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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하세요 ㅣ 교유서가 시집 7
김박은경 지음 / 교유서가 / 2026년 5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느리게 당신을 반복해, 잘 알고 싶기 때문이야 더 연습하면 될까 모르겠어 어려워 그만두고 싶다고 말하면 계단식으로 점진적으로 조금씩 좋아질 거라고 구분조차 사라질 거라고 꼭대기에 오르면 이국의 말로 꿈까지 구게 될 거라고 하지 공부에는 명확한 목적이 필요하다는데 그게 뭐지 당신을 정확히 알게 되면 무엇이 달라질까 그때쯤이면 오직 나의 오직 나만의, 아름다운 소유격이 완성될까 - '소유격' 중에서, p.31
'교유서가 시집' 시리즈가 벌써 일곱 번째 작품이 나왔다. 김박은경 시인의 시집은 문학동네 시집 시리즈로 <못 속에는 못 속이는 이야기>를 만났던 기억이 있다.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시인의 시집이라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이번 시집은 '의심하세요'라는 제목부터 호기심이 들었는데, 시인은 "의심과 믿음은 어쩌면 같은 종족"이라고 말한다. 자기 확신같은 나에 대한 믿음도, 널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타인에 대한 믿음도 사실 견고해질 수 없는 감정들이다. 믿음과 의심 사이의 그 조그만 간격은 사실 종이의 앞뒷면과 같으니 말이다.

그거 아니면 죽을 것 같고, 그것을 위해 죽일 수도 있다고 믿었던 마음도 사소한 오해로 깨어질 수 있다. 믿는다고 정말이라고 하면서도 의심이 거미줄 치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한번 시작된 의심은 절대 돌이킬 수가 없고, 다시는 그 사실을 알았던 순간으로부터 되돌아갈 수가 없다. 연인들의 헤어짐도, 친구들과의 다툼도, 부부 간의 신뢰가 깨어지는 것도 모두 단 한순간이다. 의심은 오랜 세월 쌓아온 신뢰와 구축된 관계들을 차례차례 부식시켜 바닥에 이르게 만들고 만다. 그래서 아무런 의심 없이 선택한 믿음은 빛으로 지어진 누각처럼 투명하게 아름답지만, 언제든 추락할 수 있다. 하지만 가끔은 흔들림없이 확신하고 싶다. 어떤 일이 있어도 믿겠다고 선택한 나의 마음을 말이다. 시인은 '의심'이라는 방법으로 세상을 들여다보고, 죽음의 언어를 통해 삶을 바라본다.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말과/싫어하지는 않는다는 말은 다른가//
한 발은 집어넣고 한 발은 내놓은 사람처럼/끝이라면서 몇 번이고 비틀대는 인간처럼/엉킨 혀는 같은 자리를 헤매고 있어//
당신도 다르지 않다니/다르지 않다는 말은/같다는 말이니//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뭐라고 다짐해야 할지/뭐라고 고백해야 할지/뭐라고 사과해야 할지// - '목숨 같은 거' 중에서, p.82
교유서가 시집 시리즈는 소후에 시인의 <우주는 푸른 사과처럼 무사해>를 시작으로 원성은 시인의 <비극의 재료>, 리사 시인의 <우리의 슬픔은 전문적이고 아름다워>, 기혁 시인의 <소설책>에 이어 송하얀 시인의 <그 책은 내 빈 심장에 끼워둘게>, 송하얀 시인의 <그 책은 내 빈 심장에 끼워둘게>, 추성은 시인의 <접시 위에는 잘 차려진 비밀이> 꾸준히 새로운 시들을 선보여왔다. 표지 빛깔에 맞는 컬러로 내지에 그라데이션을 줘서 더 아름다운 시집인데, 심플한 이미지의 표지를 펼치면 만날 수 있는 내지의 은은한 색감이 정말 예뻐서 차곡차곡 모으고 있다.

시집을 읽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어떤 시집은 서사로, 어떤 시집은 분위기로, 또 어떤 시집은 문장으로 읽게 된다. 이번 시집은 유독 밑줄 긋고 싶은 문장들이 많았다. '기울어진 세계를 지탱하는 것은 가장 약해진 부분 그것은 가장 찬란했던 것', '조심할수록 이상해지는데 조심해도 다칠 수 있다', '되풀이되는 불운이야말로 돌을 바로 놓고 싶어하는 악착같은 숨 아닐까', '믿음엔 의심이 있어야 하는데 의심은 왼손잡이 같은 것', '다들 제 속의 것으로 버틴다', '게임이니까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 목숨 같은 거 걸지 마 알잖아', '털실이 심장에 온기를 주듯 애쓰는 다정이 다정을 부추기고 절뚝이는 무엇이 마침내 도착했을까' 등 좋은 문장들이 많아 음미하며 천천히 읽었다. 어둡지만 다정하고, 서늘하지만 달콤한 문장들이 페이지를 덮어도 사라지지 않는 감각으로 남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