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지음 / 창비 / 199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이 처음 출간이 된 건 내가 대학교 3학년 때였다. 친구네 집에 갔다 책꽂이에 꽂혀 있는 것을 보고는 그냥 그렇고 그런 책이 거니 했다. 그런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건 한 편으로는 이 책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외국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진 난 단지 책 제목의 '빠리' 라는 단어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하지만, 이건 분명 프랑스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우리 한국의 이야기 였다. 아주 오랜 과거의 역사에서 시작된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들. TV를 보면 내 이루어 지는 사건, 사고들. 특히 정치부분은 조선시대의 정쟁을 재현이라도 하는 듯 등장인물만 다르고 역사를 반복하며 뉴스라는 프로에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정치와 연계되어 이권에 따라 돌아가는 경제. 그래. 그게 바로 내가 뉴스조차도 안 보는 나 스스로를 이 사회의 이방인으로 만드는 이유였다. 주가 아닌 객이 되어 남의 집 불구경 하 듯 했다.

하지만, 이 책은 나 자신을 실로 반성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회에 대해 문제 의식을 갖고 그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자신을 던진다는 것. 그건 분명 당연한 일임에도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안다. 어렸을 적엔 그랬다. 가난한 사람은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는 분명 그의 인생에 게을렀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이를 조금씩 먹으면서 그건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알았다. 사회적인 문제라는 것. 사회적 구조로 빈곤이 악순환 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앎으로 끝났을 뿐이다. 용기가 없었다. 혹 용기가 있었다 한들 내 이기심이 날 막았을 것이다. 그래. 홍세화라는 사람은 용기도 있었고 이기심도 버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선택에 지금까지도 그 댓가를 치루고 있다. 하지만, 그건 그 만의 몫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가 우리들의 몫까지 짊어진거란 생각이 든다.

진실은 밝혀져야 하지 않을까? 진실은 결국 이 같은 이들에 의해 밝혀 지지 않을까? 왜곡된 역사는 바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역사의 심판이 이루어 져야 하지 않을까? 또한, 제 2의 빠리 택시운전사를 만들지 않기 위해선 '똘레랑스'가 통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건 그 어느 개인의 몫도 아닌 우리 모두의 몫이고 의무이고 권리이지 않을까?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은 그 만남으로 또는 눈물로 그쳐 선 안될 일이었다. 만남도 눈물도 사랑에서 오고 또 사랑을 요구한다. 또한 그 사랑은 사회 안에서 반드시 참여를 요구한다. 그러나 나에게 그것은 다만 '나 자신과 끝없는 싸움'으로 나타났을 뿐이었다. 나는 우리 사회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을 알기 전에 증오부터 배웠다. --라는 글귀가 내 가슴을 참 오랬동안이나 울렸다.

이 책을 통해 생각해 보게 되는 부분들이 몇 가지 더 있다. 프랑스 택시 손님으로 만난 한국인들의 일화를 통한 우리 한국인들의 일면. 국가 예산의 20프로를 교육에 투자하는, 주입식 교육이 아닌 사물에 대한 사고와 안목을 키우는 교육. 우리의 강요하는 사회와 다른 설득하는 사회. 근거 없이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고 미리 의심부터 하는 우리의 습관과는 다른 프랑스 사회. 축제 같은 분의기의 데모현장. 노동자의 파업권을 제한하는 데 동의하면 언젠가 그 제한의 목소리가 바로 그들 자신에게도 닥칠 거라는 노동파업에 대한 시민들 반응.... 등 프랑스 사회를 통해 우리의 사회를 들여다 보고 반성해 보게 된다.

만약 내가 또 다시 나 스스로 이 사회의 이방인이 되어 버린다면 오오까의 세번째 밀감은 나의 몫이 되지 않을까? 어떤 작위만이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작위도 죄가 되거늘... 그리고, 진심으로 홍세화님의 여권에 꼬레의 입국도장이 찍히는 똘레랑스 한국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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