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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 나이프 - 왼팔과 사랑에 빠진 남자
하야시 고지 지음, 김현화 옮김 / 오렌지디 / 2020년 11월
평점 :
한때 메디컬 드라마에 푹 빠졌던 적이 있어요.
차갑게만 느껴졌던 의사들도 다 사람이라는 걸 느꼈더랬죠.
<톱 나이프>를 읽으면서 그때 그 드라마처럼 몰입했던 것 같아요.
소설 제목인 톱 나이프는 세계 최고의 신경외과의에게 주어지는 상의 이름이에요. 신경외과 전문의라면 누구나 지향하는 톱 나이프.
세상에 수많은 칼들 중 유일하게 사람을 살리는 칼, 그 칼잡이들의 세계.
이 소설은 도토종합병원 신경외과 의사들의 '마음'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어요.
4편의 이야기는 각각 신경외과 의사 미야마, 구로이와, 니시고오리, 고즈쿠에의 시점에서 들려주고 있어요.
네 명의 신경외과의사 중에서 신참내기 고즈쿠에는 가장 독특한 캐릭터예요.
도토대학교 의예과를 수석 졸업했다고 제 입으로 퍼뜨릴 정도로 자신감이 지나치다고 해야하나.
더군다나 서열과 권위주의로 똘똘 뭉친 의사 조직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태도가 압권이에요. 신경외과 차장 미야마에게 거리낌 없이 말을 걸고, 회진이나 상담 중에도 툭툭 끼어들며 말하기 선수예요. 머릿속에 생각나는 말들을 아무런 필터 없이 떠들고, 말하기 좋아해서 병동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거의 고즈쿠에를 통해 퍼진다고 봐야 해요. 당연히 혼나고 구박받는데도 전혀 구김살이 없어요.
와, 어떻게 이런 사람이 신경외과의사가 되었나 궁금했는데 그 속내를 알게 되니까 또 한 번 와, 소리가 나왔어요.
학창시절 내내 늘 1등만 했기 때문에 별 고민 없이 도토대학 의학부에 들어갔고, 연수 기간을 마친 후에는 대학병원 신경외과 의국에 배치되었어요. 왜냐하면 신경외과 랭킹이 도쿄 내에서 최고니까. 최고의 난이도에 도전하는 것이 고즈쿠에의 타고난 천성이었어요. 그래서 도토종합병원 신경외과 부장인 이마데가와 다카오가 "일본에서 제일 들어가기 어려운 과가 우리 신경외과야."라는 말에 냉큼 신경외과를 선택한 거예요. 원래는 피비린내 나는 외과도 싫고, 뜻대로 되지 않아 짜증나는 내과도 싫어서 차라리 말이 없는 세포를 상대하는 병리학자가 되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신경외과 부장 이마데가와가 덧붙인 다음의 말 때문에 결정타가 된 거예요.
"자네, 사랑해본 적 있나?"
"네?"
"사랑 말이야, 사랑. 연애해본 적 있냐고."
"...... 아뇨."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당혹스러워하는 고즈쿠에를 이마데가와는 몰아세웠다.
"그럼 신경외과로 오는 편이 좋을 거야. 뇌는 마음이거든. 마음을 알아야지. ...... 안 그래?"
무엇이 "안 그래?"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지만, 벼락을 맞은 듯이 몸에, 아니 뇌에 전류가 흘러 신경외과에 가기로 정했다.
그렇게 미래를 정한 것은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252-253p)
살면서 한 번도 연애해본 적 없는 고즈쿠에는 사랑이 뭔지 모르는 인물이에요. 마음이 뭐냐고 물으면, 그건 뇌에서 벌어지는 시냅스의 전기신호라고 말하는 사람이에요. 그런 고즈쿠에가 베테랑 신경외과 의사인 미야마, 구로이와, 니시고오리를 보면서 뭔가를 느꼈다는 건 대단한 변화예요. 구박만 받다가 때려칠 줄 알았거든요.
어쩌면 신경외과 의사들의 세계를 모르는 일반인들도 <톱 나이프>를 읽고나면 고즈쿠에와 같은 반응을 보일 것 같네요. 저 역시 그랬거든요.
"사람은 신기해."
"아니, 뇌가 신기하다고 해야 하나? 이렇게 신기한 거였구나......" (314p)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