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빠져드는 기독교 역사 - 미처 알지 못했던 재미있는 기독교 이야기
유재덕 지음 / 브니엘출판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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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정확한 연대에 오차가 있지만 주후 2천 년이 지났다. 기독교의 역사가 2천 년이 된 것이다. 2천 년을 지구 역사에서 봤을 때는 순간에 불과하지만, 인류 역사로 봤을 떄는 만만치 않은 기간이다. 그 기간 동안 종교적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수많은 토속신앙과 원시종교가 기독교와 이슬람에 정복 되어 사라졌다. 그 두 종교가 세계 종교사의 중심 축이 되었고, 인류 2천 년 역사의 중심 또한 차지 했다. 기독교만을 봤을 때는 성경이 정경으로 채택 되었고, 교리가 정립 되었다. 이단과의 대립, 그리고 내부 대립 등 크고 작은 대소사가 끊임없이 발생 했다.

 기독교를 이해하는 것은 단지 한 종교를 이해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서양사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서양의 역사는 기독교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기독교라는 종교에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서양사에 기독교가 주도적 역할을 하기도 하였고, 혹은 뒤에서 서양사를 쫓기도 하였다. 이것이 서양에만 국한된 일일까? 그렇지 않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또한 동일한 상황에 놓여 있다. 종교적 사명으로 시작된 전도 - 넓은 의미로 선교- 에 의해 기독교는 아프리카는 물론 아시아, 그리고 수많은 - 문화 사대주의 관점에서 - 미개 민족에까지 전해졌다. 때문에 기독교를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서양사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 전세계 역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면 기독교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우리가 흔히 기독교라고 하는 말 중 '기독(基督)'이란 '그리스도 Χριστός(크리스토스)'라는 그리스어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즉, '메시아', '구세주'를 뜻한다. 그리고 '크리스트Christ'란 앞서 말한 그리스도의 영어식 발음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주후 125년 시리아의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가 처음 사용한 말이다. 많은 이들이 혼동하는 용어인 기독교는 '개신교(루터, 장로, 침례, 감리, 순복음, 성결 등)', '로마 가톨릭(천주교)', '성공회', '정교회(그리스, 로마)' 등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역사를 - 무리가 따르겠지만 -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수많은 대립과 반목의 역사'라고 하고 싶다. 물론 짧지 않은 2천 년 역사를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역사 동안 조용할 날이 없었으니 나의 표현이 무조건 틀렸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 2천 년 역사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 역사를 책으로 정리하면 엄청나게 장대한 분량을 이룰 것이다. 그렇기에 굵직한 주요 사건 중심으로 정리하고는 것이 현명하다.


 시중에 기독교사를 정리한 책은 많다. 각각이 맞추고 있는 초점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떄문에 한 권만 읽고 기독교 역사를 다 알았다고 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기독교사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한두 권의 책을 읽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전문 지식을 필요로 하는 학자가 아닌 이상 여러 권을 읽을 필요는 없다. 단순 흥미나 얼마의 지식만 필요한 사람이라면 잘 정리된 한두 권을 읽는 것만으로도 족할 것이다.

 그렇다면 많은 기독교사 책 중 어떠한 것을 봐야할까? 그 선택의 문제 또한 만만치 않다. 그러한 고민을 줄여주기 위해 한 권의 책이 출간 되었다. 그것은 '거침없이 빠져드는 기독교 역사'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만 다룬다 하여도 상당한 분량이 나온다. 그렇기에 이 책 또한 400 페이지가 넘는다. 그러나 이 책이 다른 책과 다른 점은 덜 신학적이라는 것이다. 덜 자세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단점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오히려 장점이 된다. 책 표지에 나온 광고 문구처럼 '2천 년 기독교 역사를 한눈에 쏙쏙 파노라마로'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주요 기독교 역사를 빠짐없이 다루고 있으면서도 깊게 들어가지 않기에 쉽고 빠르게 읽어 나갈 수 있다. 물론 400 페이지가 결코 적은 분량이 아니기에 읽다보면 지루할 수도 있으나 책의 부제처럼 - 완전히 재미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 - 재미있기에 기존의 기독교사 책에 비하면 덜 지루하다.
 
 이 '거침없이 빠져드는 기독교 역사'라는 책은 앞서도 말했듯이 신학생들에게는 마음에 쏙 들 책이 아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이빨 빠진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주요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깊게 들어가지 않았기에 내용이 상당히 빈약하다. 그러니 이 책은 신학생이든 신학생이 아니든 기독교 역사를 한눈에 쉽게 즐길 이들에게는 추천한다. 파노라마로, 개괄식으로 볼 이들에게는 추천하지만 자세히 알고 싶은 이에게는 추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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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많은 사람들이 기다림을 싫어한다. 기다림은 낭비, 그리고 무기력함과 지루함 대변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1분 1초를 아낀다. 촌각을 다툰다. 그러하기에 기다림은 낭비로 인식 된다. 쓸모 없는 것으로 인식 된다. 예수회의 사제 '헨리 나우웬'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기다림이란, 우리가 현재 있는 곳과 우리가 있고 싶어하는 곳 사이에 있는 메마른 사막이다.  

 기다림은 무척 메마른 사막과 같다. 우리는 이곳에서부터 저곳으로 가려 하지만 메마른 사막인 기다림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없다. 그 사막은 매우 덥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곳이다.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곳이다. 그러하기에 결코 맞딱뜨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기다리는 시간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 것도 없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기다리는 시간 동안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혹은 명상을 할 수 있지 않느냐고. 그러나 그것은 기다림 그 자체에 대한 적극적인 행위가 아니다. 단지 기다림을 잊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다. 기다림으로부터 내 눈을 가리기 위한 임시 도구일 뿐이다. 기다림에 대한 수동적인 행위인 것이다.

 결국 기다림은 수동성과 무력함을 나타낸다.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은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그런 나의 무력함을 생생히 느끼게 한다. 그 시간은 나를 매우 지루하게 하고, 초조하게 만든다. 행위를 하는 입장이 아니라, 행위를 받는 입장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관점을 달리 해 보자. 기다림은 인내를 동반한다. 인내 없이는 무언가를 그리고 누군가를 기다릴 수 없다. 그 또는 그녀가 언제 올까? 그 시간이 언제 올까? 인내하지 않으면 나에게 다가오는 것들을 온전히 맞을 수 없다. 인내하지 않으면 뒤돌아서게 만든다. 여기서 나의 적극성이 개입된다. 인내는 외부의 작용으로 인한 것이지만 그 행위의 주체는 나이기 때문이다. 

 기다림이란 무언가 나에게 다가오기 떄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무언가가 나에게 다가 오기를 내가 허용하였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나의 허락과 요구가 없다면 기다림은 있을 수 없다. 

 기다림은 내가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능동적으로 받아주는 것이다. 한 마디로 기다림이란 적극적인 나의 의지와 행동이 발현된 것이다. 그러므로 기다리는 나는 결코 지루할 수 없다. 내가 그것을 허락 했기 때문이다. 요구 했기 때문이다. 

 나의 허락 혹은 요구로 인한 기다림은 설레임과 두근거림을 가득 품게 하는 근거이다. 그렇기에 나를 지루하거나 무력하게 할 수 없다. 그 사람이, 그 시간이 언제 올까 나를 초초하게 만들 수 없다. 그것은 반가운 손님을 맞는, 그 사람을 기대하는 행복한 시간인 까닭이다. 

 이렇게 기다림은 결코 낭비가 아니요, 나를 무력하고, 지루하게 하는 것도 아닌 생각만 해도 설레고, 행복한 내 마음과 의지가 개입된 적극적인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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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에의 길 - 개정 증보판
헨리 나우웬 지음, 김명희 옮김 / IVP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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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예수회의 사제였던 헨리 나우웬은 카톨릭과 개신교 양 진영에서 모두 사랑 받는 몇 안 되는 성직자이다. 그는 65세에 하나님 품에 안겼는데 오늘에 비하면 생을 짧게 마감하였다. 나우웬은 그 짧은 삶 동안 여러 책을 남겼는데 그것들을 통해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큰 깨달음과 은혜를 주고 있다. 이 책도 그 중 하나인데 전체가 118페이지로 무척 얇다. 하지만 내용은 정말 풍성한 은혜로 가득 차 있다.

 그러면 개인적으로 헨리 나우웬이 좋아서 읽게 된 이 책의 참 맛을 보러 함께 가보자.
 
 

 본서는 능력의 길, 평안의 길, 기다림의 길, 삶과 죽음의 길, 이렇게 네 글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의 짧은 글속에는 나우웬의 싶은 통찰과 깨달음이 담겨 있다. 그 중 몇 개의 글만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능력의 길을 보자.
 

 능력의 길에서는 권력(power)과 무력함(powerlessness), 그리고 능력(power)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로는 

  '남을 지배하고 복종시키는 힘.'

이다. 남을 장악하여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힘이다. 부정적으로 보면 참으로 두려운 힘이다. 공동체를 분열 시키고, 한 사람을 파멸 시킬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런 권력에는 경제적 권력, 정치적 권력, 종교적 권력, 이렇게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중 종교적 권력이 가장 나쁘다고 나우웬은 말한다.

  "가장 교활하고, 분열을 일으키며, 상처를 주는 권력은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사용되는 권력이다."(p26)

 이것은 지난 역사가 분명히 증거한다. 그런데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데 권력이 사용될 때, 좋은 소식은 금세 나쁜, 아주 나쁜 소식으로 바뀌고 만다."(p27)

이것이다. 과연 이보다 더 슬픈 소식이 있을까? 이보다 더 하나님을 슬프고, 화가 나게 만드는 소식이 있을까?

 
 예수님은 이땅에 기적 같이 임하시어 십자가 위에서 무기력하게 돌아가셨다. 어느 권능자가 그런 무기력함을 피조물에게 보이려할까? 무수한 비난과 불신을 각오한 참으로 용기 있는 결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하나님의 이해하지 못할 그러나 사랑이 가득한 결단이

  "진정한 하나님의 무기력함과 하나님이 친히 한 부분이 되신 인류의 무력함이 사랑의 집으로 가는 문이 되었다."(p33)

우리에게 가장 큰 축복이 되었다.
 

 하나님은 가장 큰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지만 연약한 능력, 무력한 능력을 우리에게 보이셨다. 그런 그분을 이해한다는 것은 힘들다. 우리의 생각과는 반대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분은 우리에게 같은 것을 요구 하신다.
 
  "힘을 통한 능력에서 무기력함을 통한 능력으로 옮겨가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다."(p38)

 그분은 참으로 오묘하신 분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행하지 아니 하시니 말이다.
 

 다음으로는 기다림의 길을 보자.

 많은 사람들이 기다림을 싫어한다. 그것은 수동적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우웬은 그것을 다르게 본다.

  "인내하는 삶이란 현재의 삶을 능동적으로 살며 그 곳에서 기다리는 것을 의미한다.(p76)

 관점을 달리 해 보라. 기다림 혹은 인내는 무언가가 나에게 다가 오기를 내가 허용하였기에 가능한 것이다. 무기력하게 느껴지지만 나의 허락과 요구가 없다면 기다림은 있을 수 없다.

  "끝을 알 수 없지만 신뢰하며 기다리는 것은, 삶을 향한 아주 혁신적인 자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상상을 훨씬 넘어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소망하는 것이다."(p78)

 기다림은 결코 지루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 무기력한 것이 아니다. 기다림은 설레임과 두근거림을 가득 품을 수 있게 해주는 근거이다. 그것이, 그 시간이 언제 올까 나를 초초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반가운 손님을 맞게 해 주는 행복한 시간이다. 기다림은 적극적인 마음의 행위인 것이다.

 

 나는 이 책의 내용을 조금 다르게 얘기 했지만 나우웬은 네 이야기 모두 하나님과 관련지어 이야기한다. 하나님 안에서의 능력과 평안, 그리고 기다림, 삶과 죽음은 모두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르침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와 그분께서 주신 우리의 소명을 깊이 생각하게 한다. 

 

 얇은 책이지만 참으로 풍성한 은혜가 담긴 책이다. 초신자에게는 다소 어려울 수 있겠지만 초신자든 기신자든 꼭 읽어볼 것을 권한다. 별을 5개를 주어도 결코 아깝지 않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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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답기도 - 하나님이 항상 예스라고 응답하는 10가지 기도
앤서니 데스테파노 지음, 김성웅 옮김 / 포이에마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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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기도가 원하는 대로 꼭 응답 받길 바라며 간절히 기도를 한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한가? 우리가 배웠듯이 Yes, Wait, No 로 나타난다. 원하는 응답을 얻을 수도 있고, 원하지 않는 응답을 얻을 수도 있다. 

 하나님이 항상 예스라고 응답하시는 10가지 기도(Ten prayers God always says yes to) 줄여서 즉답기도? 제목이 호기심을 한껏 자극하고, 기대를 크게 부풀린다. 정말 그런 것이 있다는 말인가? 잔뜩 기대를 한 채 첫 장을 넘겼다.

 먼저 차례를 보자.

 1. 정말 믿고 싶습니다 - 하나님, 당신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십시오
 2. 저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까? - 하나님, 저를 도구로 써주십시오
 3. 제게 돌아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 하나님, 제 마음을 넓혀주십시오
 4. 더 이상은 못 참겠습니다! - 하나님, 이 고난을 통과하게 해주십시오
 5. 제가 인간 말종입니까? - 하나님,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6. 스트레스에 눌려 죽겠습니다! - 하나님, 제게 평안을 주십시오
 7. 인정하지만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 하나님, 제게 용기를 주십시오
 8. 똑똑한 게 다는 아니다 - 하나님, 제게 지혜를 주십시오
 9. 행복이란 말을 다시 할 수 있을까? - 하나님, 전화위복이 되게 해주십시오
 10. 그런데, 저는 왜 존재하는 것입니까? - 하나님, 저의 영적 운명을 발견하게 해주십시오

 차례만 봐서는 도대체 뭐가 즉답기도라는 것인지, 뭐가 항상 예스라고 응답하시는 기도 10가지라는 것인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보통 차례만 보고도 책에서 말하려는 바가 짐작 되는데, 원래 차례의 목적이 그것인데 그 목적을 완전히 배신한 차례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내용을 살펴 볼까? 그러고 싶지만 솔직히 그러고 싶지 않다. 아니 그럴 수 없다. 무슨 말인고 하면 내 머리가 둔한 것인지 작가의 글 솜씨가 없는 것인지 도무지 내용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작가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마지막 장을 덮은 후, 내용 정리를 하고서도 요점 파악이 되지 않았다.

 각 장마다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하고 있는지는 알겠는데 도대체 그래서 핵심이 무엇이라는 것인지 머릿속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이상한 예와 말만 잔뜩 늘어놓고, 확실한 정의 없이 "앞에서 말한 것이 응답받는 기도이다."라고만 계속 이야기 하니 뭐가 응답 받는 기도라는 것인지 가슴이 답답해 졌다. 오히려 지금 내가 평상시 하고 있는 기도가 100% 응답 받는 기도임이 더욱 확실해졌다. 어쨌든 내 기도에 대한 응답은 Yes, Wait, No 중에서 반드시 한 가지는 있으니까.

 그래도 내가 이해한 대로 저자가 말하는 그 10가지 기도가 무엇인지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우선 부제들을 살펴보자.

 1. 하나님, 당신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십시오
 2. 하나님, 저를 도구로 써주십시오
 3. 하나님, 제 마음을 넓혀주십시오
 4. 하나님, 이 고난을 통과하게 해주십시오
 5. 하나님,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6. 하나님, 제게 평안을 주십시오
 7. 하나님, 제게 용기를 주십시오
 8. 하나님, 제게 지혜를 주십시오
 9. 하나님, 전화위복이 되게 해주십시오
 10. 하나님, 저의 영적 운명을 발견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이야기하면 황당하겠지만 저자가 말하는 예스라고 응답 받는 기도 10가지는 저것이다. 저렇게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내용이 저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무엇을 기대 했던 내 자신이 한 없이 부끄러워 진다. 내가 지나친 기대를 했던 것일까? 아니면 저자가 옳은 것일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크게 낚였다는 것이다.

 그래, 저자가 옳다 치자. 그렇다 쳐도 책 내용이 왜 이리 정신이 없는지 장광설이 매우 심했다. 내용이 자꾸 오락가락하여 핵심 파악이 쉽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나의 이해력 부족으로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분명히 내용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는데 핵심 파악이 얼른 되지 않았다. 

 그래도 좋은 글귀가 종종 눈에 띄어 그나마 다행으로 여긴다.

 포이에마... a division of 김영사인데 계속 이런 책을 내면 많은 독자들이 상당히 곤란해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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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가 다스리는 삶 -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기
스티브 맥베이 지음, 최주연 옮김 / 예수전도단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은혜가 다스리는 삶' 이란 과연 어떠한 삶일까? 추상적으로 얘기하자면 은혜가 우리를 지배하는 삶, 은혜를 누리는 삶, 은혜에 기뻐하는 삶 등으로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분이 이끄시는 대로 사는 삶이다. 우리 마음대로 살지 않는 삶이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삶이다.



 이 책은 어떻게 은혜가 다스리는 삶을 살 수 있는지 알아보는 책이다. 먼저 차례를 보자.

 1장 예수님 안에 살기
 2장 자기 능력을 내려놓기
 3장 새롭게 변화되기
 4장 율법에 대하여 죽기
 5장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알기
 6장 죄를 이기기
 7장 하나님의 뜻 알기
 8장 하나님을 바라보기
 9장 하나님을 바로 알기
 10장 한껏 즐기라!
 11장 은혜가 다스린다!

 차례만 보고도 큰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그러면 다음으로 내용을 살펴보자.

 저자가 그리스도인이 된 지 29년 만에 충격저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우리가 섬겨드리지 않아도 된다"(p13)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이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일까? 저자는 말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섬김 중심'으로 볼 경우, 하나님을 마치 신적인 고용주로 여길 수 있다. ... 은혜가 우리 삶을 다스리면, 하나님께 집중하게 된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 사랑의 관계에서 섬김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그러나 행위에만 치중하면, 섬김의 가치가 한낱 기계적이고 피상적인 행위로 전락한다.(p16)

 저자의 말을 요약하면 섬기는 삶이 아니라, 은혜가 다스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섬김이 아니라 은혜 안에서의 삶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다. 내 의지가 강하면 은혜가 다스리는 삶을 살 수 없다. 도리어 은혜를 다스리는 삶을 살게 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강해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께 쓰이고 싶다면, 강해져서는 안 된다. 연약해질 대로 연약해져야 한다."(p38)

 모세나 다윗이 강했기에 하나님께 쓰임 받은 것인가? 하나님께 쓰임 받았기에 강해진 것인가? 잘 생각해 보라.

 우리의 의지와 얼마 없는 능력을 내려놓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다. 새로운 변화를 겪는 것이다. 그 변화를 겪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다.

  "성령 충만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로잡아, 그분의 생명을 우리를 통해 드러내신다는 의미이다."(p62)

 성령이 우리 안에 충만하면 우리의 의지가 자연스레 꺾인다. 잘못된 그것이 더 이상 들어설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은혜가 다스리는 삶을 온전히 경험하게 된다. 여기서 걸리는 것이 하나 있다. 우리는 죄에 민감하여 자꾸만 율법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것이다. 율법을 통해 죄를 이기려고 하는 것이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그것을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킬 수 없음을 보여 주시기 위해 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말하려는 것은 율법을 지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율법은 구원받은 사람들을 위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율법의 목적을 바로 알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으로부터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그 승리의 비결을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살면서 삶의 원동력인 그분을 매 순간 의지하면, 죄를 능히 이길 수 있을 것이다. ... 우리가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를 맺을 때, 우리 안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사는 한 죄의 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삶을 은혜가 다스리면, 죄의 힘에서 해방될 수 있다."(p130)

 은혜 안에서의 삶만이 승리의 비결이라 말한다.

 죄로부터 승리 했다면 그 다음으로 무엇을 해야할까? 하나니믜 뜻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한 삶을 살 때에 은혜가 다스리는 삶을 온전히 살게 된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큰 줄기이다.



 다른 책들도 그렇지만 특히 이 책은 차례만 봐도 무엇을 말하려는지 명확하다. 물론 구체적이고, 정확한 내용은 책을 읽어봐야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차례가 명확하여 책을 읽기 전에 전체적인 그림을 쉽게 그릴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내용 속으로 금새 빠지게 되었다.

 이 책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신앙 서적들의 공통된 고질적인 문제인데 내용이 참으로 추상적이고, 구체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이 책의 7장이 그러하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한다고만 나오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한 말은 없다. 신앙 생활을 오래, 그리고 제대로(?) 한 사람이라면 특별히 언급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사항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신앙의 연수 - 가 명백히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는 없다. - 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 책에서 말하는 이야기들이 참으로 애매하고, 추상적이어서 금새 이해하기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책만으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반면 신앙의 연수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시 한 번 은혜의 삶에 대해 정리 하고 자신의 신앙을 점검할 수 있는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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