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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필적 맥베스
하야세 고 지음, 이희정 옮김 / ㈜소미미디어 / 2023년 5월
평점 :
"얌전히 죽어줄 생각도 없고 못 다한 일도 있어서요."
바닥에서 천장까지 이어진 창문에 비친 내 겉모습은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여행을 하는 중이라고 새삼 깨달았다. 나는 카이저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잠시 침묵에 몸을 맡겼다.
"역시 당신은 제가 처음 느낀 인상 그대로군요. 허풍선이도 아니고 겁쟁이도 아니고, 관심 없다는 얼굴로 필요하면 무너져가는 돌다리를 최대한 조심하며 건너려는 사람이에요." p.235
IT 기업에서 근무하는 나카이 유이치는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교통 IC카드를 판매하는 일을 한다. 고등학교 친구이자 직장 동료인 반 고스케와 함께 방콕에서 큰 계약을 성사시키고 귀국하는 중에 공항 측의 문제로 마카오국제공항으로 회항을 하게 된다. 마카오에서 홍콩까지 가는 티켓을 받고 시간이 남아 카지노에 들른다. 그곳에서 꽤 많은 돈을 따고 호텔로 들어가는 길에 마사지를 권하는 여성과 저녁을 먹게 되는데, 그녀는 밥을 사준 답례로 미래를 알려주겠다고 제안한다. "당신은 왕이 돼서 여행을 떠날 거야... 당신이 여행을 할 힘이 있든 없든, 당신 의지와는 상관없이 왕이 돼서 여행을 해야 해." 라는 여자의 말은 다소 뜬금없게 느껴졌지만, 마치 그 말이 예언이라도 된 것처럼 다음 날 본사의 연락을 받게 된다.
그 후 나카이는 홍콩의 자회사 CEO로 임명되어 도쿄를 떠나 홍콩으로 가게 되는데, 그곳은 본사의 자금 세탁을 위한 유령회사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나카이에게는 거절을 할 명목도,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위태로운 회사의 왕이 되어 홍콩에서 일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고등학교 시절 짝사랑했던 나베시마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그 즈음 나카이는 자신이 오기 전에 자회사로 발령받았던 직원들이 실종되거나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결국 자신의 처지도 실종 혹은 죽음으로 예정되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는 도망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을 죽이려는 기업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맥베스가 되고 만 그는 비극적인 운명을 피할 수 있을까. 홍콩을 중심으로 마카오, 방콕, 사이공 등 동남아시아를 돌아다니는 나카이의 여행은 다양한 인물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아슬아슬하게 끝을 향해 달린다.
반이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아마도 나베시마 후유카가 바로 레이디 맥베스라는 것이다. 나는 마카오타워를 등지고 번화가로 돌아가는 길을 걸으며 벚꽃색으로 칠해진 중학교를 올려다보았다. 사람은 누구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을 20년씩 끌어안고 살아 갈까. 그리고 그 사랑에 도착했을 때는 어떤 기분일까. 그것은 꼭 처음 두세 페이지밖에 읽지 않은 책같다. 이야기는 문이 닫혀 있는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어딘가에서 그 이야기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수 있다면 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다.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던 내가 이미 죽었다 하더라도. p.484~485
하야세 고는 1992년 데뷔작 이후로 22년 만에 이 작품을 발표했다. 22년 동안 다 두 작품만을 썼다니, 자타가 인정하는 독보적인 과작 작가인 하라 료보다도 더한 작가다. 국내에는 이번 작품으로 처음 소개가 되는데, 이 작품을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다음 작품을 만나려면 또 얼마나 긴 세월이 흘러야 할지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미필적 맥베스>는 제목에서도 느껴지듯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를 모티프로 했다. 기존에 셰익스피어의 이야기를 재해석했던 여타의 작품들에서는 주인공 맥베스가 악인이면서도 공포와 더불어 공감을 자아내는 캐릭터로 그려졌었다면, 이 작품의 주인공 나카이 유이치는 하나로 정의하기 힘든 다층적인 인물로 독특한 색깔을 보여준다.
6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의 이야기지만 오랜만에 묵직한 하드보일드 작품을 만나 시간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어 읽었다. 그만큼 밀도가 높고, 서사가 탄탄하며, 캐릭터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작품이다. 냉혹한 사회의 모습을 불필요한 수식 없이 날 것 그대로 묘사하는 하드보일드 특유의 정서와 함께 IT 기업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암투와 모략으로 경제소설로서의 재미도 있고, 수십 년에 걸쳐 이어지는 연애소설의 애절함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야기가 2000년대 말, 홍콩을 중심으로 마카오, 대만,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배경으로 펼쳐지기 때문에 이국적인 풍경을 즐길 수 있다는 것도 이 작품만의 특별한 매력이다. 아사히신문에서 '살면서 이렇게 멋진 소설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는 평을 했다고 하는데,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수긍이 될 것이다. 제대로 된 하드보일드를 만나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적극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