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마술사
데이비드 피셔 지음, 전행선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9월
평점 :
절판


“우리가 그걸 위장해주길 바라시는 겁니까?”

바커스가 그를 엄숙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자네들이 그 장소를 숨겨서, 심지어 나룻배를 타고 가는 파루크왕도 항구가 어딘지 찾을 수 없게 해줬으면 좋겠네.”

재스퍼는 검지로 장난스럽게 모래를 저어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알렉산드리아 항구는 지금까지 그 어느 마술사도 공연해본 적이 없는 엄청 큰 무대였다. 마술사 경력 내내, 그는 오토바이, 여성, 상자, 심지어 가끔은 코끼리까지 사라지게 했지만, 항구 전체를 사라지게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총알이 퍼붓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전쟁터에서 적군의 폭격으로부터 항구를 보이지 않게 숨기고, 정찰대가 탱크를 평범한 트럭으로 보도록 만들고, 철도 차량을 모조 잠수함으로, 폐선박을 대형 전함으로 바꿔 놓을 수 있다면 어떨까.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적군의 총 공습으로부터 항구를 지켜야 하는데, 누군가 항구를 감쪽같이 없애 준다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싶을 것이다. , 이 마법과도 같은 일을 해낸 당사자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어딘가에 갇히게 된다면, 도망갈 계획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세워볼 수 있을 것이다. 날아 가거나, 땅굴을 파거나,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간단히 투명인간이 돼버리는 거라고. 바로 이것이 마술로 만들어낼 수 있는 정말 믿기지 않는 실화의 한 장면이다.

이 책은 실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인 마술사 재스퍼 마스켈린의 활약상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내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사를 오가는, 사소한 실수조차 죽음으로 직결되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대체 마술사가 무슨 일을 한단 말인지 궁금했다. 전쟁 마술사라니 상상조차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재스퍼 마스켈린은 대대로 마술사 집안에서 태어난 유명한 마술사였다. 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쇼 비즈니스를 잠시 접어두고 무대 위의 마술 기법을 전쟁에 이용할 만한 수단이 없을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상상력과 지식만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믿으며 살아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럽 전역에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라는 점이 군에 입대하려는 그의 의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한다. 사실 군대에선 서른 여덟 살이나 먹은 마술사가 아니라 전장에 나가 싸울 젊은 청년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마스켈린은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그들을 설득해 군에 입대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아군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적군이 알지 못하게 숨기거나, 거짓으로 꾸미는 위장술 조직에 배치되어 활약을 하게 된다.

 

“한마디로 황당한 임무야.” 바커스가 말했다.

재스퍼도 동의했다. 왜 몽고메리 장군이 홍해를 반으로 가르거나 전염병을 일으키는 등의 합리적인 요구를 하지 않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재스퍼는 속이 울렁거렸지만, 이번에는 실패의 두려움에 기인한 증세가 아니었다. 기회가 왔다는 흥분 때문이었다. 마침내 그것이 온 것이다. 위대한 마술의 기회! 전쟁의 판도를 바꿔버릴 만한 매우 중요한 마술. 전장에서 지금껏 시도되었던 그 어떤 마술보다 더, 엄청나게 큰 규모의 마술.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가 수행했던 그 어떤 마술보다 훨씬 더 어려운 마술. 마침내 그는 3년 전에 시작했던 그 일, 정확히 그 일을 수행할 것을 요구 받았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술을.

 

 

이 작품은 2018년 개봉을 목표로 영화화가 진행 중이며 [닥터 스트레인지], [셜록], [이미테이션 게임]의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마스켈린 역으로 캐스팅되었다고 한다. 극중 마스켈린의 외모에 대한 설명으로 '키가 190센티미터를 넘었고, 당시의 가장 까다로운 기준을 들이대더라도 절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미남'이라는 대목이 있었는데, 잘생긴 외모와 세련된 기교의 화려한 마술사 역할에 그만큼 또 잘 어울리는 배우가 있을까 싶다. 사실 전쟁 소설인 만큼 이 두툼한 페이지 내내 전쟁이 벌어지는 전장과 그 뒤의 수많은 전략 등이 전쟁 용어와 함께 난무하는 이야기라, 술술 읽히는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재스퍼 마스켈린이라는 전무후무한 캐릭터의 마력에 푹 빠지게 된다면, 적을 속이기 위한 온갖 속임수의 마술에 현혹된다면 아마도 굉장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만큼 독특한 소재였고, 그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가 보여주는 드라마란 실화라는 것을 알고 읽어도 쉽사리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웠다. 마술의 힘을 활용한 수많은 위장술들은 모두 굉장히 기발하고, 훌륭했다. 마스켈린은 말한다. 인간의 본성과 기초적인 과학 원리를 이용한다면, 그 무시무시한 전쟁 기계 나치도 속일 수 있다고. 덕분에 그는 실제 히틀러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만큼 그가 활약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의 그것이 나치 독일군을 제대로 농락했다는 말이 될 것이다.

마스켈린의 상상력은 기상천외한 전술로 영국군의 위장술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마술이라는 것이 대부분 보조 장치가 필요한 속임수쯤이라고 치부했던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은 환상이 실제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굉장히 치밀한 과학적 원리와 인간의 본질에 관한 고찰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전쟁이라는 소재로 만들어진 그 어떤 작품도 흥미롭게 읽어본 기억이 없는데, 이 작품만은 재스퍼 마스켈린이라는 매력적인 인물 덕분에 전쟁이라는 서사 자체를 다르게 보도록 만들어 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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