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과의 만남. 팬데믹 시대에 우리는 특히 이 부분에서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기존에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반복해 오던 만남들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는 것이 여러 변화 중 하나였겠다. 팬데믹 상황이 악화되어도 만나야 하는 사람과의 만남과 상황이 좋아지면 언제 한 번 봅시다라는 멘트만 주고 받게 되는 사람과의 만남. 그 각각의 의미는 천양지차라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여러 힘든 상황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쓸데없는 만남은 안 하게 되어서 좋았다는 사람들도 꽤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요즘의 분위기(소위 그 회식이라는 것이 다시 재개되는 분위기)를 우려하는 사람도 있는 듯 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만남이란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철학적으로, 문학적으로 이야기해 주는 사람이 있다. 바로 샤를 페팽. 여러 극적이고도 긍정적인 만남들에 대한 이야기가 다양한 변주로 연주되어서 읽다보니 어서 나도 누구라도 만나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그런 한편으로 타인과의 만남이 우리에게 의미가 이렇게 크고, 타인과의 만남이 없다면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저자의 말대로 용기있게 타인에게 다가가되, 상황을 잘 고려해서 섬세하게 다가간다면 만사형통일 수도.) 말콤 글래드웰의 '타인의 해석'이 떠올랐다. 우리가 얼마나 타인에 대한 오해를 많이 가지고 있고 그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건사고들이 일어났는지를 이야기하는 이 책은 샤를 페팽의 '만남이라는 모험'과 정말 상반되는 책이다.
만남에 대한 초긍정적인 책과 초부정적인 책. 우리는 홀로 살 수 없게끔 되어 있기에 타인을 만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상반된 입장의 책도 나오게 되었으리라. 그런데 샤를 페팽의 긍정적인 이야기에 황홀해하다가도 용감하게 타인에게 다가가지 못하는(페팽 말처럼 섬세하지 못해서인가) 나는 왠지 말콤 글래드웰의 수많은 오해와 불신 쪽에 더 끌리게 된다. 긍정적 낙관은 강력한 비관과 연결되는 것인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뉴노멀이라 지금 우리의 일상이 노멀이고 다시 돌아간다는 개념조차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와중에 우리는 어떤 만남을 해야 하는 것일까. 두렵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