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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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 집은 뭐가 문제예요?" 목소리가 울먹이며 날카롭게 쇳소리로 나왔다.
"다 괜찮아, 아가! 무슨 말이니?"
엘스퍼스는 당혹스러워 고개를 푹 숙였다.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아버린 느낌이었다. 순간 엄마도 안다는 걸 알아버린 것이다. 이 집과 이 아침의 시간은 어딘가 통째로 잘못되어 있었다. 느끼고 듣고 맛보고 냄새도 맡을 수 있는 불편한 무언가가 있었다. 눈으로 볼 수 없을 뿐이었다.                - '공 튕기기 세계 챔피언' 중에서, p.127

 

제럴딘은 클로로포름 병을 들고 밤새 술 마시고 새벽에 들어와 자고 있는 남편에게 다가간다. 병뚜껑을 열고 작은 헝겊을 흠뻑 적신 뒤 천천히 남편의 코 쪽으로 다가간다. 남편의 맥박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낡고 검은 여행 가방을 들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집을 나온다. 버스에 타고 낯선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 안전하고 강해진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생각한다. 누군가 관심을 보이며 그녀에게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느냐고 묻는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말해주겠다고. 남편은 그녀를 함부로 대했고,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했으며, 그녀의 모든 행동을 트집잡고, 미워했다. 남편으로부터 멀리 도망치고 싶었던 그녀는 낯선 도시에 도착해 새로운 장소로 향하지만, 그곳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우연히 만난다. 그리고 너무 행복해서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던 그녀의 마음은 순식간에 불길한 분위기에 잠식당하게 되고, 끝도 없는 나락으로 추락한다. 이 이야기는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 중 <모빌 항구에 배들이 들어오면>이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작품들은 불안과 강박, 공포와 서스펜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비어져 나오는 어두운 상상력으로 버무려져 있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불길한 분위기가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를 빠르게 해주곤 한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 중 <영웅>이라는 이야기는 시종일관 불안하던 주인공의 강박적인 행동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는 걸 그리고 있다. 입주 가정교사로 새로운 집에 들어가게 된 루실은 불안한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쓰고 있다. 정신질환을 겪다가 삼 주 전에 돌아가신 엄마로부터 자신도 비슷한 병력을 물려받았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불안은 급기야 아이들에게 뭔가 위험하고 끔찍한 일이 일어나서 자신의 용기와 헌신을 입증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고, 결국 그것을 직접 행동으로 하게 되는데... 마지막 장면이 정말 오싹한 작품이었다.

 

 

 

오후에 한번 문득 위층의 방과 그녀 자신의 관계가 생각났는데, 그러자 길 잃은 막막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소유물, 관습적 의무, 고독의 순간 들과 멀어진 사람은 어디에 있게 되는 걸까? 어떤 존재가 되는 걸까? 그녀는 홀퍼트 부인의 팔걸이의자에 앉아서 반쯤 졸고 반쯤은 이상하게 정신을 바짝 차린 상태로 고민했다. 우주에서 떠다니는 티끌이 된 듯 기묘하지만 그리 불쾌하지 않은 감각이었다. 낯선 자유와 이동성에 힘입어 그녀는 자신이 사물을, 그 시야를, 심지어 사물의 향유를 증폭하는 느낌이 들었다.            - '루이자를 위한 초인종' 중에서, p.209

 

이 작품집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출간된, 국내 초역작이다. 그녀의 단편소설들은 여러 차례 출간되었지만, 청년 시절에 쓴 심리소설들만을 모아 선보이는 기획은 이번이 처음이라 더욱 의미가 있다. 하이스미스가 1936년부터 1949년까지 집필한 작품들로 오 헨리 상을 수상한 <영웅>을 비롯해 <세인트 포더링게이 수녀원의 전설>, <공 튕기기 세계 챔피언> 등 이번에 처음 출간되는 작품들도 많이 수록되어 있다. <리플리> 시리즈를 비롯해서 <열차 안의 낯선 자들>, <캐롤>, 아내를 죽였습니까>, <올빼미의 울음>, <유리 감옥> 등 국내에도 하이스미스의 작품들이 꽤 많이 소개되어 있다.

 

하이스미스의 작품들 중 스무 편 이상이 영화의 원작 소설로 쓰였는데, 알프레도 히치콕, 르네 클레망, 토드 헤인즈와 같은 거장들이 그녀의 작품을 영화화했다. 그래서 소설보다는 영화로 먼저 하이스미스의 작품들을 만나본 경우도 많을 것 같다. 영화도 참 좋았지만, 그녀의 진짜 매력은 바로 소설 속에서 더 빛이 나는 것 같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과 어머니의 무관심으로 외로운 유년기를 보냈던 걸로 알려진 그녀는 사람들을 극도로 싫어해서 어울리기를 꺼렸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심리와 본질에 대해서는 비상한 감각을 갖게 되었고,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불안과 갈등과 예민함을 작품을 통해서 토해내게 된 것이다. 덕분에 그녀의 작품들은 어두운 내면과 감정의 심연을 섬세하고, 디테일하게 잘 다루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작품집에 수록된 초기 소설 열 여섯 편에도 그러한 하이스미스의 독특한 매력들이 고스란히 잘 드러나 있다. 평범한 일상의 풍경을 위협하는 불길한 분위기가 읽는 이들을 홀린 듯 이야기 속에 빠져들게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영혼을 잠식하는 어두운 상상력의 끝이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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