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100만 부 기념 클래식 에디션)
김수현 지음 / 마음의숲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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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관계 속에서 질식할 것 같으면서도 고독한 낱개의 개인들만 남은 것.
개인주의가 뿌리내린 서구사회보다도 공동체가 훨씬 빈약하다는 것이다.
그 의미는 여전히 강력하게 남아있는 집단주의 문화 속에서타인의 시선에 맞춰 행동하지만,
그 시선에 어떤 신뢰나 유대는 없다는 뜻이다.
그 사실이 우리를 힘겹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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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산다는 것에 대하여
이나가키 에미코 지음, 김미형 옮김 / 엘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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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립한다는 것. 자신의 발로 선다는 것.
그것은 힘들지만, 누구나 동경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무슨 일이 생겨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
내 힘으로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자유고, 그것이야말로 멋있는 일이다.
자립이란 결국 내 힘으로 먹고 사는 일이다.
그리고 그 힘은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다.
그 힘을 내버려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모두 요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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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일기
최민석 지음 / 민음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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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여러 번 느꼈지만 영어를 전혀 못 하면 인생의 범위는 60억분의 5천만, 즉 120분의 1로 줄어든다. 달리 말해 전 세계의 범위가1이라면, 인생을 살며 분노를 느끼는, 좌절을 겪든, 정부에 불만이쌓이든, 혹은 주머니에 돈이 쌓이든 간에 상관없이, 그저 120분의1의 세계에만 머물러야 한다. 하지만 영어를 그럭저럭 구사하면 자신이 머무를 수 있는 세계의 범위는 2분의 1로 확장된다. 스페인어까지 하면 5분의 3, 그 외 불어, 독어, 이태리어까지 하면 자기 세계의 범위는 점점 더 넓어지는 셈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삶은 고단한이방인의 삶이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애석하지만 이것이 현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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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의 작가라면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많이들 있겠지만 왠지 내게는 폴 오스터와 황정은이 떠오른다. 


어디서였던가 어느 미국 작가가 말했다.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폴 오스터의 팬인데 정작 폴 오스터의 작품 판매 부수는 아주 적다고. 이 말을 듣는? 읽는?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순간 떠오르는 작가가 있었다. 바로 황정은. 황정은이 폴 오스터보다는 자국에서 대중성을 더 많이 획득한 것 같긴 하지만 전문가(?)들에게 더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다는 면에서 이 둘은 매우 비슷하다. 


폴 오스터는 내 친구들도 광팬이 많아서 나도 한글번역본으로 많이 시도해 보았지만 좀처럼 친구들이 왜 열광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의 원서를 읽고 나서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그의 요설체는 번역으로는 다 읽히지 않았던 듯 하다. 적어도 내게는. 내 친구들은 번역본만으로도 그의 매력에 빠질 수 있는 극 감수성을 가졌지만, 나는 폴 오스터의 그 길고 긴 아름다운 영어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문장에 몽환적으로 빨려들어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이야기는 어느새 끝나있고, 멍하니 작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최근작들이 좀 많이 바뀌어서 실망스러운 면도 있지만 아직도 나는 폴 오스터의 뉴욕 삼부작 표지만 봐도 설렌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폴 오스터 작품 판매 부수는 놀라울 정도로 적고 거의 모든 작가들의 작품이 다 비치되어 있는 미국 지역 도서관에도 그의 작품들이 비치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봤다. 비치되어 있더라도 작품 종류가 형편없었다. 오히려 한국의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폴 오스터 번역본의 종류가 더 많을 정도여서 충격이었다.  신간이 나와도 도서관에 비치가 되지 않았다. 정말 작가들의 작가라는 말이 실감나던 순간이었다. 마니아들은 많으나 대중성은 극히 떨어지는..


한편 황정은은 처음부터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녀의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의 그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애초에 한국문학에 이런 문체의 작품이 있었던가. 이렇게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작품이 있었던지 생각나지 않았다. 황정은의 작품은 처절하게 다 좋지만 그 중에서도 '계속해보겠습니다'가 가장 좋다. 첫 만남이어서 더 강렬했을 수도 있다. '백의 그림자'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다. 황정은의 일련의 작품들이 개중의 사람들에게는 계속되는 비슷한 분위기의 변주로만 읽혀지는 것도 같다. 하지만 그 변주만으로도, 그 처절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그 아름다움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확실히 대중성은 황정은이 훨씬 높다. 베스트셀러 목록에서도 꽤 오래 있었고.)


이러한 이유로 지인 몇에게 대화 도중 성심성의껏 황정은을 추천해 주었는데, 전공자는 열광했고 비전공자는 어려워했다. 그 순간 떠오르는 생각. 아..황정은이 비전공자들에게는 어려울 수 있구나, 폴 오스터구나 싶었다. 하지만 예외는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황정은은 전공자인 내가 비전공자에게 추천받은 작가였다. 왠지 궤변같다...결국 전공자든 비전공자든 문학 마니아라면 문학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대부분 황정은에게 열광한다는 것이다. 폴 오스터처럼. 


폴 오스터와 황정은을 떠올리면 괜히 웃음이 실실 나오면서 왠지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 행복한 순간이다. 멋진 작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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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보는 작가 정세랑의 작품을 읽노라면 이 작가의 역량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작품들이 워낙 다양하고 스케일도 크기 때문이다. 문학을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으로 거칠게 구분해 보자면, 정세랑은 그 두 종류의 작품을 다 잘 쓸 수 있는 극히 드문 작가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군가는 순수와 장르의 경계에 그녀가 서있다고 말하기도 하겠지만 내게는 그녀가 두 분야를 넘나들며 작품활동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위의 작품들은 내가 읽은 정세랑의 장르문학 작품들. SF라고 할까 판타지라고 할까. SF나 판타지 문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순수문학을 선호하는 나는야 구세대) 정세랑의 판타지는 따스하다. 제목만으로는 그녀의 작품의 깊이와 사랑스러움을 가늠할 수 없다. 한국문학에서 정세랑 표 판타지 문학이 하나의 장르로 정립된 것 같은 느낌이다. 


'시선으로 부터,', '피프티 피플' 등과 같은 정통 순수문학도 쓰면서 자신만의 판타지 문학 장르를 만들어 나가는 정세랑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 도서관 전자책 대출 2호로 '섬의 애슐리'를 읽으며 든 생각을 끄적여 보았다. 정세랑의 판타지 작품 중 '목소리를 드릴게요'만 아직 못 읽은 셈인데 기대가 된다. 기다려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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