠다. 하지만 20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개혁주의는 수세에 몰려있다. 너무나 완고하고 타협 없이 고집만 부리며 분열을 일으키는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일견 개혁주의는 전래 없이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 미국 개혁주의 부활'

 본서는 개혁주의가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집필 되었다. 군소신학으로 전락하다시피 한 개혁주의가 미국에서 아직 살아있음을 증거한다. 심차게 박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 개혁주의를 대표하고, 이끌고 있는 존 파이퍼의 활동을 소개한다. 그리고 예일 대학교에서 진행 중인 조나단 에드워즈 연구의 상황을 간략히 알려준다. 그 외에 C.J 매허니의 주권적 은혜 사역과 남침례 신학교의 총장인 앨버트 몰러의 개혁, 그리고 예스 데이팅 등으로 국내에 알려진 조수아 해리스 새 자세 콘퍼런스, 새로운 스타일의 개혁주의자인 마크 드리스콜을 통해 개혁주의가 어떻게 살아 숨쉬는지 보여준다.
 이 책을 통해 미국에서 개혁주의가 아직 살아 숨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개혁주의가 어떻게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개혁주의의 희망을 조금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각 인물의 사역 소개가 너무 부족하다는 점이 무척 아쉽다. 단지 저자가 각 인물의 사역지를 견학하고 인터뷰한 것을 통해, 보고 느낀 바만 간략히 소개 할 뿐이다. 사역과 그들 신념에 대한 구체적인 소개가 없다. 때문에 소개된 인물들의 사역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혁주의를 표방하고, 그것을 지키며 드러낼 수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들에 대한 자세한 소개가 없기 때문에 과연 그들의 노력으로 개혁주의가 제대로 전파되고 유지될 수 있는지, 파이퍼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정말 개혁주의자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좀더 자세한 소개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다른 리뷰어의 말과 같이 굳이 구입하여 읽을 책은 아닌 것 같다.

 정말 개혁주의는 힘을 잃었을까? 숨이 멎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개혁주의가 미국은 물론 국내에서도 지금은 코너에 몰려 있다. 하지만 본인은 언젠가 다시 교회의 중심을 차지 할 것이라 예상한다. 개혁주의 신앙의 선배들이 남겨준 방대한 유산이 있고, 누구보다 올곧은 정신을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다만 앞에서 살짝 언급 했듯이 좋지 않은 모습은 버려야 한다.
 개혁주의자들은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구호를 내세워 왔다. 그에 따라 신학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대로 고쳐 나갔다. 하지만 거기에만 몰두하다보니 자신의 모습은 돌보지 않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종종 교조주의로 치달아 이론에 매몰 되었다. 그 이론이 가르치는 행동은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 변절자들 사이에서 신학을 지키는 데만 급급 했기 때문에 드러나는 자신의 행동은 신학과 달리 온전하지 못했다. 지나치게 완고하고, 편협한 모습을 보였다. 자신의 신념은 지키되 남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귀기울여야 함에도 듣기조차 거부하였다. 항상 전투적으로 대응하고, 냉소를 보이기도 하였다. 상대가 생각은 다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라는 것을 잊고 적을 대하듯 하였다. 그러했기에 개혁주의자들의 이미지가 나빠지고 구석에 몰린 게 된 것은 당연하다.
 개혁주의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그 신념만 성경에 맞추어 개혁 될 것이 아니라 행동 또한 성경에서 말하는 바대로 고쳐나가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가장 온전한 것을 지킨다고 생각을 하며 믿는 바대로 열심을 다했지만 그것은 결국 빗나간 열심이었던 바리새인과 진배 없게 될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대로 행동하지 않고 머리만 키우면 단지 철학으로 전락하여 신앙에는 쓸모가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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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37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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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3대 디스토피아 중에 하나인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의 '우리들'은 다른 두 디스토피아 소설인 '1984', '멋진 신세계'에 비해 이해하기 어렵다는 느낌이 든다. 뚜렷하고 일관성 있는 에피소드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일기 형식으로 기록된, 파편적 흐름을 보여준다. 그러한 특징에 따라 본 소설은 개인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해한 세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인물들의 익명성과 비인격화에 있다. 주인공은 D-503, 그 외에 0, I-330 등 등장인물들은 하나 같이 기호화된 이름 아닌 이름을 가지고 있다. 즉 비인격화된 실체로 인물들이 존재한다. 제목인 '우리들'에서 암시하는 바와 같이 개인의 개성과 특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알 수 없다.

 다른 특징으로는 모든 집이 유리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즉 감시가 용이하다.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커튼을 드리울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남녀가 성관계를 하는 시간이다. 이마저도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사람과만 가능하기에 자유란 없다. 이처럼 개인성이 상실되고, 철저히 통제가 되는 '단일독재' 사회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본소설은 모든 면에서 부자연스럽다. 단지 '우리들'만 존재할 뿐 개인으로서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체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존재론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우리'로서 존재하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이 희생된다. 이러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그들'. '나'의 '나'됨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 사회에서 나라면, 우리라면 과연 '나'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한 사회에서 '나'를 '나'로 인식하며 살 수 있을까? 본 소설이 보여주는 개인성의 상실과 익명성, 그리고 '나'가 아닌 '우리'의 강요는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가 크다.

  개성이 강조되고, '우리'보다 '나'를 중시하는 우리 사회. 소설 '우리들'과 참으로 대조적이다. '나'에 대한 인식은 커져만 가지만 '우리들'에 대한 인식은 자꾸만 작아져 가는 이 사회에서 '우리'를 생각하며 돌아 볼 필요가 있다. '나'의 편의와 이익만을 추구 할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배려와 양보와 이해가 절실하다. 소설 '우리들'과는 정반대로 무한한 자유 가운데에 놓여 있는 우리는 개성을 조금 희생하고, '우리'를 위한 스스로에 대한 제약이 어느 정도 필요할 듯 싶다. 왜냐하면 '나'로서의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서만 '나'라는 존재의 존립이 가능하다. '나'만 존재한다면 개성과 자유 또한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있기에, '우리'라는 비교 대상과 기준이 있기에 나의 개성과 자유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나' 개인의 개성과 자유를 위해 '우리'를 유지하고, 지킬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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