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비스 콜과 조 파이크는 12년 간 함께 탐정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조 파이크는 동료 살해범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퇴직했는데, 덕분에 LA경찰 전체가 아직도 그에게 적대적이다. 그들은 전부터 조가 알고 지내던 프랭크 가르시아의 딸이 실종된 사건 수사를 의뢰 받지만, 그녀는 다음 날 시신으로 발견된다.
중년 여성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는 또 다른 미소를 주고받았다. 중년 남성은 아직도 신문에 빠져 있었다. 내가 거기 있는 내내, 두 사람 다 상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은 서로에게 해야 할 말을 몇 년 전에 모두 다 한 건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그들의 침묵은 별개의 인생을 살아온 두 사람에게서 비롯된 게 아니라, 천생연분이라서 그저 가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랑과 커뮤니케이션을 도출할 수 있는 두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아무 이유 없이 죽이는 세상에서, 우리는 그런 것들을 믿고 싶어 한다.
프랭크는 경찰이 자신의 신고에 반응을 보이지 않아 딸이 목숨을 잃었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수사를 신뢰하지 않고, 수사 상황을 감시하고 정보전달을 해달라며 엘비스와 조에게 살인 사건 조사도 곁에서 지켜봐 달라고 부탁한다. 프랭크의 딸인 카렌은 과거 조가 경찰이던 시절 그의 연인이었다. 조와 오랜 기간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그의 과거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엘비스는 이번 사건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말이다. 조가 경찰들과 껄끄러운 관계라 주로 수사는 엘비스에 의해 진행되는데, 평범한 살인 사건처럼 보였던 그녀의 죽음이 사실은 연쇄살인의 다섯 번째 희생자였다는 것이 드러난다. 카렌의 시신을 발견해 용의자로 지목된 남자마저 살해된 채 발견되고, 유일한 목격자는 다름 아닌 조 파이크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경찰들은 안 그래도 눈엣가시였던 그를 구속해서 심문하고, 엘비스 콜은 친구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송 차량에서 탈출해 도망자가 된 조와 함께 그들은 과연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이번 작품에서 이야기는 과거 조 파이크가 정복 경찰이던 시절, 아일랜더 팜스 모텔에서 시작했다. 선배 경찰과 함께 제보를 받고 소아 성애자를 쫓던 그 상황에서 용의자와 선배가 죽는다. 그 선배는 내사과에 의해 뇌물수수 혐의를 받던 중이었고, 당시 수사를 맡았던 크란츠는 몇 년 간 조가 그의 파트너였기에 그도 공범일 거라고 의심한다. 물론 당사자가 죽었기 때문에 내사는 그대로 종료가 되지만, 조는 동료들에 의해 공범 혹은 동료 살해범으로 낙인 찍히고 만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카렌의 살인 사건 수사와 더불어 과거의 이야기가 중간 중간 등장해 밀도를 높여주는데, 작품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그 진상을 알게 된다. 그날 진짜 조가 선배를 죽였는지, 그가 비리와 관련이 있었는지,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에 대해서 말이다. 로버트 크레이스의 작품에서는 사건 수사 외에도 캐릭터들의 사연에 만만치 않은 비중이 있는데, 이번 작품 역시 덕분에 캐릭터들의 매력이 더 빠져들 수 있었다. 엘비스 콜가 여성판 조 파이크라고 말하는 여형사 사만다 돌런과의 공조 수사도 흥미롭고, 변호사로 일하다 지역 방송국의 법률분석가로 일하면서 최근에 엘비스와 함께 하기 위해 LA로 이사를 온 그의 연인 루시와의 관계도 극에 재미와 긴장감을 더해준다. 어쩌다 보니 이들 세 사람 사이에서 삼각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과거 조의 연인 카렌과의 관계와 선배와 관계, 그리고 그가 묻어둬야 했던 사랑이야기까지, 이 작품은 범죄 소설로서의 장점 외에도 매우 뛰어난 드라마를 구성하고 있다. 한마디로 600여 페이지가 지루할 틈 없이 흘러간다.
나는 차에 앉았지만 시동을 걸지는 않았다. 사건을 조사하는 건 인생살이와 비슷하다. 머리를 낮추고 있는 힘껏 쟁기를 끌며 나아갈 수 있지만 그러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세상은 더 이상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곳이 아니다. 갑자기, 우리가 만사를 보는 방식이 달라진다. 세상이 전에 거기에 있던 것들을 감추고는 다른 식으로는 보지 못했을 것들을 드러내면서 색깔을 바꾸기나 한 것처럼.
범죄 소설에서 캐릭터는 플롯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니, 사실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로버트 크레이스의 작품은 그야말로 기가 막히게 걸출한 두 명의 캐릭터를 탄생시켰으니, 웬만해서는 재미 없기란 쉽지 않은 시리즈가 되었다. 거기에 더해 탁월한 플롯과 구성, 담백한 문장과 속도감, 리얼한 경찰 수사 과정과 LA라는 도시에 대한 매혹적인 묘사까지 더해졌으니 뭐, 이 시리즈는 어떤 작품을 만나도 최고일 수밖에 없다.
엘비스 콜이라는 인물은 그 이름 때문에 어딜 가나 주목을 받는데, 거의 하루 종일 농담만 해대는 캐릭터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니까 시종일관 농담과 수작으로 일관하는 인물처럼 보이는데, 수사를 할 때는 또 완벽하다. 스스로 팩트 파악 분야에서는 최고 레벨이라고, 자신은 모든 걸 보고 모든 걸 듣는다고 말할 정도이다. 자칭 세계 최고의 탐정이라고 농담처럼 떠벌리지만, 그가 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어느 정도 수긍이 될 수밖에 없다고나 할까. 게다가 그는 눈에 띄는 여자에게는 항상 작업을 걸 정도로 타고난 바람둥이에다 멋쟁이이기도 하다. 남성적인 매력과 부드러운 매너로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거의 매번 고객과 감정적으로 얽히고 만다. 사랑에 빠지거나, 혹은 사랑을 받거나. 이번 작품에서는 고객이 아니라 수사 동료와 핑크빛 기류가 생기지만, 그럼에도 꿋꿋이 지조를 지킨다. 바람둥이처럼 보였지만 사실 자신의 여자가 있을 때는 그 관계에 최선을 다하는 순정남이기도 했던 거다. 그는 뛰어난 입담으로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시종일관 툭툭 던지는 재치 있고 천연덕스러운 농담을 던진다. 덕분에 복잡한 플롯과 무거운 스토리 속에서도 마치 잘 빠진 할리우드 영화에서처럼 독자들이 긴장을 풀고 다시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조 파이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든 그가 선글라스를 벗으면 그 깊고 파란 눈에 매혹되고 만다. 해병출신의 전직 경찰로 약자를 괴롭히는 놈들을 가장 증오한다. 어린 시절 알콜 중독자 아버지에 의해 어머니와 함께 하루가 멀다 하고 퍼부어지는 폭력에 시달려야 했고, 덕분에 정의를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부터 지켜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학대와 폭력으로 그의 유년기가 물들 동안 경찰도, 친구도, 이웃도, 그를 보호해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을 길렀고, 지금도 매일같이 체력을 단련한다. 그는 또한 절대 웃거나 미소를 띄지도 않는다. 어떤 감정도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는, 차갑고, 단단하고, 위험하고, 불가사의한 아웃사이더라고나 할까. 오로지 앞으로만 전진하고, 어떤 후회나 망설임도 내비치지 않기에, 악인에게 무자비하고 냉혹하다. 그는 가치 있는 일에는 희생을 아끼지 않는다. 아무리 위험한 일이라도 기꺼이 몸을 던지며, 일반적으로 법의 철칙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만의 엄격한 도덕과 윤리 강령이 있으며, 자신의 행동에 완벽하게 책임을 지려고 최선을 다한다.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침묵과 무뚝뚝함과 거칠어 보이는 외모 덕분에 다가서기 어렵게 보일 수도 있지만, 영혼의 비극적 결함 덕분에 쿨한 섹시가이로 느끼는 여자들이 더 많다.
L.A.레퀴엠은 엘비스 콜 시리즈 여덟 번째 작품으로, 로버트 크레이스 최고의 걸작으로 불린다. 국내에서는 무려 6년여 만에 만나게 되는 로버트 크레이스의 신작이다. 이 시리즈의 주인공은 엘비스 콜이다. 그리고 그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최고의 파트너로 등장하는 조 파이크는 이 작품 L.A.레퀴엠에서 거의 투톱의 주인공으로 활약하다 마침내 워치맨이라는 작품에서 단독 주인공으로 나서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후 퍼스트 룰과 센트리 등 조 파이크가 활약하는 작품들이 시리즈를 통해서 계속 선보이고 있다. 물론 모든 시리즈에서 두 캐릭터가 거의 항상 같이 등장하지만 말이다. 시종일관 농담을 툭툭 던지는 엘비스 콜과 항상 냉철하고 무뚝둑한 조 파이크는 동전의 양면처럼 외모도 성격도 너무도 다른 상반된 캐릭터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들에 대해 통일된 내면을 가진 일종의 이란성 쌍둥이라고 말한다. 다만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하나는 농담을, 하나는 쿨함을 선택했을 뿐이라고 말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잔인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엘비스 콜과 조 파이크라는 인물은 그 어떤 작품 속 캐릭터들보다도 더 현실적이고 개성 있으며, 인간미가 넘친다. 엘비스 콜의 농담 덕분에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데도 유머스럽고 경쾌하고, 거칠고 퉁명스럽지만 절대 미워할 수 없는 조 파이크 덕분에 스토리는 더욱 진지하고 깊어 진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문체도 속도감을 더해주어 장르의 재미를 살려주고, 그 와중에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느껴져 순간순간 뭉클해지기도 한다. 현재 이 시리즈는 올해 여름에 출간될 작품까지 모두 17편이다. 그 중 국내 출간작은 이번 작품까지 단 세 편. 물론 시리즈 외에 스탠드 얼론 두 작품이 있긴 하지만. 부디 버티고에서 이 시리즈는 계속 출간해주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