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말들
천경우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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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주로 ‘과거’ ‘기억’으로 이야기되지만 사실은 과거를 담은 ‘현재’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기억은 미래를 향해 지속적으로 변화될 준비를 하고 있다. 학교에서 배워온 사진의 전통적 방식, 순간을 최대 속도로 잡아내고 대상과의 일방적인 관계 맺기에 대한 나의 회의가 한계치에 다다랐을 때였다. 스튜디오 안에서 대상이 되는 인물들간의 교감으로 일어나는 미세한 기운들, 우리가 모르던 감각들을 깨우는 사진을 통한 이 경험들이 과정만을 드러내는 퍼포먼스의 발단으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이것이 나로 하여금 사진이 없는 확장된 사진, 비로소 시간의 양quantity이 아닌 시간의 질quality에 대한 필연적 구상들을 시작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p.189~192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서 버리고 싶거나 타인에게 주고 싶은 물건 하나를 가져오십시오." 인도 뭄바이의 기차역에서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요청한 질문이다. 익명의 여행자들을 참여자이자 조력자로 초대해 완성하게 된 공동작품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물건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주인을 떠난 수백 개의 때 묻은 사물들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 '타인에게 하고 싶었던 질문들, 하지만 할 수 없었던 질문들'을 여러 나라 100명의 참가자들로부터 모아 전시하기도 한다. 당신이 오늘을 잃는다면 미래를 잊게 될까요? 당신은 오늘 하루 한 번 이상의 거짓말을 하였습니까? 질문은 반드시 답을 필요로 할까요? 당신은 벙어리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습니까? 지금 울고 싶나요? 누군가의 물건을 훔쳐본 적이 있습니까? 당신의 삶이 오늘 끝난다면 그것에 동의하겠습니까? 등등 생각에 잠기게 하는 질문도 있었고, 바로 대답이 나오는 질문도 있었고 다양했다. 저자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질문의 내용도, 그에 대한 대답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누군가와의 만남이자 대답할 때의 나를 지각하는 시간 그 자체라고 말이다.

 

이 책은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해온 사진작가이자 공공미술가 천경우, 그의 지난 20여 년간 퍼포먼스 프로젝트를 기록한 첫 에세이집이다. 인도 뭄바이의 기차역, 스페인의 작은 섬마을, 프랑스 교외 지역, 런던올림픽 현장, 뉴욕 타임스 스퀘어, 중국 허난성의 시골 마을, 서울 한복판 을지로, 경남과 전북의 사찰 등 전 세계 곳곳의 전혀 다른 별개의 공간을 무대로 그곳의 사람들에게 하나의 질문(요청)을 던진 후, 그들이 질문에 반응하여 어떤 경험과 조우하는지를 '예술적 중계자'로서 제안하고 지켜본다. 이 책은 그러한 작품들의 준비, 진행 과정에서의 다양한 에피소드, 참여자들과의 시간 그리고 그 후의 기억에 이르기까지, 그간 꺼내놓을 기회가 없었던 퍼포먼스의 여정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 '작가 노트'이기도 해서 더욱 흥미로웠다.

 

 

사진을 촬영하는 일은 돌이켜보면 온통 모순투성이이다. 카메라 뒤에서 셔터를 누르는 그 순간은 작가가 정작 보지도 못한 순간이며 필름 카메라 안에 맺힌 상은 늘 거꾸로이다. 대상의 방향도 반대이지만 음과 양도 반대여서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형상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다. 별반 다르지 않은 우리의 눈 역시 실제로는 대상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그저 조그만 뇌에서 균형을 잡는 훈련에 익숙해 있을 뿐임을 되새겨보면 가끔 눈이 잘 안 보이는 무력감에 대해 위안을 받기도 한다. 어쩌면 이 시대에는 모든 것을 선명히 볼 수 없음이 다행인지도 모른다.    p.253

 

이 책에 수록된 익명의 수많은 참여자들과 함께한 소셜 퍼포먼스들은 굉장히 낯설었지만, 그만큼 호기심을 자극했다. 파리의 환경미화원들에게 일과를 마친 후 자신이 새벽 거리에서 청소를 하면서 떠올리는 '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을 연필로 도화지에 그려달라고 하거나, 스페인에서는 스카프 크기의 보자기를 만들어 "당신이 생각하는 고통의 무게만큼의 돌알 모아 보자기에 담아주십시오"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 과연 고통의 무게를 측정할 수 있을까. 암스테르담에서는 참가자들에게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의 이름을 1분 동안 떠오르는 대로 벽면에 적어주십시오"라는 요청을 했고, 이 퍼포먼스는 6일간 이루어졌다. 인도의 고아에서는 긴 테이블에 서로 알지 못하는 참가자들을 앉혀 놓고 '테이블에 놓인 음식들을 자신이 좋아하는 순서와 선택으로 앞에 앉은 상대에게 먹여줄 것'이라는 지침을 알려 준다. 한 사람이 먹는 음식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낸다고 하니, 이 퍼포먼스는 결과보다 과정이 더 궁금해지는 작업이었다.

 

이러한 퍼포먼스들에 대한 과정과 완성된 작품들이 모두 글과 사진으로 수록되어 있어, 공공미술이라는 장르가 낯선 독자라고 해도 무리 없이 빠져들어 이 과정에 참여하게 될 것 같다.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상호 교감을 중시한 독특한 작품세계를 일구어온 예술가답게 대단히 인상적인 퍼포먼스들이 많았다. 시간과 경험, 기억과 반응, 관계와 소통, 실재와 부재에 대한 질문들 앞에서 그저 이 책을 읽는 독자인 나 조차 직접 참여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당신은 지금 카메라 앞에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 앞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라는 저자의 말을 변주해, 나는 독자로서 이 책 앞에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미처 몰랐던 나 자신 앞에 앉아 있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만큼 저자가 보여주는 '소통과 교감의 소셜 퍼포먼스'는 놀라웠고, 참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고, 답을 찾으면서 나의 기억과 경험들과 조우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작은 공감이 불러일으키는 일상의 기적'을 만나보고 싶다면, 진짜 소통과 교감의 순간을 체험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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