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 피플 JGB 걸작선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지음, 조호근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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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우리 목표물은 계급 구조인 거로군요. 보편적인 현상 아닙니까. 미국에서도, 러시아에서도……?”
“물론이죠. 하지만 계급 구조가 정치적인 통제 수단으로 사용되는 곳은 여기뿐이에요. 그 실제 목적은 프롤레타리아를 억압하는 게 아니라 중산층을 억제해서 얌전히 굴종하게 만드는 거고요... 이곳 사람들은 중산층의 꿈이라는 강렬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어요. 삶의 목적이 그거죠. 자유주의적인 교육, 시민의 도리, 법규 준수 따위요. 자기네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사로잡혀서 빈곤에 허덕이고 있는 거예요.”      p.140~141

 

심리학자인 데이비드 마컴은 아내와 함께 플로리다에서 열리는 산업심리학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공항으로 떠나려던 참이었다. 공항에 문제가 생겨서 비행기가 전부 지연됐다는 연락을 받고,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공항의 2번 터미널에 폭탄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화면에 떠오른 잔혹한 영상들 위로 세 명이 사망했고, 스물여섯 명이 부상을 입었다는 자막이 나온다. 그리고 폭발의 충격으로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승객들과 경찰과 공항 보안 요원들 사이로 눈에 익은 한 여자가 보인다. 아무래도 그녀가 전부인인 로라같다고 생각한 그들은 직접 확인하기 위해 공항 근처의 병원으로 향한다. 결국 주동자는 물론이고 범행 성명조차 없는 이 테러로 로라는 죽음을 맞이하고, 데이비드는 죽음의 무작위성에 충격을 받는다.

 

과거에 노면전차 사고로 인해 다리가 불편한 상태로 살아야 하는 데이비드의 현재 부인 샐리는 그에게 로라의 죽음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어내, 범인을 알아내길 바란다. 그는 샐리를 위해서라도 공항 폭탄 테러의 진실을 알아내겠다고 생각하고,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고군분투한다. 그러다 런던의 호화로운 동네인 첼시마리나로 향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마침내 사건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중산층의 계급투쟁, 혁명의 불길, 20세기를 전복시키려는 급진적인 사상 등이 주요 스토리의 소재이지만, 생각보다 어둡거나 무겁지만은 않다. 뒤틀린 군상들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과격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이고, 당혹스러울 정도로 허무하기도 하며, 놀라울 정도로 날카롭고 예리하기도 하다. 그리고 겉보기에는 제정신인 사람들이 얼마나 괴팍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어, 살짝 정신이 나간 사람들 틈에서 길을 잃어 버리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으며 읽어야 하는 독특한 경험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렇습니다. 그곳의 수많은 죽음은 무의미하고 불가해한 것이었지만, 어쩌면 바로 그게 요지일지도 모르니까요. 동기 없는 행동은 우주의 움직임을 궤도 위에서 멈추게 합니다. 제가 당신을 죽이려 들면, 그건 여느 부랑자 범죄나 다를 바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당신을 실수로, 또는 아무 의미도 없이 죽이면, 당신의 죽음은 단 하나뿐인 중요성을 획득하는 거지요. 우리는 세계를 제정신인 곳으로 인식하기 위해 동기에 매달리고, 인과관계에 의존합니다. 그런 지지대를 전부 걷어차 버리면 무의미한 행동이야말로 진정 의미가 있는 유일한 행동임을 깨닫게 돼요. 저도 깨닫기까지 한참 걸리기는 했지만, 당신의 ‘죽음’이야말로 제가 기다리던 청신호였던 셈이지요.”      p.416~417

 

<헬로 아메리카>, <콘크리트의 섬>에 이은 'JGB 걸작선' 그 세 번째 작품이다. 이 시리즈는  2009년 타계한 밸러드의 10주기를 기리며 2019년부터 시작되었다. 세계문학 단편선을 통해서만 만났던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만나고 싶다면 이 작품들을 놓치지 말아야할 것이다. 단편소설들에 비해 'JGB 걸작선'으로 소개되는 작품들은 좀 더 진전된 주제와 작가로서의 자신을 해방시킨 듯한 ‘밸러드풍Ballardian’ 장편소설들이다. <콜린스 영어사전>에 따르면 ‘밸러드풍’은 ‘J. G. 밸러드의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에서 묘사된 환경―특별히 디스토피아적인 현대성, 암울한 인공 경관, 기술적이고 사회적 혹은 환경적 발전의 심리적인 효과―과 유사하거나 연상시키는’이라고 한다.  '지극히 밸러드스러운'이야기들을 일컫는 문학적 특수성이 형용사로 탄생해 사전에 등재되었을 정도이니 작가로서의 위상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J.G.밸러드는 단편집 후기에서 'SF에서 선호하는 만들어진 미래가 아니라, 다가오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진짜 미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미래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지뢰가 가득 깔려서 전진하는 사람의 발목을 언제라도 물어뜯을 채비를 마친, 진입하기에 극도로 위험한 영역'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이 여타의 SF소설이나 디스토피아 문학들과는 다른 지점에 있는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20년 전에 쓰인 소설 속 런던의 모습 속에서 2022년 현재의 우리 모습이 엿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특히나 이 책에는 작가 겸 영화감독 이언 싱클레어의 <해제>와 밸러드의 촌철살인이 돋보이는 저널리스트 배너라 베넷과의 「인터뷰>, 작가 트래비스 엘버러가 정리한 <전기적 약력>, 잡지에 게재된 단편소설을 비롯해 밸러드의 저작을 총망라한 <작품 목록>을 수록하고 있어 풍성한 읽을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21세기의 예언자’라 불리는 밸러드의 명성을 제대로 확인해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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