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안부를 묻는 밤 (민트 스페셜 에디션)
지민석.유귀선 지음, 혜란 그림 / 시드앤피드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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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션이라든가, 특별판같은 단어들은 언제나 참 설렌다. 너의 안부를 묻는 밤 민트에디션은 책 표지부터 민트색으로 예뻤다. 이 책의 다른 버전은 보지는 못했지만, 다른 버전은 어떤 색감으로, 어떤 이야기들이 실렸을지 궁금해졌다.

 

 

 

네가 어둠이면 어때. 눈 감으면 온통 너일텐데. ㅡ14

당신은 예쁜 것만 바라봐. 그럼 난 당신만 바라볼테니. ㅡ26

나도 너에 대한 사랑만은 그 누구보다도 이기적이고 싶다. 그건 나를 위한 이기가 아니다. 네가 매일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도록 만들고 싶은 이기심이란 것을 너에게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넌 하루에 수십 번 나에게 사랑만 받으면서 살아가기에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니까. ㅡ45


  이 책은 사랑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연인의 처음 사귈 때의 설렘. "네가 어둠이면 어때. 눈 감으면 온통 너일텐데" 보고 처음에는 오그라드는 멘트라고 생각했는데, 보면 볼수록 나도 연인에게 이런 말을 들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들은 여친에게 이런 말 안 하고 뭐하나 싶다.

 


버틸 수 없다면 애당초 "끝"이라는 말을 꺼내지 말 것. 다툼의 원인과 해결에 대해서만 대화를 이어갈 것. 화해를 한 후 미안하고 사랑한다며 꼭 안아줄 것. ㅡ61

이별 뒤에도 하는 사랑은 짝사랑인 걸까. 오늘 새벽에는 네 전화가 오지 않을까 하며 기다리는 이 감정이 사랑이라고 믿고 싶진 않다. ㅡ95


  만남 뒤엔 이별이 따르기 마련이다. 열렬하게 사랑을 하고 다 타버려 상대방은 재가 되었고, 나는 상대방에게 해만 되는... 다시는 사랑따위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새로운 사람을 찾아,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는 내 모습에 환멸을 느끼기도 한다. "너의 안부를 묻는 밤"이라는 제목이 참 잘어울리는 글이 많았다. 나는 이런데, 너는 어떻니?라고 묻는 듯한 내용이 마음이 짠해졌다.


좋은 사람 곁엔 반드시 좋은 사람이 함께하는 법이야. 너는 지금도 충분히 좋은 사람인 거 너도 알잖아. 네 새벽을 들쑤셔놓은 사람들만 모를 뿐이지. ㅡ174


  나의 사랑은 안녕한지, 나의 사랑이었던 너는 안녕한지, 그리고 나는 안녕한지. 이 책은 이 셋 모두에게 안부를 묻는 것 같다. 이렇게 사랑을 했고, 이렇게 이별을 했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고... 너와 헤어져도 나는 안녕할 수 있을지. "넌 슬퍼할 자격 없어. 행복할 자격만 있지"하는 단어가 마음에 콱 와닿는다. 우리에게 슬퍼할 자격이 있는지는 없는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행복할 자격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제 그만 슬퍼하고 그만 아파하고, 바닥까지 내려놓은 나를 끌어올려 사랑해줄 타이밍이다.

 

나를 위해 거절할 줄 알아야 하고/ 나를 위해 때로는 이기적인 모습도 필요하다.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나도 호락호락하지 않아야 한다. //거절의 필요성이 중요한 세상이니까. ㅡ217

상처는 이별을 만들고/ 이별은 추억을 만들고/ 추억은 후회를 만들고/ 후회는 새벽을 만든다. ㅡ229


  왜 꼭 헤어진 그사람은 밤에 보고 싶은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사람이 잘못한 게 아닌 내가 잘못한 게 떠오르는지. 힘들었던 기억보다 즐겁고 행복했던 추억만 떠오르는지. 오늘도 그런 밤이다. 우리의, 너의, 나의 안부를 묻는 그런 밤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했던 사람에게 선물하게 좋은 책인 것 같다. 우리 사랑이 안녕한지, 너의 사랑이 안녕한지, 나의 사랑이 안녕한지 안부를 묻고 싶어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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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이별의 날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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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시킨 적이 없던 프레드릭 배크만 작가님의 신작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 책을 처음 봤을 때, 생각보다 책이 얇고 삽화가 많아서 동화인가 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역시 작가님이 노년의 어떠함을 참 잘그린다는 생각을 다시 했다.

  이 책은 치매가 오는 할아버지와 사랑을 받지 못하고 받은 아들과 할아버지가 좋은 순수한 손자의 이야기이다. 나는 치매를 이렇게 감동적이고 로맨스적이게 그릴 수 있었구나 놀라고 말았다. 내용은 주로 할아버지의 머릿속에서 일어난다.

 

 지금이 가장 좋을 때지. 노인은 손자를 보며 생각한다. 세상을 알 만큼 컸지만 거기에 편입되기를 거부할 만큼 젊은 나이. ㅡ10

 


"노아한테 뭐라고 설명하지? 내가 죽기도 전어 그 아이를 떠나야 한다는 걸 무슨 수로 설명하지?" ㅡ31

 

"여기는 내 머릿속이란다, 노아노아. 그런데 하룻밤 새 또 전보다 ."ㅡ43

아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아이는 숫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어쩌면 숫자가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빠와 아이는 한 번도 서로의 눈을 쳐다본 적이 없다. ㅡ46

"사실은 잘 몰라. 뇌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거의 알 수가 없거든. 지금은 희미해져가는 별과 비슷하단다. 내가 거기에 대해서 가르쳐줬던 거 기억하지?"......할아버지의 턱이 떨린다. 할아버지는 우주의나이가 130억 년이 넘는다고 노아에게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이야기한다. 할머니는 늘 중얼거렸다. "그런데도 당신은 그 우주를 쳐다보느라 바빠서 설거지를 할 시간도 없다이거죠." 할머니는 노아에게 가끔 "바쁘게 사는 사람들은 항상 뭔가를 바쁘게 놓치면서 사는거야"라고 속삭였지만 노아는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ㅡ67

 

"머리가 빛을 잃어가더라도 몸은 한참 뒤에서야 알아차리지. 인간의 몸은 어마어마하게 부지런하단다. 수학의 걸작이라 마지막 빛이 꺼지기 직전까지 계속 일을 하거든. 인간의 두뇌는 가장 무한한 방정식이라 이 방정식을 해결하면 달에 갔을 때보다 훨씬 엄청난 능력이 우리 인류에게 생길거야. 우주에 인간보다 더 엄청난 수수께끼는 없거든. 할아버지가 실패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했는지 기억하니?" "한 번 더 시도해보지 않는 게 유일한 실패라고요." "그렇지, 노아노아야, 그렇지. 위대한 사상은 이 세상에 머무를 수 없는 법이란다."ㅡ69

 

  수학을 좋아했던 할아버지는 자신의 머릿속 세계가 매일매일 조금씩 줄어드는 현실이, 그리고 그걸 아직 어린 손자에게 설명하기가 두렵다. 이 책은 주로 대화체로 쓰여 있다. 할아버지와 손자인 노아의 대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대화. 할아버지와 어린 손자의 대화는 할아버지의 철학적임과 손자의 상상력의 세계의 결합같다.


 

"그렇죠? 저는 어른이 아니라 노인이 되고 싶어요. 어른들은 화만 내고, 웃는 건 어린애랑 노인들뿐이잖아요."ㅡ72

 

노아도 기억한다. 아빠가 저녁에 할머니, 할아버지 집으로 데리러 오면 할머니는 작별인사를 못 하게 했다. "하지마라, 노아야. 내 앞에서 그 소리는 하지 마! 네가 떠나면 이 할미가 늙잖니. 내 얼굴에 새겨진 모든 주름이 너의 작별인사야."ㅡ75

"저는 작별인사를 잘 못해요."
아이가 말한다. 할어버지는 이를 훤히 드러내며 미소를 짓는다. "연습할 기회가 많을 거다. 잘하게 될 거야. 네 주변의 어른들은 대부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제대로 작별인사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후회하고 있다고 보면 돼. 우리는 그런 식으로 작별인사를 하지 않을 거야. 완벽해질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연습할 거야. 완벽해지면 네 발은 땅에 닿을 테고 나는 우주에 있을 테고 두려워할 건 아무것도 없을 테지."ㅡ77

"제 손을 왜 그렇게 꼭 잡고 계세요, 할아버지?" 아이가 다시 속삭인다. "모든 게 사라지고 있어서, 노아노아야. 너는 가장 늦게까지 붙잡고 있고 싶거든."ㅡ81

 

  현실의 이야기인 손자와 할아버지의 대화는 어린 손자가 할아버지의 머리가 점점 느리게 움직이게 됨에 대한 이야기이며, 기억이 영원하지 않음과 잊음에 대한 이야기라면, 할아버지와 돌아가신 할머니가 대화하는 장면은 추억을 회상하고, 애틋함이 느껴졌다. 돌아가신 할머니와 자신의 머릿속에서 대화하는 모습은 치매라는 주제를 로맨틱하게 만들었다.

 

"여보, 기억들이 나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어. 물과 기름을 분리하려고 할 때저럼 말이야. 나는 계속 한 페이지가 없어진 책을 읽고 있는데 그게 항상 제일 중요한 부분이야."ㅡ85

그는 평생 확률을 계산하는 일을 했지만 그녀처럼 확률적으로 희귀한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그녀와 같이 있으면 그는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ㅡ89

 

"사랑스럽고 까다롭고 뚱한 당신, 당신은 절대 쉽거나 싹싹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어떨 때는 미워하는 게더 쉬울 만큼. 하지만 어느 누구도 감히 내게 당신은 사랑하기에 어려운 사람이었다고 말하지 못할 거예요."ㅡ93

 

"우리가 맨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 당신이 잠자는 시간이 고문이라고 했던 거 기억나요?" "응. 잠은 같이 잘 수 없으니까. 날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거기가 어디인지 알아차리기 전 몇 초 동안 얼마나 괴로웠다고. 당신이 어디 있는지 알아차리기 전 몇 초 동안 말이야."ㅡ100

 

"아픈 느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단다. 건망증이 하나 좋은 게 그거야. 아픈 것도 깜빡하게 된다는 거." "어떤 기분이에요?" "주머니에서 뭔가를 계속 찾는 기분. 처음에는 사소한 걸 잃어버리다 나중에는 큰 걸 잃어버리지. 열쇠로 시작해서 사람들로 끝나는 거야."......."사람을 잊어버릴 때가 되며 잊었다는 것도 잊어 버리는 거예요?" ㅡ104

 

"우리는 남다르게 평범한 인생을 살았지."ㅡ121

 

 

"할머니가 내 가슴속에 들어왔다가 길을 잃어서 빠져나가지 못한 게 아닐까 싶다만, 끔찍한 길치였거든. 에스컬레이터도 헤맬 만큼."ㅡ126

"나는 평생 어쩌다 내가 그 사람에게 반했는지 궁금해한 적이 없단다, 노아노아. 그 반대라면 모를까."ㅡ126

 

"우리가 춤을 추었다고 얘기해주려무나, 노아노아야. 사랑에 빠지는 기분이 그런 거라고, 내 발이 그 사람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기분이라고."ㅡ131

  남다르게 평범한 사랑을 하신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는 평범하면서도 남달랐다. 고수를 싫어하는 할머니와 춤을 출 줄 알았던 할아버지의 사랑이 참 아름다웠다. 할아버지가 잠자는 시간이 고문이라고, 아침에 일어나 할머니가 어디있는지 찾기까지의 몇초가 괴로웠다는 말은 정말 로맨틱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아침마다 사라지는 기억에, 할머니를 잊을까 두려워하며 매일 아침 기억을 떠올릴 수 있도록 부탁하는 모습 또한 애잔하게 다가왔다.

"네. 저를 잊어버리면 저하고 다시 친해질 기회가 생기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건 꽤 재밌을 거예요. 제가 친하게 지내기에 제법 괜찮은 사람이거든요."ㅡ134

"...할아버지의 머리가.... 가끔 우리가 알던 속도보다 느리게 돌아갈 거야. 할아버지가 알던 속도보다 느리게 돌아갈 거야."
"네. 그래서 매일 아침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점점 길어지겠죠."
아버지는 쪼그리고 앉아서 아들을 끌어안는다.
"우리 아들 참 훌륭하고 똑똑하고나. 내가 노아, 너를 얼마만큼 사랑하는가 하면 하늘도 그 마음을 다 담지 못할 거야."
"우리가 할아버지를 어떻게 도와드리면 돼요?"
..."할아버지랑 같은 길을 걸어드리면 되지. 같이 있어드리면 되지."-151

 

"예전에 호숫가에 텐트를 쳐놓고 그 안에서 자곤했는데 기억하세요, 할아버지? 이 줄을 손목에 묶으면 잠이 들어도 풍선이 매달려 있을 거예요. 무서워지면 그 줄을 당기기만 하세요. 그럼 제가 밖으로 꺼내드릴게요. 매번요." -159

 

병실 밖에서 우주가 노래를 부른다. 테드는 기타를 친다. 할아버지는 따라서 콧노래를 부른다. 화를 내기에는 너무 넓은 세상이지만, 함께하기에는 긴 인생이다. 노아는 딸아이의 머리칼을 어루만진다. 아이는 침낭 안에서 아빠 쪽으로 몸을 돌리지만 깨지는 않는다. 아이는 수학을 좋아하지 않고 제 할아버지처럼 언어와 악기를 좋아한다. 조금만 있으면 발이 땅에 닿을 것이다. 그들은 일렬로 잠을 청하고 텐트에서는 히아신스 향기가 나고 무서워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162 

 

  이 짧은 이야기는 무서워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로 끝이 난다. '치매'라는 질환을 이렇게 아름답고도 슬프고도 애잔하게 그릴 수 있다니... 솔직히 노인들에 대해 많이 써왔던 프레드릭 배크만 작가님이었기에 주인공이 노인일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슬플 줄은 몰랐다. 오베라는 남자가 은퇴하고 세상의 전부였던 아내를 떠나보내고 자살하려고 했을 때에도 이렇게 슬프고 감동적이진 않았다.

  나는 이 책의 제목인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보다 원제인 'and every morning the way home gets longer and longer'가 이 책의 내용과 통하는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매일 아침 더 멀어진다. 이 책에는 길을 찾는 이야기가 곧잘 나온다. 처음에 수학을 알면 우주에 갔다가 돌아올 수 있고, 나침반 하나만 주고 길을 찾아나오는 게임을 할아버지와 손자는 하곤 한다. 할아버지의 배는 할아버지의 사무실이자, 어린 테드가 가지 못했던 공간이자, 노아에겐 할아버지와 추억이 가득한 장소이다.

 매일매일 할아버지의 머릿속에서 제대로 된 길을 찾아 나오는 길이 더 멀어진다. 할머니와의 추억에 젖었던 할아버지가 아들인 테드를 기억 못하고, 손자인 노아를 기억하는 일이 점점 힘들어져도, 히아신스 향기가 나고 무서워 할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가족이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자신의 기억과 이별히며 두려워하는 할아버지를 손자가 돌보는 장면이 참 인상깊다.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도 새드엔딩도 아니다. 그저 아름다울 수 있는 현실인 것 같다. 노년 인구가 점점 늘어가는 요즘 아름답게 이별하기 위해서, 언제가는 해야할 작별인사를 위해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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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씽 에브리씽 (예담)
니콜라 윤 지음, 노지양 옮김 / 예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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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든 것, 모든 것이라는 이 책은 사랑이 모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책을 펴 보기 전부터 유명했던 책이라 기대기대하면서 책을 폈다.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 보자면, 세상에 나가본 적 없는 소녀가 세상 밖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랄까. 무채색의 방에서 걸러진 공기로 숨쉬며, 세상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18살이 된 소녀는 10년 넘게 이런 방에서 살았다. 소녀의 병명은 SCID ROWㅡ중증 복합면역결핍증이라는 병인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병이 실제로 있는지가 궁금해서 찾아봤다. 실제로 있는 병이었다.

 
내 새하얀 방의 새하얀 벽에 놓인 새하얀 책장에 가지런히 책들이 꽂혀 있고 이 책들만이 내 방에 색깔을 부여한다.ㅡ9


간단히 설명하면 기본적으로 나는 세상 모든 것에 알레르기를 일으킨다고 보면 된다 ㅡ12


<<앨저넌에게 꽃을>> 또 읽어? 그것만 읽으면 운다면서?
언젠가는 안 울겠죠. 그런 날이 올 때까지 읽어보려고요 ㅡ 25

어쩌면 나도 언젠가는, 훗날에는, 무엇이 되건 지금과 조금은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놓고 있진 않은 것이다. ㅡ25

 


  내가 만약 매들린이었다면 나는 아마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뛰어나갔을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스포를 하자면, 매들린도 결국 바깥 세상으로 나가게 된다.

 

 

그날 밤 나는 이 집이 나와 함께 숨을 쉬는 꿈을 꾸었다. 내가 숨을 내쉬자 벽이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어 무너지면서 나를 덮쳤다. 한 번만 더 숨을 내쉬면 내 삶은 마침내, 마침내, 폭발해버릴 것이다. ㅡ33

그의 가족들은 그를 올리라고 부른다....보면 볼수록 나는 그 아이에 대해 더 알고 싶다 ㅡ36

인생은 누구나 힘들단다, 얘야. 그렇지만 각자 자기 갈 길을 찾아가게 되지. ㅡ48

"원하는 걸 다 가질 수는 없는 법이야." ㅡ84

"왜 너희 여자애들은 엄마한테 거짓말하는 걸 그렇게 쉽게 생각하니?"ㅡ85


"그런데 생각해보면 모든 게 리스크 아닐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리스크거든. 모두 네가 하기에 달렸어." 나의 하얀 방과 하얀 소파와 하얀 책장과 하얀 벽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안전하고 익숙하고 변함없다. ....올리는 이 모든 것과 정확히 반대편에 있었다. 그는 안전하지 않다. 그는 익숙하지 않다. 그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 아이는 내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내 인생의 가장 큰 리스크다. ㅡ88


  무채색이었던 그녀의 삶에 다가온 것은 한 소년이었다. 무채색과는 너무 대비되는 세상 모든 것에 색깔을 부여하게 되는 사랑에 빠지게 만든 소년말이다. 왜 사람은 사랑에 빠지면 세상이 아름다워보이고, 모든 색깔이 극명하고 뚜렷하게 보이게 되는 것일까. 소녀에게 소년은 유채색의 자유로운 영혼이자, 첫사랑이자 바깥 세상이었다. 가장 큰 위험이 곧 가장 큰 기회이기도 하다는 어떤 사람의 말이 생각이 난다. 소녀에게도 올리는 가장 큰 위험이자 가장 큰 기회였다.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경험해선 안 된다는 뜻은 아니지. 그리고 희망 없는 짝사랑에 빠지는 것도 우리 인생의 일부야."ㅡ102

나는 실로 오랜만에 내가 가진 것 이상을 원했다. ㅡ103

내가 무언가를 원한다는 걸 인식하지마자 난 우주에서 지구로 추락하고 말았다. 무언가 원한다는 감정은 나를 두렵게 한다. 마치 바로 당신의 눈앞에 천천히 퍼지는 잡초와 같다. 잠깐 넋 놓고 있는 사이에 잡초는 마당을 덮어버리고 창문까지 가려버린다. ㅡ105

내가 확실히 아는 게 딱 한 가지 있다면, 그건 한 번 원하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더 많은 걸 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욕망엔 끝이 없다. ㅡ106

"아직은 잘 모를 거야. 하지만 이것도 다 지나간단다. 그냥 새로운 현상이고 호르몬 때문이야."ㅡ110

"이것 말고도 네가 두려워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사랑 때문에 죽지는 않아."ㅡ111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대사는 "사랑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였다. 이 책의 중요 사건에는 사랑이 있었다. 사랑이 혹은 사랑과 닮은 감정들이 모든 사건들의 계기가 되고 있다. 매들린은 칼라가 말한 사랑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는 말에 사랑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은 한다. 맞는 말인 것 같다. 사랑 때문에 죽지는 않지만, 사랑 때문에 죽고 싶어지긴 하니까.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매들린은 올리와 채팅으로 많은 대화를 나눈다.


나는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서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고 양손으로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와 같은 방에 있는 게 대체 뭐기에 이렇게 내 몸과 내 몸의 모든 부분을 인식하게 되는 것일까? 이제 난 내 피부 세포까지도 의식한다. ㅡ120

"그러니까 말이야. 가져본 적 없는 걸 그리워하는 기분 알아? 이상해. 정확하게는 가졌었다는 게 기억이 안 나는 거?"ㅡ122

어쩌면 우리는 모든 것을 예측하지는 못하겠지만 조금은 예상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를테면 이런 것. 나는 올리와 사랑에 빠지고야 말리라는 것. 그리고 그건 재앙이 되고야 말리라는 것. ㅡ126

"네 잘못이 아니아. 인생은 선물이란다. 그 선물을 살아내야 한다는 걸 잊지 마."..."용감해야 해. 기억해, 인생은 선물이란 걸." ㅡ 178

엄마와 내 사이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 같이 보내는 시간이 줄어서는 아니다. 올리가 엄마 자리를 대신해서도 아니다. 살면서 처음으로 엄마와 멀어진 이유는 감춰야 할 비밀이 생겼기 때문이다. ㅡ128

가끔은 인생 자체가 당신에게 무언가를 드러낼 때가 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전면 유리창으로 들어와 사다리꼴의 빛을 만들어냈다. 위를 올려다 보니 공기 속에서 먼지 입자들이 떠다녔고 그 먼지 입자들은 아지랑이 같은 빛 안에서 투명한 흰색으로 선명하게 빛났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한 장면 아래 세계 전체가 존재하고 있다. ㅡ207

"고마워" 할 말은 그뿐이다. 내가 이렇게 세상에 나온 건 다 네 덕분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사랑이 내게 세상을 열어주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그를 만나기 전에도 행복했다. 하지만 지금은 살아있다. 이 둘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ㅡ227

"그런데 말이지. 인생에 아무 후회가 없다면 그건 사는 게 아닌 거야."ㅡ234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건지도 몰라."ㅡ276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대고 이제 칠흑같은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파도가 멀리 밀려났다가 다시 밀려와 모래를 밀어내며 지구를 닳게 만들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항상 실패하지만 언제나 다시 돌아와서 사력을 다해 해안의 모래를 밀고 또 밀어냈다. 마치 지난 번은 기억 안 난다는 듯이, 다음번은 없다는 듯이, 이번만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단 한 번이라는 듯이. ㅡ295

 

  어머니의 보호에 의해 갇혀있던 소녀와 아버지에게 학대받은 소년은 세상 밖으로 나온다. 둘은 하와이로(!) 가출은 떠난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왜 도망처가 하와이가 되었어야 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와이의 어떤 점이 도피처로 합당했던 걸까? 뭐 쨌든 소년과 소녀는 떠났다. 그 뒤는 너무 스포가 되기에 여기에 적지는 않겠다. 뭐 하나만 더 하자면, 그 짧은 도피는 소녀가 아파서 끝났다고나 할까.

 

 

 

   이 책을 보며 가장 많이 생각난 책은 '어린왕자'와 '소나기'였다. 하나는 서양의 책이고 하나는 동양의 책인데, 둘은 '순수하다'라는 공통점이 있다. 책의 저자는 어린왕자를 베이스로 해서 이 글을 쓴 것 같은데, 솔직히 나는 소나기라는 책이 더 떠올랐다. 소녀가 아프다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까? 뭐 그것까진 알 수 없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순수가 아름답지만, 그 무채색이 과연 삶을 오히려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다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어른이 되는 것은 세상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어린왕자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더이상 소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아닐까 싶다.

  소년과 소녀의 풋풋하면서도 아름다운, 어쩌면 도피적인 사랑은 결국 현실에 정착한다. 이 순순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만, 삶은 아마 계속 될 것이다. 그런데 슬픈 것은 아름다운 결말의 그 뒷 이야기가 아름답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함 때문일까? 어린왕자는 결국 죽고 말았다. 소녀의 결말은 어떻게 될까?

  이 책이 영화화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영화는 사랑이 모든 것이라 말하는 이 이야기를 얼마나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을까? 개봉하면 보러가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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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내 마음입니다 - 서툴면 서툰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지금 내 마음대로
서늘한여름밤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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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봤을 때 '어차피 내 마음입니다'라는 제목이 참 마음에 들었다. 내 맘대로 하나도 안 돌아가는 세상에서 살고 있어서인지 몰라도 내 마음대로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제목이라서 마음이 끌렸다.

  어느날 갑자기 삶이 힘들어졌고, 직장과 준비하던 미래를 때려치고... 갑작스레 백수로 들어선 작가의 결정은 무모해 보이기도 했고, 부러워 보이기도 했다.

 


 

  이 책은 총 3장으로 되어 있다. '버리다, 찾기 위해', '느낀다, 여기에서 나답게', '자란다, 잘하고 있으니까' 제목들도 참 와닿았다. 이 책을 보면서 처음엔 작가의 이야기가 대단하게 느껴졌고, 그림체가 귀엽고 색감이 예뻤고... 결론은 그녀도 나와 같은 평범한 어느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롤로그에서 작가가 하는 이야기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에게 용기와 위로가 되길 바란다며... 혼자가 아니라는 내용에 눈물이 날 뻔 했다. 내가 이렇게 감성적인 사람이었다니. 아니 어쩌면 그 위에 있던 어두운 우주에 둥둥 떠 있는 그림이 너무 나같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도 상처를 통해 강해지지 않는다. 상처를 통해 강해지라고 하는 말은 대부분 그 상처에 무뎌지라는 뜻이다. 무뎌진 사람들은 상처받는 환경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또다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무뎌지는 것은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나를 진짜 강하게 만들어줬던 것은 언제나 다정하고 따뜻했던 말들이다. 힘들 때 나를 지켜줬던 것은 욕먹었던 기억이 아니라 칭찬받았던 기억이다. 그래서 나는 상처받고 싶지 않다. 마음 속에 진주같은 건 품고 싶지 않다. 늘 말랑말랑하고 예민한 마음인 채로 살고 싶다. ㅡ40

 

 

  나다운 게 무엇일까. 이 책에는 작가가 달렸던, 꿈을 위해 나아갔던 이야기들, 작가의 엄마와의 이야기, 연애사, 그리고 결혼사. 작가의 많은 약점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내가 이 부분이 약하고, 이 부분이 힘들고. 꺼내 놓으면 마음이 편해진다고들 하지만, 자신의 약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책 내용에 조금은 놀랐다. 작가는 연인이었던 지금은 남편인 분의 많은 다독거림으로, 그리고 셀프 다독으로 많이 이겨내신 것 같다. 나는 과연 다독을, 셀프 다독을 잘하고 있는지... 여전히 잠 못 드는 밤에 고민해 본다.


남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 당연한 것들을 나는 이제야 알게 되는 것이 많다. 결핍은 채워지기 전까지 극복할 수 없다는 걸, 채워지기 전에는 알지 못했다. 하긴 노력으로 극복될 거였으면 애당초 결핍이 아니었겠지. ㅡ160

 

....세상에 망한 인생은 없다는 걸 인생은 망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걸 배웠다. ㅡ188

 


  내가 참 좋아하는 노래 중에 GOD의 '길'이라는 노래가 있다. 내가 가는 길이 이 길이 맞는지, 걷고 나면 내가 행복해질 수 있을지, 한 발 한 발 걸어가면서도 살아가면서도 많은 생각과 고민과 걱정이 들지만, 노래를 들으며 책을 보며 작은 위안 한 조각 얻을 수 있었다. 그래, 정말 나만 그런 건 아니구나. 나만 온갖 갈림길 위에 서 있는 것은 아니구나. 다들 많은 선택의 길로에서 내가 갈 길 하나 없는 듯한 그런 느낌을 받는구나. 위로가 되었다.

 

우리는 모두 실수를 한다. 오늘은 그게 나였을 뿐이다. 그러니 조금 더 너그러워지자. 남들어게도, 나에게도. ㅡ248

 


   전에 어느 책에서 '존버'라는 단어를 봤다. 정확하게 어디서 봤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내용은 그거였다. 존나게 버텨라. 이긴자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버틴자가 승리하는 것이다. 정답이 없는 인생이라는 싸움에 이기고 지는 것은 없다. 존나게 버티다 보면 이기게 되고, 승리하게 된다고. 나는 잘 버티고 있는 것일까? 위 그림 속의 물 속의 사람이 마치 나같다. 나는 잘하고 있는지. 잘 버티고 있는지. 언제야 이 강을 건널 수 있을지... 그래도 버티다 보면 언젠가 끝나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의 마지막에는 짧게나마 작가의 고민 상담(?)이 있었다. 독자들의 말에 성심껏 답해주는 모습에 감동 받았다. 이 책의 그림체가 아주 뛰어나냐고 물어보면 솔직히 아니다. 그런데 특유의 색감과 귀여운 캐릭터와 위로의 말이 마음을 따스하게 한다. 책의 부제인 '서툴면 서툰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지금 내 마음대로' 가끔은 딴 사람의 마음인 것 같을 때도 있지만, 어차피 내 마음이니까. 나 혼자 그런 건 아니라고 위안하며 내 마음대로 이거 하나, 저거 하나 조금씩 내 맘대로 살아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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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한 인문학
이봉호 지음 / 쌤앤파커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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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한 인문학이라는 제목만 봤을 때, 책이 과연 어떻게 전개될까 하는 의문이들었다. 음란함과 인문학은 언뜻 보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고, 공통요소가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을 보면서 그런 편견은 많이 사라졌다.


인문학은 시대뿐만 아니라 국가에 따라서 조금씩 의미를 달리했다. 한국의 경우 문,사,철, 즉 문학, 역사, 철학이라는 세 가지 학문으라 이해되곤 했다. 미국은 이것 외에도 예술을 인문학에 포함한다. 프랑스는 역사와 철학 이외에 사회학을, 톡일은 심리학을 포함한다. 이렇게 인문학은 광범위한 학습을 전제로 한다. 사람들이 인문학 공부가 난해하다고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음란'의 사전적 의미는 '음탕하고 난잡함'이다. 유혹적이면서 부정적인 어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복잡한 단어다. 그러나 음란이라는 단어만큼 인간의 성문화를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것도 없다.


  음란한 건 어떤 것일까? 이 책의 부제는 '금기와 억압에 도전하는 원초적 독법'이다. 음란하다는 단어가 주는 뭔가 꺼려지고 숨겨야하고 더러운 것으로 느껴지는 것은 우리 사회가 음란함을 금기로 여기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는 많은 금기들이, 그리고 그 금기들을 이겨낸 사례들이, 그 금기들이 왜 금기가 되었는지 등등 많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학문에는 어떠한 성역이나 금기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모두가 인정하지만, 누구도 말하려 하지 않는 인문학의 아킬레스건이 바로 음란한 인문학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음란함이란 성적인 요소이다. 성을 가지고 정치적, 예술적, 문학적으로 드러낸 사례들이 있을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 음란함들이 어떻게 사회에 드러내졌는지. 그리고 동성애나 로리타 등 아직도 사회적으로 받아들이기에 많은 논란이 되는 성적인 주제들을 많이 다루고 있다.


우리는 치치올리나의 행보에서 두 가지의 음란함을 엿볼 수 있다. 첫째는 '만들어진 음란함'이다. 그녀는 섹스를 직업의 도구이자 표현의 수단으로써 활용했다. 다음은 대중의 시선과 사회라는 통제망을 뚫고 드러나는 '주제적 음란함'이다. 그녀는 그녀 자신을 둘러싼 금기와 고정관념의 벽을 과감히 뛰어넘었다.

 

어떤 미술평론가는 피카소의 끊임없는 예술적 원천은 그를 둘러싼 여인들과의 사랑이었다고 평가한다. 피카소의 예술인생에서 사랑을 빼고는 그 무엇도 가치를 논할 수 없기에.


   많은 주제들 가운데 흥미로웠던 것은 피카소였다. 피카소라는 작가가 유명한 건 누구나 안다. 그의 그림을 봤을 때 '아, 비싼 그림이구나.. 이런 그림이 왜 비싸지?'라는 생각을 한 적이 많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앞으로는 피카소의 작품을 볼때면 과연 피카소는 이런 여인들을 그림으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것 같다. 피카소의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게르니카'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는데 흥미로웠다.


<<황혼유성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초라하다......상처 주는 이도, 상처 받는 이도 모두가 늙어간다는 명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과거를 후회하고, 반성하고, 아쉬워 하며서 살아온 날보다 짧은 살아갈 날들을 위태롭게 버틴다.


중년이라는 시간을 걷는 사람들. 이들은 삶보다 죽음에 더 가까운 위치에 서 있다. 그렇게 자주 멈칫하고 고민한다. 경험은 쌓이고 사유는 깊어졌지만 실행하기가 쉽지 않다. 실패할 경우 다시 돌아갈 자리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외롭고 위태로운 사랑을 감수해야만 한다.


 

 

   음란한 것은 누가 정한 것일까? 우리나라의 유교적인 그런 의식때문에 남녀칠세부동석이라든지, 쓰개치마라든지, 정절을 요구한다든지 하는 것들이 강요되었다고들 다들 생각한다. 미국의 서구적인 그런 개방적인 성의식이 부럽다든가 하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미국이 청교도적 의식때문에 굉장히 금욕적이고 성에 대해 개방적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우리가 말하던 서구적인 성 개방성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사실 우리나라가 유교주의를 절대화하고, 성에 억압적이게 된 것은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니다. 많이 알려진대로 고려만 해도, 조선초만해도 음란함이 금기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문제는 다시 음란함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만화에서처럼 스스로 찾아오지 않는다.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하룻밤 충동적인 잠자리가 아니라 두 번째 삶을 용기 있게 헤쳐 나갈 수 있는 음란한 인문 정신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가 한국작가라서 참 좋았다. 서양의 많은 사례들이 나오면서 그렇구나 하고 생각하다가도 그것을 한국에 적용하는 모습이 나올 때 움찔하면서 아 한국작가였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솔직히 외국작가의 좋은 책들이 많지만, 읽다보면 읽는 것을 끝나는 경우가 많고, 적용이 안 되거나 아니면 다른 문화에 이해조차 안 될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 책은 금기를 건드린 책임에도 한국작가가 썼고, 그리고 그러한 사례들을 우리사회에 잘 적용하는 것 같아서 보면서 좋았다. 또 사회가 많이 바뀌었다고 해도 아직은 우리사회가 '금기'라 말하는 것들을 인문학적으로 잘 풀어낸 것 같아서 읽으면서 음란한데 학문적인 그 모습이 좋았다. 음란한 것이 마냥 더럽고 꺼려지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으로 이렇게 풀이된다는 것을 알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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