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리커버 에디션)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시공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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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여자들의 마음을 얻을 줄 알아야 하는 겁니다."

그는 대담한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아주 조그만 소리로 덧붙였다.

"그럼 세상을 팔아 치울 수도 있다니까요!"

스무 살 드니즈는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자 두 남동생을 데리고 큰아버지를 찾아 파리로 상경한다. 여자 관계로 항상 사고만 치는 열여섯 장과 이제 겨우 다섯 살인 어린 동생 페페는 드니즈를 부모처럼 의지하는 철없는 동생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사정을 딱히 여긴 큰아버지가 파리에 오면 방을 내어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은 이미 1년 전의 일이었고, 그들은 지금 큰아버지에게 미리 연락도 하지 않고 찾아온 참이었다. 직물 전문점을 하고 있는 큰아버지는 가게 맞은편에 커다란 백화점이 생긴 이후 장사가 어려워 그들을 거두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런데 마침 백화점의 여성 기성복 매장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그곳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지만 만만치가 않다. 촌스럽고 어리숙해 보이는 드니즈를 매장 직원들은 대놓고 무시했고, 은근한 박해로 인해 제대로 실적을 올릴 수도 없었다. 매장에서 종일 쌓이는 피로는 엄청났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언제라도 해고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내야 했다. 동생 장은 틈만 나면 찾아와 돈을 달라고 온갖 사연들을 만들어 앓는 소리를 해댔고, 거기에 페페의 보육료를 내고 나면 그녀는 암흑 같은 빈곤함 갈아입을 옷도, 신발도 없이 버텨야만 했다.

한편 이 거대한 백화점의 젊은 사장 무레는 관리 시스템의 운용에 천재적인 감각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야망을 완벽하고 안정적으로 충족시키고자 다른 이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부추기는 방향으로 백화점을 운영해나가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엄청난 세일을 기획하고, 백화점의 확장을 위해 주변 소상인들을 돈으로 포섭하는 것을 서슴지 않으면서 주변 상인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 갔다. 그는 다정하고 상냥한 태도로 끊임없이 새로운 사랑을 찾아 다니며 애정을 남발했지만, 그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고 여자라는 존재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랬던 무레가 조금씩 드니즈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게 된다. 처음에 그는 한 여자가 파리라는 도시에서 어떻게 성장하고 타락해가는지를 보고자 하는 짓궂은 호기심에서 관심을 가졌으나, 점차 매력적이고, 아름답게 변해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놀라움과 두려움에 연민이 뒤섞인 것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모든 것을 가진 백화점 사장이 가난한 여성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일종의 '신데렐라 스토리'로 볼 수는 없다.

이 작품 속에서 '백화점'이라는 장소는 이야기의 배경이 아니라 이끌어가는 실질적인 주체이기 때문이다. 세계 최초의 백화점 '봉 마르셰;를 모델로, 19세기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완벽하게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인 만큼, 그에 걸 맞는 스케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거대 자본과 소상인의 갈등과 그 속에서 그 메커니즘을 실제로 움직이게 만드는 사람들의 노동 문제와 백화점이라는 것의 존속을 하게 해주는 여성들의 쇼핑 중독으로 인한 가정의 붕괴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19세기에 쓰인 고전임에도 불구하고, 21세기에 읽어도 여전히 현대사회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엄청난 작품이기도 하다.

 

그녀의 눈길이 주느비에브에게서 콜롱방으로, 그리고 다시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으로 차례로 옮겨갔다. 그랬다, 저 백화점은 그들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아비에게서는 재산을, 어미에게서는 자식을, 그리고 딸한테서는 10년 전부터 기다렸던 남편감을 앗아 갔던 것이다. 드니즈는 이 저주받은 가족에게 깊은 연민을 느끼면서 잠시 자신이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자문해보았다. 이 가엾은 가족을 짓누르는 거대한 기계에 자신이 힘을 보태려는 것은 아닐까?

대학 신입생 때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처음으로 백화점의 명품관이라는 곳을 드나들기 시작했는데, 나에게는 처음 그곳을 둘러 보았을 때의 이미지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잡지 카탈로그에서나 봤던 수백, 혹은 수 천 만원을 호가하는 명품 옷과 악세사리들이며, 그것들로 몸을 치장하고 우아한 몸짓과 말투로 손님들을 맞이하는 샵마스터의 모습까지 당시의 나에게는 신세계였던 것이다. 물론 지금이야 그들이 매일같이 부유한 고객들을 상대하다 보니 나와 별 차이 없는 판매원이었음에도 자신도 모르게 부르주아들의 몸짓과 말투가 몸에 배어서 혹은 그저 그런 여인네들을 흉내 내는 그들의 허세라는 걸 알고 있지만 사회 경험이 전무했던 당시의 내가 그런 사실을 깨달았을 리가 만무하니 말이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백화점의 특정 세일 기간이 되면 그곳이 치열한 전쟁터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목격했고, 백화점 오픈 시간에 맞춰 입구에서 줄 서서 기다리다 문이 열리자 마자 우르르 몰려서 들어오는 손님들의 행렬을 신기하게 구경하곤 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을 읽으면서 130여 년 전의 파리에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현대적백화점이 존재했다는 점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 인간 군상의 모습들이 지금과 거의 다르지 않다는 점이 굉장히 놀랍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했던 것 같다. 소비의 신전이라 불리는 백화점이 보여주는 다양한 마케팅 기법들도 재미있었고, 상세하게 묘사된 계절과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백화점 안팎의 모습, 매장들의 분위기와 판매원들 간의 관계, 다양한 쇼핑객들의 모습, 그리고 고객과 판매원과의 관계 등은 마치 19세기 파리로 시간 여행을 떠난 것처럼 생생하게 보여 더욱 이야기 속에 빠져들도록 만들어 주었다.

 

이번에 출간된 리커버 에디션은 합본에인데다 너무도 우아한 표지로 갈아 입고 나와서 정말 보고 싶었던 작품이기도 한데, 이야기 자체도 너무 너무 재미있게 읽히지만 책도 소장용으로 정말 우아하고 아름답다. 기존의 두 권에서 합본으로, 무선 제본에서 고급 양장본으로 탈바꿈한 것도 마음에 들지만, 표지 이미지와 색감부터 너무도 고급스럽고 작품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드러내어 훌륭하다. 그리고 리커버 에디션 출간 기념으로 받을 수 있는 사은품 양장 노트도 같은 울트라바이올렛 톤으로 만들어져 책과 잘 어울린다. 그야말로 여자들의 마음을 얻을 줄 아는 에디션이라고나 할까. 실물을 보면 마음을 뺏길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책이다. 게다가 고전문학인데도 불구하고 너무도 술술 읽히고, 흥미진진해서 전혀 고전스럽지 않다는 점 또한 이 작품의 굉장한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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