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세계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살림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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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시대에 결혼은 아이를 갖고 싶거나 경제적 동반자가 필요하다거나 일에 집중하고 싶으니 집안일을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거나 하는 합리적인 이유로 결정하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물론 단순히 반려자가 필요해서 결혼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럴 바에야 차라리 친구와 동거하는 편이 낫다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었다.

가족이라는 시스템이 살아가는 데 편리하다면 이용하고 필요 없다면 이용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가족과 결혼은 그런 제도가 되어가고 있었다. 주변만 봐도 혼인 비율이 큰 폭으로 줄어들고 있다는 게 실감 났다. 얼마 전에는 30대에 결혼하는 인구가 35퍼센트에 불과하다는 뉴스도 본 적이 있다.

2차 세계대전 중, 남성이 전쟁터로 징용되면서 태어나는 아이의 수가 극단적으로 줄어들었고, 기 위기 상황을 계기로 인공수정 연구가 비약적으로 진화했다. 남성이 전쟁터에 나가도 정자를 보관해두면 임신이 가능해졌으며, 남겨진 많은 여성들이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낳았다. 그렇게 인공수정 연구는 계속 발전했고, 수정 확률이 교미보다 압도적으로 높아졌으며 안전했다. 그렇게 사람들은 더 이상 성관계를 통해 아이를 낳지 않게 된다. 사춘기가 되면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속 가상 캐릭터를 통해 스스로 성욕을 해소했고, 인간과 연인 상태가 되거나 결혼을 하더라도 그들은 섹스를 하지 않았다. 부부가 성관계를 가지면 근친상간이라고 비난 받으며, 이혼의 사유가 되기도 했다. 이야기는 바로 그런 가상 세계를 바탕으로 진행된다.

아마네는 초등학교 시절, 자신이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인공수정이 아니라 교미를 통해서 낳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빠랑 엄마는 정말 사랑해서 결혼했고 그 결실로 아마네를 낳았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던 엄마는 딸에게 끊임없이 원시적인 교미에 대해서 설명해주었지만, 대체 왜 평범하지 않은 방법으로 자신을 낳은 것인지 아마네는 이해할 수 없다. 그녀는 인공수정이 발달한 세계와 교미로 번식하던 세계 사이에서 방황하며, 점점 인간과의 섹스에 몰두하게 된다. 인간과 연애하고 번식할 필요가 없어진 세상, 머지않아 섹스도, 연애도 사라져 버릴 그 세상에서 오로지 그녀만이 끊임없이 인간을 사랑하고 육체를 탐닉한다. 허구의 인물과 연애하는 것은 정상이고, 인간과 살을 맞대고 연애하는 것은 비정상인 세계에서 말이다.

 

"난 어릴 때부터 가족을 소중히 여겼고, 지금도 가족이 가장 소중해. 항상 가족이 필요하다고, 또 가족이 소중하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일이나 연애와 달리 인간의 본능 아냐? 가족이 생기길 바라는 건?"

"그런가. 그럼 실험도시는 실패하겠네."

"그딴 게 잘되겠어? 가족이 없는 상태에서 아이만 태어나는 세상이 잘 돌아가겠느냐고. 그리고 아이가 있든 없든, '나와 인생이 얽혀 있는 사람'이 인간에게는 필요해. 우리 몸과 마음은 그런 걸 필요로 하게끔 만들어져 있어. 그러니까 다들 그런 세상에선 도망쳐 나올 거야. 가족이 필요해, 외로워서 죽을 것 같아 하면서."

사실 기본적인 설정만 보고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를 떠올렸는데, 직접 읽어 보고 나니 무라타 사야카가 그려낸 세계는 조금 다른 모습인 것 같다. 이 작품의 여러 가지가 놀랍고 당황스러웠지만, 그 중에서도 충격적인 설정은 가족 시스템을 아예 없애버린 '실험도시'였다. 컴퓨터로 선정된 주민이 매년 1224일에 일제히 인공수정을 하고 출산을 해 태어난 아이들은 부모가 아니라 센터에 맡겨져 도시의 모든 어른들이 '부모 역할'을 하며 함께 양육한다. 아이들은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센터에서 지내며, 이후 수정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성인으로 간주되어 사회로 나가게 된다. 그들의 세상에서는 모든 어른이 모든 아이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모든 아이가 모든 어른에게 사랑 받으며 자라는, 에덴과 같다는 뜻에서 이를 에덴 시스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머지 않은 미래에 인류는 '가족 시스템'이 아니라 이곳의 새로운 '에덴 시스템'으로 번식할 거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가족이라는 개념이 사라져버리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마치 도시 전체가 합심하여 인간의 아이라는 애완동물을 키우는 듯한 광경은 낯설기도 하고, 어쩐지 서글프기도 했다.

물론 2017년을 살아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가족 제도라는 것은 많이 해체되고, 붕괴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노인문제, 청소년 문제, 부모와 자식 간의 소통 문제, 부부간의 불화 등.. 한 두 가지가 아니니 말이다. 게다가 여전히 남녀 간의 불평등한 관계와 임신, 출산에 대한 고정관념 또한 항상 불거지는 문제이다. 아이를 낳으라고 강요 받는 여성들, 섹스를 하지 않기로 결정한 사이좋은 부부.. 이런 사람들을 위한 유토피아가 바로 극중 세계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다고만 여겨왔던 모든 가치들이 부정되는 그곳에 쉽사리 동화되거나 공감하기는 어려울 수 있겠지만, 결혼과 출산이라는 신성한 가치에 균열을 내고 가족제도 자체에 반기를 들고 있는 무라타 사야카의 관점은 대단히 통쾌하기도 했다. 가족의 해체를 그리고 있는 작품을 읽으며 아이러니하게도 가족의 가치란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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