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많은 사람들이 기다림을 싫어한다. 기다림은 낭비, 그리고 무기력함과 지루함 대변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1분 1초를 아낀다. 촌각을 다툰다. 그러하기에 기다림은 낭비로 인식 된다. 쓸모 없는 것으로 인식 된다. 예수회의 사제 '헨리 나우웬'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기다림이란, 우리가 현재 있는 곳과 우리가 있고 싶어하는 곳 사이에 있는 메마른 사막이다.  

 기다림은 무척 메마른 사막과 같다. 우리는 이곳에서부터 저곳으로 가려 하지만 메마른 사막인 기다림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없다. 그 사막은 매우 덥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곳이다.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곳이다. 그러하기에 결코 맞딱뜨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기다리는 시간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 것도 없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기다리는 시간 동안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혹은 명상을 할 수 있지 않느냐고. 그러나 그것은 기다림 그 자체에 대한 적극적인 행위가 아니다. 단지 기다림을 잊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다. 기다림으로부터 내 눈을 가리기 위한 임시 도구일 뿐이다. 기다림에 대한 수동적인 행위인 것이다.

 결국 기다림은 수동성과 무력함을 나타낸다.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은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그런 나의 무력함을 생생히 느끼게 한다. 그 시간은 나를 매우 지루하게 하고, 초조하게 만든다. 행위를 하는 입장이 아니라, 행위를 받는 입장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관점을 달리 해 보자. 기다림은 인내를 동반한다. 인내 없이는 무언가를 그리고 누군가를 기다릴 수 없다. 그 또는 그녀가 언제 올까? 그 시간이 언제 올까? 인내하지 않으면 나에게 다가오는 것들을 온전히 맞을 수 없다. 인내하지 않으면 뒤돌아서게 만든다. 여기서 나의 적극성이 개입된다. 인내는 외부의 작용으로 인한 것이지만 그 행위의 주체는 나이기 때문이다. 

 기다림이란 무언가 나에게 다가오기 떄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무언가가 나에게 다가 오기를 내가 허용하였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나의 허락과 요구가 없다면 기다림은 있을 수 없다. 

 기다림은 내가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능동적으로 받아주는 것이다. 한 마디로 기다림이란 적극적인 나의 의지와 행동이 발현된 것이다. 그러므로 기다리는 나는 결코 지루할 수 없다. 내가 그것을 허락 했기 때문이다. 요구 했기 때문이다. 

 나의 허락 혹은 요구로 인한 기다림은 설레임과 두근거림을 가득 품게 하는 근거이다. 그렇기에 나를 지루하거나 무력하게 할 수 없다. 그 사람이, 그 시간이 언제 올까 나를 초초하게 만들 수 없다. 그것은 반가운 손님을 맞는, 그 사람을 기대하는 행복한 시간인 까닭이다. 

 이렇게 기다림은 결코 낭비가 아니요, 나를 무력하고, 지루하게 하는 것도 아닌 생각만 해도 설레고, 행복한 내 마음과 의지가 개입된 적극적인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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