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릿 플레이스 더블린 살인수사과 시리즈
타나 프렌치 지음, 고정아 옮김 / 엘릭시르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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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상한 사과주 느낌을 풍긴다는 사실, 마셔도 좋을 투명한 황금빛 공기, 깨끗한 얼굴들, 행복한 수다의 물결, 나는 그 모든 것이 좋았다. 아주 좋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이것을 꽁꽁 감추고 있었다. 비뚤어진 한 가지 사례만이 아니고 일부만도 아닌 모든 것이. 어쩌면 대부분이 헛소리일지 모른다는 생각 또는 희망이 들었다. 지루한 여학생들의 장난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똑같이 나쁘다고 여겼다고 다시 그렇지 않다고 생각을 바꿨다. "이것들 중 사실이 얼마나 될까요?"            p.101

 

푸르른 교외에 위치한 세인트킬다 칼리지는 사립 여자 중고등 통합학교로 수녀들이 운영했다. 주로 부유한 집안의 자녀들이 다니는 킬다의 교정 뒤편에 있는 작은 숲에서 수녀 두 명이 아침 산책을 하다가 누워 있는 한 소년을 발견한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개의 높은 담장으로 가로막힌 남학교의 학생이었다. 전날 밤에 누가 그의 머리를 박살 냈다.  소년의 아버지는 은행 간부에 엄청난 부자였고, 미성년자가 희생된 사건이라 고층 건물을 몇 채나 지을 만큼의 인력이 투입되었지만, 용의자도 없었고, 왜 그가 그곳에서 발견되었는지 이유도 오리무중이었다. 그렇게 사건은 미제로 종결되었고, 그로부터 1년 뒤 킬다의 익명 게시판에 소년의 사진과 함께 '난 누가 그 애를 죽였는지 알아'라는 메시지가 발견된다.

 

사건의 담당 형사였던 콘웨이와 제보를 받았던 스티븐 모런이 살인 사건을 재수사하기 시작한다. 미제사건수사과 소속인 스티븐 모런은 이 사건에서 어떤 역할을 해내서 살인수사과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래서 1년 전 해당 사건의 담당 형사였던 콘웨이에게 수사에 참여하고 싶다고 말한다. 살인 수사관에서 외톨이였던 콘웨이였기에, 스티븐 모런이 도와준다고 해서 손해볼 건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사건이 일어났던 여학교로 향한다.

 

 

작은 언덕 위 사이프러스나무 빈터에 달빛이 무엇에도 걸리는 일 없이 가득 쏟아졌다. 그들 셋이 서로 어깨를 대고 기대앉아서 까딱이는 이삭들 틈에 다리를 뻗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언뜻 머리 셋 달린 동물 같아서 나는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그들은 오래된 동상처럼 조용하고 매끈하고 하얗고 무표정했다. 우리를 바라보는 심연 같은 세 쌍의 눈. 우리는 웃음을 멈추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히아신스 향기가 물결처럼 흘러 위로 올라왔다. 설리나와 어깨 한쪽을 맞댄 리베카. 머리는 풀려 있고 몸 전체가 환영 같은 흑백 얼룩이었다. 눈만 한 번 깜박하면 풀밭 위의 달빛으로 변할 것처럼.            p.642

 

'그 애는 멋있는 애였어요. 잘 생겼고, 못하는 게 없었어요. 모든 사람의 눈에 띄는 아이였어요. 모두가 그애를 좋아했어요. 절대로 살인을 당할 것 같지 않은 아이였어요. 착한 애였어요. 내 휴대폰 수리를 도와줬거든요. 그애는 못된 애였어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땐 다정하지 않았거든요.' 이 모든 상반된 이야기들이 모두 한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이 흥미롭다. 크리스를 좋은 아이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고, 못된 아이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가끔 크리스의 유령을 본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대체 크리스는 생전에 어떤 아이였고, 이들과 무슨 관계였던 것일까.

 

이야기는 사건을 수사하는 현재와 크리스가 죽기 팔 개월 전부터의 과거가 교차로 진행된다. 타나 프렌치가 인물을 묘사하는 방식은 지나칠 정도로 디테일하고 섬세해서 미스터리로서의 속도감 있는 서사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려 750페이지를 넘는 두툼한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는 갈수록 느려지지만, 그래서 완독하는 데 어느 정도의 인내심이 필요하지만, 이상하게도 몰입감은 점점 더해져 간다. 게다가 타나 프렌치는 이 긴 이야기 속에 담긴 놀라운 통찰력으로 서스펜스를 만들어 내고, 겹겹이 쌓여 있는 비밀과 거짓말의 실체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한다. 아름답고 우아한 문장으로 예민하고, 복잡한 십대 여학생들의 정서와 심리를 손에 잡힐 듯 그려내는 솜씨 또한 대단하다.

 

 

이 작품은 타나 프렌치의 '더블린 살인수사과 시리즈' 신작이다. 아일랜드의 추리 소설 작가 타나 프렌치의 작품은 오래 전에 <살인의 숲>으로 처음 만났다. 작가는 이 데뷔작으로 에드거상, 배리상 등 세계 추리 문학상의 신인상을 휩쓸며 돌풍을 일으켰다. 국내에는 2010년에 출간되었는데, 당시에 아주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 그 이후로 다른 작품들이 소개되지 않아 아쉬웠었다. 그러다 엘릭시르를 통해서 꾸준히 <페이스풀 플레이스>, <브로큰 하버>가 출간되어 반가운 마음에 나올 때마다 구매했는데, 페이지 수도 많은데다 천천히 읽어야 하는 작품들이라 정작 완독하지 못한 채 미뤄 두고 말았다.

 

이번에 나온 신간 <시크릿 플레이스>는 시리즈 중에 꼭 읽어 보고 싶었던 작품이라 더 미루지 않고 먼저 읽어 보기로 했다. 다행히 이 시리즈는 한 명의 주인공으로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작의 주인공이 다른 작품에서 보조 인물로 출연하는 식으로 각 작품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어, 순서대로 읽을 필요가 없다. 타나 프렌치의 작품들은 섬세한 심리 묘사와 아름다운 문장으로도 유명하다. 이번 작품 역시 그러한데 포스트잇 플래그와 밑줄로 안 그래도 느린 책 읽는 속도를 더 느리게 만들어 주지만, 그렇게 천천히 느리게 읽어서 더 재미있는 작품이기도 했다. 타나 프렌치의 '더블린 살인수사과 시리즈'는 <시크릿 플레이스> 바로 다음 작품인 <침략자 The Trespasser>까지 총 6권이 출간되어 있다. 다음 작품도 엘릭시르에서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거짓말로 범벅이 되어 있는 사건, 여덟 명의 목격자이자 용의자인 소녀들, 사건의 중심에 있는 경찰의 딸, 수상한 느낌으로 가득차 있는 학교에서 밝혀질 사건의 진상이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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