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그림 하나 - 오늘을 그리며 내일을 생각해
529 지음 / 북폴리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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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9일 일요일

사소한 것들이 나를 지탱해 주고 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서 간신히 씻고 누웠을 때 이불에서 풍기는 좋아하는 섬유 유연제 향이나, 언젠가 마음에 와 닿아 책갈피로 표시해 둔 책 속의 구절이라든가, 별 내용도 없이 시시콜콜한 친구와의 전화 한 통 같은 것들. 정말 아주 사소한 것들이 계속해서 힘을 내어 날 나아가게 한다.    p.34

매년 새해가 되면 다짐을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일기 쓰기이다. 하지만 학창 시절 이후로 일상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한 번도 꾸준히 써보지 못했던 것 같다. 어린 시절에는 일기를 써서 선생님께 칭찬도 받고, 상도 받고 그런 재미로 또 부지런히 글을 쓰곤 했었다. 이사를 하면서 지금은 그 많은 일기장들을 다 잃어 버렸지만, 몇몇 대목은 아직도 기억이 날 정도로 추억이 새록새록 돋아나게 만드는 기억들이다.

일기를 쓰면 좋은 점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좋은 건 비슷비슷한 나의 하루가 특별한 순간으로 오래도록 남을 수 있다는 것 아닐까 싶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 사진을 찍어서 남기는 것처럼, 일상의 한 대목도 그렇게 순간 포착해서 기록으로 남겨 두면 오랜 시간이 지나도 꺼내어 볼 수 있으니 참 쉽고도 멋진 일이 아닌가. 이제 올해도 두 달여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마 나는 내년 초가 되면 또 일기를 써야겠다고 다짐을 할 것이다.

이 책은 1년간의 삶을 365편의 일기로 기록한 감성 일러스트레이션 북이다. 일러스트레이터로 회사에서 근무하다 퇴사 후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 529는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일기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 포근한 색연필 드로잉으로 몽글몽글 그려낸 365일 그림일기는 귀엽고 착한 일러스트만큼이나 소소하고 솔직한 일상들을 담고 있다. 나도 그림을 이렇게 그릴 수 있다면, 그냥 일기가 아닌 그림 일기를 한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따뜻하고, 예쁜 일기장이다.

 

4 5일 수요일

늦은 저녁 돌아오는 길에 아껴 읽던 책을 꺼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나는 종이 냄새와 팔랑이는 소리가 듣기 좋아, 듣던 노래를 멈추고 종이 넘기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두워진 길을 달리는 버스의 살짝 열린 창 틈으로 비 냄새가 났고, 책 속 구절처럼 완연한 봄이었다.    p.104

오래 결심했던 회사를 그만두고 시작한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고민, 라섹 수술 이후에 불편했던 일상들, 우연히 본 꽃집에서 산 튤립 세 송이의 기쁨, 본가에서 가족들을 만나고 돌아오던 길에 발견한 아빠가 사주시던 도시락집, 인터넷으로 선물할 책을 고르려다 어느새 내가 읽고 싶은 책만 한 가득 장바구니에 넣고 만 어느 밤, 작년 이맘때의 그림들을 정리하며 치열했던 여름을 돌아보던 시간, 늦은 시간 돌아오는 길에 들른 빵집에 내가 좋아하는 빵이 남아 있어 기분 좋은 날, 정신 없던 이사를 끝내고 한숨 돌리던 순간의 평화, 처음으로 만들어 마신 아이스 밀크티가 너무 맛있어서 하루에 세 잔이나 내리 마셨던 날 등등...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들이지만 그 솔직 담백함이 누구에게나 공감을 주는 내용들이다. 게다가 너무 착해 보이는 그림들 속에서 따뜻함과 소박한 진심이 느껴져서 더 편하게 읽히는 책이기도 하다.

일러스트레이터 529는 어느 날 문득, 일이 아닌 자신의 생활에 대한 건 전혀 기억으로 남은 게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 대부분 그렇지 않을까 싶다. 일에 치여, 일상에 매여, 스스로를 돌보기는커녕 쫓기듯이 살아가는 날들이 쌓이다 보면 자연스레 지나간 하루가 어떠했는지 잊어 버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단 한 줄이라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참 작업 중인 늦은 새벽에, 혹은 잠이 오지 않는 밤에 뜬눈으로 누워 있다 일어나 일기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녀가 그리고 쓴 1년간의 그림 일기를 읽으면서 나도 이제는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끊임없이 찾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좀 돌보고, 내 일상들이 그냥 지나가 버린 하루로 사라져버리지 않도록 붙잡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처럼 사소한 단상들을 끄적여 일기의 형태로 남겨도 좋을 것 같고, 짧은 메모나 사진으로 남겨도 좋을 것 같고 말이다.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있을 때, 의기소침해진 나에게 위로를 건네고 싶을 때, 따뜻하고 포근한 그림 일기를 통해서 소박한 행복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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