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심해서 그렇습니다 - 소극적 평화주의자의 인생다반사
유선경 지음 / 동아일보사 / 2015년 9월
평점 :
소심해서 그렇습니다
파아란 파스텔 톤의 표지에 '소심해서 그렇습니다'라고 써 있고 그 아래로 하얀 글씨로 '소극적 평화주의자의 인생다반사'라고 부제가 써 있다. 나도 누구보다 소심하다고 자부하는 일인으로서 이 책 제목과 부제가 참 맘에 든다. 소심해서 그렇다는 말은 뭔가 핑계같기도 하고, 자랑할 일도 아닌데 어쩌라는 건지 하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그저 작가는 소심한 '우리'의 일상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책의 또 다른 부제는 '보통의 느낌'이다. 소심한 사람의 보통의 느낌은 어떤 것일까... 생각하며 책을 폈다.
이 책은 총 6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별일 없는 날, 2부 이래야 할까, 저래야 할까, 3부 나와 참 많이 다른 사람들, 4부 소심해서 그렇습니다, 5부 가족이라는 말, 6부 아무렴, 해놓은 것이 아무 것도 없을까. 각 장들은 정말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고, 작가는 그 일들에 대한 본인의 느낌을 더해 놓았다.
그리고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잃어버린 뒤에야, 잊어버린 뒤에야
비로소 그것들의 모습을 뚜렷이 봅니다.
지금까지 모르던 내가 보입니다.
사라지고 나서야 마음의 눈 속에
깊이 새겨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54
돌이켜 보면, 그처럼 분명히 내 손 안에 있었는데
아이스크림 녹듯 사라져버린 것이 적지 않습니다.
시간이 그렇고, 기회가 그랬습니다.
그 두 가지가 아이스크림 녹듯이 녹아 없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예전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56
잃어버린 것들에 대하여, 너무나 많은 때 이미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 가치를 깨닫게 된다. 많은 사람이 한 말이고, 나도 전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던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인어공주 물거품처럼 현재의 내 시간 속에서 사라진 친구들은 또 새로웠다. 아 그래, 시간이 가고 기회를 놓쳐버리기도 하지만 고마웠던 사람들, 내 친구들이 사라져 버리기도 하는구나 하는 깨달음이 있었다. 이 책에 그림이랄 건 몇 없지만, 책 밑단에 그려진 물거품 몇 방울이 얼마나 아스라이 느껴지던지. 그리운 얼굴들이 그 안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소심해서 더 상처 받고, 우유부단해서 더 손해 봅니다.
타인에게 상처 주고 손해 주느니 그게 더 편하다고 생각합니다. -178
변명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소심한 이들의 18번이 아닌가 싶다. 나도 자주 중얼거리는 말 중 하나이다. 타인에게 상처 주고 손해 주고 내 마음 고생 하는 것보단 차라리 편하다고 말이다.
행운이 불운의 시작인 것처럼
불운이 행운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만들 수 있는 비결은
단점이나 불행, 불운 등을 지렛대로 삼을 수 있는 힘에서 옵니다.
나빴던 것들이 나의 존재를,
나의 생을 들어 올리는 지렛대가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말입니다. -287
길이란 아마도 그렇게 가는 거겠지요.
오늘 조금만 더
지금 조금만 더
징검다리를 놓아가며 내를 건너 산을 넘어
끝까지 가는 거겠지요. -293
이 책에서 제일 좋았던 구절 중 하나는 '길'에 대한것이었다.오늘 조금 더, 지금 조금만 더... 이 구절이 좋았던 이유는 내가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말이다. 가는 길은 징검다리라 물에 가끔 빠지기도 하고, 균형을 못 잡아 비틀거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나가는 것. 지금 현재의 내가 그렇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싶다.
오직, 한 걸음만 앞으로 나아갈 뿐,
한 걸음 너머에 있는 걸음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오직, 한 걸음만 바라볼 뿐, 멀리 보지는 못합니다.
떨어질까봐 아래를 내려다 보지도 못합니다.
가만히 웅크리고 멈춰 서 있으려고 하면
오히려 균형을 잃고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멈추지 않고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갑니다.
좌로 우로 비틀비틀거리는 것은 균형을 잡기 위해서 입니다.
그 위태로운 한 걸음, 한 걸음이 나를 만들어갑니다.
그렇게 나는 나를 향해 나아갑니다.
끝이 있을지 없을지도 아직은 알 수 없는 허공의 줄을 타고서
비틀거리고 흔들거리면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314
나는 밤에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사람같다. 작가는 외줄타기에 비유를 했지만, 나는 징검다리가 더 와닿았다. 밤에 징검다리를 건너니 다음 발은 저기에 닿으면 된다고 어림짐작하고 발을 떼게 된다. 온 힘을 다해 발을 내밀어 보면, 다음 돌에 닿을 때도 물어 떻어질 뻔 하기도 물에 떨어지기도 한다. 너무 힘들어 뒤 돌아가고 싶지만, 뒤도 어둠. 내가 가는 방향이 옳은지도 이제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눈 앞에 보이는 돌에 발을 내딛어야 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매일이 아닌가 싶다.

책의 뒷표지이다. 알고보면 모두들 소심하다. 주위에선 대범하다 생각하지만, 스스로는 소심하다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대화를 하다보면 느끼게 된다. 상대를 먼저 생각한다는 것, 말은 쉬워보여도 실행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역지사지라는 사자성어를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실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인 사회에서 소극적 평화주의자들이 더 많아지기를. 작은 마음들이 모여 웃는 마음들을 만들어 낼 수 있길. 책을 덮으며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