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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안 사이코
버지니아 페이토 지음, 배지은 옮김 / 현대문학 / 2026년 6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언제든 원할 때면 이 아이들을 죽일 수 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 느낌이 참 재미있다. 무거운 돌덩이를 집어 아이들의 두개골을 내리찍을 수도 있고 계단에서 밀어버릴 수도 있다. 칼날에 묻은 버터를 면앞치마에 슥 닦아내듯 이 땅에서 매끄럽게 제거해버릴 수 있다. 참으로 매혹적이지 않은가. 인간은 원하는 대로 서로를 치명적으로 해칠 능력이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않기로 선택한다는 그 사실이. p.149
크리스마스를 세 달 앞두고, 거대한 엔저 저택에는 새 가정교사가 도착한다. 중세시대에 지어진 엔저 저택에서 위니프레드 노티가 할 일은 게으르고 버릇없는 두 아이에게 프랑스어와 바느질을 가르치고, 잠자리 이야기를 들려주고, 시간 엄수의 중요성이나 예의를 알려주는 것이다. 이 저택에는 그 동안 가정교사들이 꽤 많이 왔다가 그만두었다. 그 이유가 아이들 때문인지, 고용주인 파운즈 부부때문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세 달 안에 이 집 안 사람들은 모두 죽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겉모습만 보면 빅토리아 시대 숙녀다운 품위를 유지하는 가정교사처럼 보이지만, 사실 위니프레드 노티의 내면에는 오래 억눌려 있던 어둠이 있었다. 누구나 자기 안에 악마를 하나씩 가지고 있겠지만, 대부분 그걸 길들이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거리낌 없이 자신의 일그러진 욕망과 폭력적인 충동을 드러낸다. 상냥하게 히죽 웃으면서 머릿속으로는 끔찍한 상상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녀는 열여섯 살 때 처음으로 자신에게 두려움이란 감정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눈물은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여태껏 어떤 상황에서도 울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자신에게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 자신의 '장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두려움이 없기에 어떤 짓도 저지를 수 있으니까. 양심의 가책이나 타인의 시선에 대한 걱정따위는 해본 적이 없으니까. 현대적인 의미에서 완벽한 사이코패스라고 할 수 있겠다.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 사이코패스라니.... 작가는 대체 어떤 캐릭터를 창조해낸 것일까.

노동하는 남자와 여자들은 통속적인 싸구려 소설을 찾아 다닐 것이다. 내가 저지른 살인에 대한 섬뜩한 묘사는, 최악의 끝을 궁금해하는 집요한 병적 호기심의 소유자들을 달래줄 것이다. 동전 한 닢의 여유도 없는 어린 노동자들은 딱지 앉은 손으로 번 돈을 각출해 얇고 더러운 소책자를 사서 돌려가며 읽을 것이다. 골상학자들은 내가 귀족이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소녀들은 그들도 살인을 꿈꿀 수 있다는 걸, 살인이 남자들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걸 배우게 될 것이다. p.270
어떤 상황에서도 죄책감이나 도덕적 고뇌를 하지 않는 주인공의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라 쉽게 공감이나 이해를 하긴 어렵다. 그래서 분량이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잘 읽히지 않는 편이었는데, 또 생각해보면 독자들이 주인공에게 곡 감정이입을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싶기도 하다. 심리적으로 한 걸음 떨어져서 읽는다면 '불편한 이야기에서 야릇한 해방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장면들에서조차 유머러스한 독백을 툭툭 내뱉으며 분위기 전환을 시켜주는 것이 이 독특한 캐릭터의 매력을 한층 더해주는데,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광기로 가득찬 사악한 주인공 캐릭터였다.
클라이막스의 무시무시한 살인 장면은 그야말로 그로테스크했다. '화려한 발레 무대에서 몸을 휘두르고 팔다리를 뻗고 머리를 홱홱 돌리는 장면처럼' 연출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들의 내장이 한 줌의 장미 꽃잎처럼 허공으로 흩뿌려진다'는 지문에서 완벽한 광기가 느껴져서 오싹해졌다. 크리스마스 캐럴을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의 비명이 마치 교향곡의 경쾌한 합창처럼 울려 퍼지는 이 장면은 압도적인 여운을 남겨 준다. 이 작품을 원작으로 영화도 만들어져 칸 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했다는데, 영상화된 버전은 더 음산하고 오싹할 것 같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 버지니아 페이토는 ‘고딕 블랙코미디의 마녀’라고 불린다. 블랙코미디와 심리 스릴러를 결합한 이 작품은 그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면서도 유머러스하고, 긴장감 넘치는 서사를 차곡차곡 쌓아가다가 광기를 걷잡을 수 없이 터뜨려버린다. 이 작품은 악마가 건네는 일종의 크리스마스 파티 초대장이기도 하다. 대프니 듀 모리에, 셜리 잭슨,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작품을 좋아한다면 놓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