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밤
임선우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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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싱크홀 속 어둠만큼이나 내가 좋아하는 것은 싱크홀이 생겨났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인생을 뒤바꿀 만한 엄청난 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다. 싱크홀은 나에게 그 점을 암시해주었고, 이상하게도 위로가 되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중 싱크홀 저 아래에서 파바밧, 하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내려다보았지만 어둠뿐이었다.            - '만두 가게 앞에는 싱크홀이 있다', p.130


촉수에 닿으면 인간이고 동물이고 전부 해파리로 변하게 만들어 버리는 변종 해파리가 발견된다. 호주에서 처음 발견되었던 이 해파리는 빠르게 바다를 점령해 한 달 만에 전 세계 해양에서 발견된다. 한국 정부는 전국에 있는 해수욕장을 폐쇄하고 해안 경비를 강화했으며, 선박들은 예외 없이 출항이 금지되었다. 제아무리 변종 해파리라고 해도 물 밖에서 이동할 수는 없었으니, 그렇게 사람들은 육지에서 일상을 유지해나갔다. 그리고 한쪽에선 위기를 기회로 삼아 해파리가 되길 원하는 인간을 안전하게 변신시켜 바다로 보내주는 사업을 시작한다. 삶에서 미끄러져 나와 바다로 흘러가려는 사람들은 왜 자진해서 해파리가 되려고 하는 것일까.


유기견 보호소에서 데려온 열세 살의 영국코커스패니얼인 하지는 얼마 전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 언니가 자신이 입양한 개를 나에게 떠넘겨 버린 거라 의도적으로 정을 붙이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그 늙고 커다란 개가 조금은 그리워졌다. 하지가 떠난 뒤는 한동안 밖에 나가 걸을 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죽은 지 한 달 만에 하지가 집에 돌아왔다. 희뿌연 유령 개가 되어서. 유령 개가 되어 돌아온 하지는 가만히 앉아 있거나, 느릿느릿 걷거나, 데굴데굴 굴러다니기만 했다. 하지에게 뭘 해줘야 할지를 고민하다가, 나는 우선 산책부터 시도해 보기로 한다. 그렇게 나는 유령 개와 산책을 시작했고, 그렇게 느릿느릿 걷다가 때때로 멈춰 서며 목적지 없이 동네를 돌아다닌다. 오랜만에 하는 산책은 예상외로 무척 좋았지만, 문제는 하지가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탓에 내가 수상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나는 조금 민망하지만 뭐 어때 싶은 마음으로 하지와의 산책을 여유롭게 즐긴다. 그런데 하지는 왜 유령 개가 되어 나를 찾아온 것일까. 유령 개와 나의 산책은 계속 될 수 있을까. 




저는 어렸을 때 눈사람을 만들면 그 당시 싫어하던 사람 이름을 붙여줬어요. 힘들게 만들어놓고 왜 그랬대요. 유자가 말했다. 눈사람이 다 녹고 나면 미움도 녹아버리라고요. 저만의 미신 같은 거였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도 못하겠어요. 겨울 다 갈 때까지 눈덩이만 굴려야 할걸요. 가만히 듣고 있던 희재가 소리 내어 웃었다. 세 사람은 눈사람이 볕에 조금 더 녹을 때까지 도란거리다가 오후 네시에 가게 문을 닫고 각자의 길로 향했다.                 - '한겨울 따뜻한 실내에서', p.184~185


<유령의 마음으로>, <초록은 어디에나>, <0000>등의 작품으로 만나온 임선우 작가의 신작이다. 이 작품에는 바다 속에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환하고 아름다운 빛을 내는 해파리로 변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고, 이별 후 연인이 물이나 사물로 변해버리기도 하며, 나무를 접붙이듯 신체 일부를 타인과 교환해 성격, 기억 등을 공유하는 접인 수술이 성행하기도 한다. 직장내 괴롭힘으로 방안에 틀어박혀 있다 새로운 존재가 되기로 결심하며 안도하는 사람도 있고, 갑작스럽게 생긴 싱크홀의 어둠을 들여다보며 위로를 받기도 하고, 짝사랑하던 동네 친구를 떠나 보내기 힘들어 그의 물건을 훔치기로 마음먹기도 한다. 열세 살 늙은 개가 죽은 지 한 달 만에 유령 개가 되어 돌아와 주인과 다시 산책을 시작하기도 한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프랑스식 냄비 요리>였다. 권태기를 겪는 커플이 등장하는데, 함께 수영장에 다니던 어느 날 남자친구가 눈앞에서 녹아내린 것이다.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녹아버린 남자친구를 텀블러에 담았고, 푸딩 같은 질감이 찰랑거리는 액체가 되고, 완전히 말라붙어 사라지기 전에 그를 섭취하기로 한다. 남자친구는 자신을 빵으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하고, 나는 오랫동안 저장해두고 먹을 수 있는 빵인 슈톨렌으로 만들기로 한다. 연인이 물로 변해버렸다는 설정부터, 영원히 한 몸이 되기 위해 그걸 음식으로 만들어 먹는다니... 설정만 두고 보면 어쩐지 엽기적이거나 오싹하게 느껴지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방식은 또 전혀 그렇지가 않다. 임선우 작가의 상상력은 늘 파격적인데, 그것을 소재로 다루는 방식은 이상하게 귀엽고 다정해서 늘 마음이 가곤 했다. 이번 작품에서도 슬픔을 극복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며 상실의 빈자리를 사랑스럽게 채워준다. '영원히 따뜻하고도 한없이 다정해서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은' 이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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