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일기
최민석 지음 / 민음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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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여러 번 느꼈지만 영어를 전혀 못 하면 인생의 범위는 60억분의 5천만, 즉 120분의 1로 줄어든다. 달리 말해 전 세계의 범위가1이라면, 인생을 살며 분노를 느끼는, 좌절을 겪든, 정부에 불만이쌓이든, 혹은 주머니에 돈이 쌓이든 간에 상관없이, 그저 120분의1의 세계에만 머물러야 한다. 하지만 영어를 그럭저럭 구사하면 자신이 머무를 수 있는 세계의 범위는 2분의 1로 확장된다. 스페인어까지 하면 5분의 3, 그 외 불어, 독어, 이태리어까지 하면 자기 세계의 범위는 점점 더 넓어지는 셈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삶은 고단한이방인의 삶이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애석하지만 이것이 현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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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의 작가라면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많이들 있겠지만 왠지 내게는 폴 오스터와 황정은이 떠오른다. 


어디서였던가 어느 미국 작가가 말했다.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폴 오스터의 팬인데 정작 폴 오스터의 작품 판매 부수는 아주 적다고. 이 말을 듣는? 읽는?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순간 떠오르는 작가가 있었다. 바로 황정은. 황정은이 폴 오스터보다는 자국에서 대중성을 더 많이 획득한 것 같긴 하지만 전문가(?)들에게 더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다는 면에서 이 둘은 매우 비슷하다. 


폴 오스터는 내 친구들도 광팬이 많아서 나도 한글번역본으로 많이 시도해 보았지만 좀처럼 친구들이 왜 열광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의 원서를 읽고 나서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그의 요설체는 번역으로는 다 읽히지 않았던 듯 하다. 적어도 내게는. 내 친구들은 번역본만으로도 그의 매력에 빠질 수 있는 극 감수성을 가졌지만, 나는 폴 오스터의 그 길고 긴 아름다운 영어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문장에 몽환적으로 빨려들어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이야기는 어느새 끝나있고, 멍하니 작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최근작들이 좀 많이 바뀌어서 실망스러운 면도 있지만 아직도 나는 폴 오스터의 뉴욕 삼부작 표지만 봐도 설렌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폴 오스터 작품 판매 부수는 놀라울 정도로 적고 거의 모든 작가들의 작품이 다 비치되어 있는 미국 지역 도서관에도 그의 작품들이 비치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봤다. 비치되어 있더라도 작품 종류가 형편없었다. 오히려 한국의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폴 오스터 번역본의 종류가 더 많을 정도여서 충격이었다.  신간이 나와도 도서관에 비치가 되지 않았다. 정말 작가들의 작가라는 말이 실감나던 순간이었다. 마니아들은 많으나 대중성은 극히 떨어지는..


한편 황정은은 처음부터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녀의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의 그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애초에 한국문학에 이런 문체의 작품이 있었던가. 이렇게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작품이 있었던지 생각나지 않았다. 황정은의 작품은 처절하게 다 좋지만 그 중에서도 '계속해보겠습니다'가 가장 좋다. 첫 만남이어서 더 강렬했을 수도 있다. '백의 그림자'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다. 황정은의 일련의 작품들이 개중의 사람들에게는 계속되는 비슷한 분위기의 변주로만 읽혀지는 것도 같다. 하지만 그 변주만으로도, 그 처절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그 아름다움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확실히 대중성은 황정은이 훨씬 높다. 베스트셀러 목록에서도 꽤 오래 있었고.)


이러한 이유로 지인 몇에게 대화 도중 성심성의껏 황정은을 추천해 주었는데, 전공자는 열광했고 비전공자는 어려워했다. 그 순간 떠오르는 생각. 아..황정은이 비전공자들에게는 어려울 수 있구나, 폴 오스터구나 싶었다. 하지만 예외는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황정은은 전공자인 내가 비전공자에게 추천받은 작가였다. 왠지 궤변같다...결국 전공자든 비전공자든 문학 마니아라면 문학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대부분 황정은에게 열광한다는 것이다. 폴 오스터처럼. 


폴 오스터와 황정은을 떠올리면 괜히 웃음이 실실 나오면서 왠지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 행복한 순간이다. 멋진 작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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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보는 작가 정세랑의 작품을 읽노라면 이 작가의 역량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작품들이 워낙 다양하고 스케일도 크기 때문이다. 문학을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으로 거칠게 구분해 보자면, 정세랑은 그 두 종류의 작품을 다 잘 쓸 수 있는 극히 드문 작가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군가는 순수와 장르의 경계에 그녀가 서있다고 말하기도 하겠지만 내게는 그녀가 두 분야를 넘나들며 작품활동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위의 작품들은 내가 읽은 정세랑의 장르문학 작품들. SF라고 할까 판타지라고 할까. SF나 판타지 문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순수문학을 선호하는 나는야 구세대) 정세랑의 판타지는 따스하다. 제목만으로는 그녀의 작품의 깊이와 사랑스러움을 가늠할 수 없다. 한국문학에서 정세랑 표 판타지 문학이 하나의 장르로 정립된 것 같은 느낌이다. 


'시선으로 부터,', '피프티 피플' 등과 같은 정통 순수문학도 쓰면서 자신만의 판타지 문학 장르를 만들어 나가는 정세랑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 도서관 전자책 대출 2호로 '섬의 애슐리'를 읽으며 든 생각을 끄적여 보았다. 정세랑의 판타지 작품 중 '목소리를 드릴게요'만 아직 못 읽은 셈인데 기대가 된다. 기다려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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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시리즈가 처음 나올 때를 기억한다. 독립 출판 등등의 작은 출판사가 유행하면서 이렇게 산뜻한 아이디어 하나만으로 책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줬던 아무튼 시리즈. 얇은 분량에다가 책이라는 근엄성이라는 딱지를 떼고 독자들에게 한 발 더 다가서는 책들. 그때의 그 가능성에 대한 흥분을 기억한다. 지금도 현재 진행중이고. 아무튼 시리즈의 출범 이후로 자기만의 방 시리즈, 띵 시리즈 등등 마음에 드는 출판 기획들이 속속들이 나타나고 있으니 독자로서는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아무튼 시리즈 신간 소식이 들려오면 그 주제가 무엇이든간에 샘플은 꼭 읽어보는 편이다. 최초로 사서 읽은 아무튼 시리즈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김민섭의 '아무튼 망원동'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망원동과 내가 좋아하는 작가 김민섭의 조합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책 내용은 내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그저 좋았다. 그 다음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김혼비의 '아무튼 술'. 그 다음은 '아무튼 요가'--샘플이 재미있어서 전자책으로 구매해 보게 되었는데 어쩐지 '아무튼 요가'는 닥치고 요가라기 보다는 닥치고 영어로 읽혔지만 아무튼 재미있었다. 


가장 최근에 읽은 아무튼 시리즈는 '아무튼 떡볶이'. 9년만에 귀국한 모국에서 처음 권유받은 음식이 떡볶이어서 더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도합 장장 13년의 타향살이 후 고국에 돌아온 이에게 제일 처음 권하는 음식이 떡볶이라는 것은 한국인에게 특히 여성들에게 떡볶이는 음식 그 이상의 의미를 띤 것 같았다. 거기에 요조 작가라니. 거기에 한국의 전자책 시장도 많이 발전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국 공공도서관에 가입해 대여한 첫 전자책이 바로 '아무튼 떡볶이' 였다. 떡볶이나 술 등은 자칭 전문가들이 수두룩한 와중에 출간된 것이기에 더 출간의 부담이 컸을 텐데도 어떻게 그 모든 다양한 전문가들의 압박을 이기고 출간했을까라는 걱정이 기우에 불과했음을 몸소 보여주는 책들이었다. 결국 우리가 '아무튼'시리즈에서 바라는 것은 작가의 전문성이 아니라 그들의 열정, 사랑, 관심이기에. 


아무튼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은 그 열정에 있다. 그 사랑, 그 열정, 그 관심.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고 만들 수도 강요될 수도 없는 것들. 그렇기에 더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 바로 그것이다. 아무튼 좋다는 데 거기에 누가 어떻게 반기를 들 수 있겠는가. 마냥 귀여워질 뿐. 


앞으로 아무튼 시리즈가 꾸준히 아니 영원히 계속 되기를 바란다. 그 무엇에 대한 인간들의 다종다기한 열정을 계속 보고 싶다. 지금 내 소망은 빈둥빈둥 구르며 몇날 며칠을 아무튼 시리즈로 현재 출간이 된 모든 책을 옆에 쌓아놓고 읽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걸 사랑하는,열망하는 사람들은 다 아름답기에. 그것도 사무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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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미디어의 이해 - 플랫폼과 알고리즘의 시대 읽기
이시다 히데타카 지음, 윤대석 옮김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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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작이라 이것도 벌써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린 것인가. 


뭔가 이것저것 잘 엮어 놓은 것 같고 뭔가가 새로운 것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 지루함을 참고 끝까지 읽었으나, 끝끝내 그 무언가 한 방은 나오지 않았다. 일본어 번역이라 그런가 다 아는 내용을 왠지 더 어렵게 표현했다는 생각이 드는 표현들이 꽤 있었다. 


교양서와 전공서, 대중서와 학술서의 중간 어디 쯤에서 헤매는 책이 아닐까 싶다. 


+ 코로나 집콕으로 인한 닥치고 독서에나 적합한 매우 지.루.한. 책

디지털 미디어 재귀 사회에서는 스펙터클들이 아바타가 되어 도플갱어로서 당신을 둘러싸게 될 것이다. ... 그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디지털 미디어를 기반으로 한 생활에서 자기 자신의 재귀화를 위한 플랫폼, 즉 자신의 가치관, 사고방식, 주의력의 배분을 스스로 인식하고 자기 자신의 정보 생활을 디자인할 수 있는 노하우와 환경을 확보해야 한다. ..앞으로 인간은 디지털 미디어에서 ‘개인이 되는 과정‘을 디자인하는 능력을 연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찍이 학교는 희소한 정보를 얻기 위한 기관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범람하는 정보 가운데 유익한 것을 선별하여 필요 없는 것을 버려야 하는 사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학교는 정보 과잉에 대응하는 교육을 하는 장소가 될 것이다. 학교에서는 미디어 재귀적인 인간, 스스로 의식적으로 주의력의 배분을 조직할 수 있는 인간을 길러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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