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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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직업에는 거짓말이 필요하고, 이쪽이 알고 싶은 정보를 갖고 있는 인물을 교묘하게 속여서 말하게 하는 것도 스킬 중 하나다. 머리로는 잘 알면서도 나는 종종 스스로 거짓말을 폭로해 버린다.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 없기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상대의 분노를 능숙하게 받지도 못한다. 어느 쪽이든 요령이 나쁘다고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p.116

 

미야베 미유키가 유일하게 시리즈로 구축해온 탐정 캐릭터인 스기무라 사부로는 평범하고 이렇다할 장점도 없지만, 일상생활은 안정되어 있어 안락하고 행복한 인물이다. 그래서 시리즈 제목도 '행복한 탐정 시리즈'이고 말이다.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인 <누군가>는 2003년 작이었다. 재벌가의 딸과 결혼 후 장인의 회사에 들어가 사내보를 만드는 편집자로 일하는 소심하고 겁이 많은 남자로 등장했던 그는 2006년 작인 두 번째 <이름없는 독>에서는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연쇄 무차별 독극물 살인사건 속으로 깊숙이 발을 내딛게 된다. 그리고 무려 무려 7년이나 지나서 나온 시리즈 세 번째 작품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에서 결혼 10년차였던 스기무라 사부로는 아내의 불륜과 이혼으로 회사를 퇴사를 하고, 네 번째 작품인 <희망장>에서 드디어 탐정 사무소를 개업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작품인 이번 신작에서 마침내 제대로 된 프로 탐정으로 활약하게 된다.

 

이번에 스기무라를 찾아온 의뢰인은 50대 후반의 품위 있는 부인이다. 딸이 자살 미수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한 달이 넘도록 한 번도 딸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왜 딸이 자살을 하려고 한 건지도 모르겠고, 전화도 문자도 소용이 없고, 딸이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전혀 알 수가 없어서 스기무라를 찾아온 것이다. 딸의 남편은 자살 미수의 원인이 장모에게 있다면서, 면회를 하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무엇을 물어도 사위가 그렇게 우기며 전화로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있어서, 전혀 대화가 안 되는 상태였던 것이다. 대체 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사위는 왜 가족의 접근을 차단한 채 부자연스러운 거짓말을 되풀이하며 아내를 숨기는 것일까. 가족간의 갈등에 원인이 있는 것처럼 보였던 이 사건의 이면에는 생각보다 더 끔찍하게 사회에 뿌리 깊게 숨겨져 있던 어둠이 있었다. 선배의 뜻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체육계 특유의 폐쇄적이고 위계적인 조직문화가 만들어내는 인간관계가 어떤 식으로 무시무시한 악이 되어 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 <절대 영도>에서 스기무라는 시리즈 사상 가장 비열한 악인들과 직면하게 된다.

 

 

누구의 말이었을까. 나는 떠올렸다. 사람은 모두가 혼자서 배를 저어 시간의 강을 나아가고 있다. 따라서 미래는 항상 등 뒤에 있고 보이는 것은 과거뿐이다. 강가의 풍경은 멀어지면 자연히 시야에서 사라져 간다.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 것은, 눈에 보이는 무언가가 아니라 마음에 새겨져 있는 무언가라고.    p.301

 

이 책에는 세 가지 에피소드가 수록되어 있는데, 첫 작품인 <절대 영도>가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었다면, 나머지 두 작품 <화촉>과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는 '행복한 탐정 시리즈'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한 소소한 일상의 미스터리를 다루고 있다. 스기무라의 사무소에는 손님이라곤 전혀 없었고, 광고지조차 들어 있지 않은 텅 빈 우편함과 부재중 전화도 메일도 오지 않는 나날이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서 앉아 있던 스기무라는 사무소와 연결된 주인집 다케나카 부인의 부탁을 받게 된다. 지인의 조카가 결혼식을 하게 되었는데, 거기에 함께 가달라는 거였다. 단순한 결혼식 참석처럼 보였으나, 이 결혼식을 둘러싸고 있는 복잡미묘한 가족들간의 사정과 결혼식 당일에 벌어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또 한번 스기무라를 사건 깊숙이 끌고 들어가게 된다. 표제작이자 마지막 수록작인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에 등장하는 의뢰인과 사건은 너무 쉽게, 허무할 정도로 결말이 나버렸는데 역시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반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뒤에 남은 이야기가 가슴 아픈 비극이지만 너무도 현실에서 벌어질 법한 일이기도 해서 더 여운을 남겨주었다고 할까. 마지막 장면에서 푸른 하늘 아래, 사립탐정의 모습을 한 돌이 되어 그저 우두커니 서 있던 스기무라의 모습과 그를 바라보던 다테시나 경위가 "당신도 정신 바싹 차리고 힘내요, 탐정님."이라고 말하는 순간이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을 더해주기도 했다.

 

미야베 미유키는 '스기무라 사부로' 시리즈의 소소한 사건을 해결하는 평범한 탐정을 떠올리게 된 계기를 마이클 르윈의 '앨버트 샘슨' 시리즈가 너무 좋아서, 그런 느긋하고 사람 좋은 사립탐정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가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앨버트 샘슨 시리즈는 <인디애나 블루스>와 <침묵의 세일즈맨> 두 권이 국내에 출간되어 있다) 탐정 소설에 흔히 나오는 명석한 탐정이 아니라, 가족의 실종 같은 평범한 사건을 다루는 서민의 탐정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스기무라 사부로가 다루는 사건들이란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내, 교우관계, 회사에서 꼬여버린 인간관계로부터 태어난 악의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스기무라는 탐정으로서 그다지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고, 그저 불운하게 사건에 잘 휘말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장점은 타인에 대한 예의와 정직함, 그리고 지혜로움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인칭으로 진행되는 이 시리즈 전체의 장점이기도 하다. 앞으로 더 탐정다운 모습을 보여줄 스기무라 사부로의 성장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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