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인간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50년 독서와 인생
오에 겐자부로 지음, 정수윤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일본이 참 부러운게 풍부한 번역이다. 외국문학을 공부함에 있어 모국어로 먼저 접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일본문학이 세계문학 속에서 높이 평가받는 것은 이러한 문학적 토양에서 성장한 덕도 있다고 본다. 1950년, 오에 겐자부로 선생이 열여섯 되던 해에 서점에서 만난 문학작품들만 해도 말 다했다. 윤동주 시인도 문학 공부를 위해 도쿄로 갔다지 않았나. 당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의 문화가 얼마나 다채로웠는가 예상해본다. 그 시기 우리의 과거를 생각해보면 화도 난다.. 어쨌든 일본문학이라고는 문화 해금 이후로 한창 유행이던 몇 작품을 읽은 것이 다다. 일문학 특유의 탐미주의, 신경 하나하나를 분석하는 그 예민함은 거북할 따름이라 장르소설을 제외하고는 멀리해왔다. 그래서 오에 겐자부로 선생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은 읽은 적이 없다. 강연을 모은 이 에세이가 첫 만남인 셈이다.   

  

결론적으로, 《읽는 인간》을 읽는 도중에 조금 울었다. 최근 속상해하던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다. 그깟 일로 속상해하지마, 그런 목소리가 들린 건 아니었다. 나보다 더 힘든 일들로 가득한 팔십 노인의 옛 이야기에서 위로를 느낀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울었냐고? 오에 겐자부로가 정말 치열하게 노력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읽고, 또 읽고. 색깔별로 줄치면서 읽고, 원서와 대조하며 읽고. 연구서를 찾아 읽고, 배우고, 읽고, 외우고 또 읽고.. 그쯤 읽고 고민했으면 전문가다 생각해도 될 텐데, 선생은 자신을 아마추어라 한다. 1950년, 《프랑스 르네상스 단장》이라는 책을 만나고 〈에드거 앨런 포〉의 시집을 읽으며 문학에 눈을 뜬 소년.. 어떻게 보면 《읽는 인간》은 오에 겐자부로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에 영향을 끼친 그 많은 문인과 작품들, 인생의 사건들이 함께 소개되기 때문이다.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다. 오에 선생의 문장에서 느껴지는 깊이를 내 말과 글로 옮길 수 없음이 하나요, 직접 읽으며 오에 겐자부로의 〈작가들〉을 만나보기를 권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생이 나열하는 작가와 작품들, 외는 원문과 해석들을 보며 잠시나마 꿈을 꾸었다. 언제나 고전은, 시대를 막론하고 전해지는 힘이 있는 법이다. 최근에 읽은 작품들이 더러 있어 아주 공감했다.. 오에 선생처럼 책에 밑줄을 치고 외지는 않지만, 원문과 번역을 비교해 읽기 때문이다.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도 많고, 논문 검색도 쉽다. 번역 노트는 없지만 따로 워드에 감상과 번역을 저장해둔다. 원문을 읽고 얻는 감상은 아무리 잘된 번역에도 비교할 수 없는 법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정말 치열하게 읽는 사람이다.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을 정도로 읽는데 여기에도 나름의 패턴이 있다. 재독, 삼독은 기본이고 모르는 단어에 색깔별로 박스를 입히는 등 그 나름의 방식(책에 자세히 소개)에 따라 읽는다. 3년마다 작가를 바꾸어가며 읽는데, 한 작품에 발을 들이면 그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는다고 한다. 또 틈틈이 저작활동을 하는데, 당시 읽는 작가의 영향으로 문체가 달라진다고 한다. 이것은 오에 선생이 의도하는 것이기도 하며 말 그대로 흡수하여 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정말 놀라울 뿐이다. 소개되는 작가와 작품은 아주 많아서 모두 소개할 수 없다. 간단하다면 리뷰에 써보겠는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터라 오에 선생의 의도 그대로 옮길 수가 없다.. 그래도 조금만 소개해보자면, 오에 겐자부로가 쉰 살이 되던 해에 지나간 고전을 다시 읽기로 마음먹은 것이 단테의 《신곡》이다. 특히 이 작품을 얘기하면서 오에 선생은 고전을 젊은 시절에 많이 읽어둘 것을 권한다. 살다보면 아니 열심히 읽다보면, 인생의 고전이라 할 만한 작품이 다가온단다. 고전을 통해 얻는 풍부함과 심오함은 어디에도 비할 바 없으니 여유가 있을 때 많이 읽으라 한다..

 

《신곡》의 연옥, 자살한 사람들의 가시나무를 소개하면서 등장하는 이타미 주조는 선생의 오랜 친구이다. 그의 여동생이 선생의 부인이 되었으니 가족이기도 하다. 이타미는 오에 선생에게 랭보의 시- 프랑스어 원문을 소개하고, 후에 《프랑스 르네상스 단장》이라는 책의 저자가 도쿄대 교수라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문학〉의 길에 접어들게 한 장본인이다. 학창 시절, 문학보다는 답이 정해진 수학이 좋았다니, 이타미의 역할이 아니었다면 오에 겐자부로의 작가 인생은 조금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선생의 작품 속 분신인, 코기토(Cogito)의 또 다른 반쪽 역할을 하는 것도 이타미이다. 그는 2007년 《수상한 이인조》라 이름붙인 3부작에서 등장한다.. 그의 자살로 괴로워하던 선생이 술을 마시고 바다에서 수영하면 힘이 빠져 죽겠지하는 생각에 물 속으로 들어가는데 이타미의 꾸짖음이 들렸다 하니.. 오에 겐자부로의 인생에 또 다른 면을 차지하고 있는 친우는 에드워드 사이드. 팔레스타인 출신의 세계적인 석학으로, 〈오리엔탈리즘〉에 녹아든 편견을 지적한 학자다. 제국주의를 염려한, 오에 선생과 오랜 우정을 나누며 옳다고 생각한 일을 위해 앞장선 지성인이었다. 사이드와의 서간, 일화는 책에 자세하게 소개되고 2부 8장은 그를 위한 강의다.. 

    

어떤 책은 리뷰를 쓰기 힘들다. 정말 좋은 책인데.. 이 책을 통해 더 많이 얻으려면, 오에 선생이 소개하는 작품들을 모두 읽어야하지 않을까 한다. 다행히도 번역가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책들을 뒤에 실어주었다. 안타깝게도 1950년의 일본에는 있었던 모 작가의 번역본이 2015년 한국엔 없다.. 목록의 다른 작품을 읽고나서도 번역이 안 되었다면 원문으로 도전해야지 별 수 있겠는가.. 오에 선생의 육십년 《읽는 인생》은 강연을 글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내용의 깊이에도 불구하고 전혀 딱딱한 글이 아니다. 문학을 사랑하는 문학소녀, 문학소년(언제나 우리 마음 속엔 소년과 소녀가 살고 있지 않는가?)의 마음을 흔들어놓을 글들이다. 문학과의 첫만남, 인생이 힘든 고개에 접어들 때 만난 작품들, 장애가 있는 장남과 소통하고 노력하는 일화들.. 〈문학이 그를 어떻게 구원하였는가〉를 섬세하고 겸손하게 풀어내는, 팔십의 나이에도 배우려는 노력을 가진 노작가는 대가라는 말로도 부족할만큼 존경스럽다.. 오에 겐자부로의 글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강하셔서 오랫동안 활동하시면 좋겠다.

 

 

*《신곡》얘기에 나오는 존 라스킨은 존 러스킨John Ruskin이다. 번역가가 맨 처음에 일본어 발음을 그대로 옮긴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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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8-03 23: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본 출판시장이 불황에 힘들다고 해도 언제든지 반등할 수 있는 힘이 아직 남아 있다고 생각해요.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서양 문화를 빨리 받아들여서 그런지 독자들이 안 읽을 것 같은 서양문학 작품들이나 사상서적들을 단행본으로 출간했어요.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에 소개된 외국 서적들 절반은 지금도 우리나라에 번역되지 못했습니다.

에이바 2015-08-07 21:27   좋아요 1 | URL
일본친구가 별의별 작품을 다 봤다길래 신기했는데 다 번역이 되어있다더군요. 다치바나 책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의 고전 목록을 보면.. 그런 점은 부럽습니다.

moonnight 2015-08-09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주말신문에 소개되어있어서 읽고싶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읽으시고 리뷰까지@_@;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에이바 2015-08-17 12:15   좋아요 1 | URL
아주 좋은 책이었어요. 독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단발머리 2015-10-09 2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어야겠군요.
로마의 일인자 시리즈 2, 3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를,....
하지만 이 책을 외면하기 어려우니, 오에 겐자부로님이 조금 기다리셔야 될 듯.
고령이신데 괜찮으시려나....
에이바님 덕분에 나만 바쁜 일 나섰습니다..... 끄응~~~~

에이바 2015-08-17 12:18   좋아요 2 | URL
로마의 일인자 최고지 않나요? 저는 2부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읽는 인간도 꼭 읽어주셔요 참 좋답니다

[그장소] 2016-01-22 0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래서 우리문학이 일본에 빚을 지게 되는군요.번번히...
안타깝게도...어째서 독자적 노력이 부족한지....

에이바 2016-01-22 10:12   좋아요 1 | URL
그장소님 댓글이 이해되지 않아 제 글을 다시 읽어봤습니다. 혹 윤동주 시인에 대한 언급 때문에 그러신가요? 윤동주 시인은 일본에서 영문학을 공부했습니다만... 제 글에서 이런 인상을 받으신 부분을 알려주시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거든요...

[그장소] 2016-01-22 10:20   좋아요 0 | URL
아...에이바님 ㅡ글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어요.
제 개인의 생각에 불과한데 .혹시 불쾌하시거나
이 글들에 맞지 않으면 지울수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일본에서 ㅡ교육 알고있었는데
새삼 문제될게 아니고요. 우리문학은 어째서 서양문학을 바로 번역하는것을 하지 않나.
일본을 통하나 ㅡ 싶어서 말예요.
물론 아주 안하는건 아니지만 ㅡ아직 미약하단 얘기죠. 일부 소설가분들이 번역으로 앞장서고
개중에 자신의 소설도 역으로 외국으로 내고있으니...앞으로 기대하면 되겠죠.
제가 이 문학판에 실망을 너무해서 그런가봐요.
에이바님 글엔 전혀 문제가없답니다. 괜한 실례를 ...죄송해요.^^;;;

에이바 2016-01-22 10:46   좋아요 1 | URL
아... 중역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그러셨던거군요. 아닙니다. 댓글을 지울 필요까지는 없으세요. 역사적으로 인문학적 토대의 맥이 끊긴 상태에서 아무래도 지리적으로 가깝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일본의 연구에 기댄 건 사실이지만 요즘은 원전 번역을 선호하죠. 학계는 본토에서 수학한 교수들이 대부분이고, 학부생들도 다녀오잖아요. 또 다양한 외국어를 구사하는 독자들이 많고, 굳이 번역서를 통하지 않고 원서를 보는 이도 많고요. 따라서 이전엔 발전을 위해 많은 자료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중역이 대다수였다고 보는게 어떨까 합니다. 또 중역이 다 잘못된 것만은 아니었거든요. 번역 작업하는 과정에서 타언어로 진행된 연구를 참고하기도 하니까요. 어떤 때는 중역이 나을 때도 있고요.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주제 사라마구 책도 중역이더라고요. 결국 전공자 수의 부족, 번역에 대한 관심과 평가의 부족- 이 부분은 출판사 입장도 어느 정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때문에 그런 상황이 오지 않았나 합니다... 순전히 저의 생각입니다..

[그장소] 2016-01-22 12:35   좋아요 0 | URL
중역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 있죠.
문제는 그렇게 해서 자연스럽게 먼저 읽게 되는 첫 독자가 누구였을까 하는점 입니다. 이제는 발빠른 독자 개개인이 있고 인터넷과 컴퓨터가 있어서 활발한 독서가 ㅡ또 책의 움직임이 이전보다 좋아졌지만 ..예전엔 아마도 출판 관계자들이 먼저 아니었을까..그래서 문학이 지금 이런것이 아닌가...뭐 ㅡ잠깐 ㅡ그랬네요..
그냥 ㅡ다른 일 하느라 답이 늦어 죄송합니다.
그저 그것도 한 역할이지 안았을까..하고.

에이바 2016-01-22 16:21   좋아요 1 | URL
중역은 사실 지양해야하는 것이지요. 외국어를 현지언어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굳이 렌즈를 하나 더 씌울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장소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한국의 현대문학을 잘 모르기에 코멘트하기 어렵지만 어떤 면에서는 일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고있다는 생각이요. 그 말씀이시죠? 신경숙 사태도 그러했고요. ( 일본스타일의 감상적인 글을 쓰는 소설가를 일부러 띄웠다 이런 글도 봤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나요) 음악, 영화, 소설, 그림, 시... 어떤 작품이 되든 이제는 예술하는 사람들의 선구자적 시각, 계몽적 시각이 의미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보의 창구가 많아져서 다들 다른 채널로 이미 접하고 있거든요. 너희만 보고 듣고 읽는게 아니라는거죠... 창작이란게 모방없이 일어날 수 없다지만 노골적인건 우리도 이제 안다는 거죠ㅎㅎ 우리문학계에 대한 그장소님의 애정과 고민이 느껴집니다. 저는 잘 몰라서... 다만 요즘은 일본어 중역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오히려 영어나 타언어 중역이 눈에 띄더라구요.

[그장소] 2016-01-22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어렵게 에두른 말을 시원하게 꼬집어 주셔서 편합니다. 일부에선 이부분은 굉장히 터부이기때문에
건들이기 쉽지않아요. 어쩌면 이대로 굳어버릴까..저는 지금이 더 걱정입니다. 많이들 알지만 ..그런다고 뭐 달라
진게 없어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틀이 고스란히
베껴지는것은 어쩌나...싶고..
어떤 면에서가 아니라 실제 그래왔죠.공공연하게 모른 제가 좀 바보같은데..그간 우물안 개구리여서 일문학을 무시한 ..경향이...있었거든요. 그 무시의 시간동안 무럭무럭 자랐더라고요. 양으로 음으로..오마쥬라거나
인용이라거나 하면 이해하겠는데..그런게 아니어서 애정이 갈데없어요.

에이바 2016-01-22 16:42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저는 문학계 사정은 잘 모르지만 일상 생활, 우리 문화에도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고 느껴요. 분류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밀착되어 있지 않나... 문제를 인식하고 탈피하는 과정, 생각하고 무언가 만들어내는 행위들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다면 이런 현상은 더욱 심화되겠죠... (덧붙임) 생각보다 심각한 모양입니다. 여전히 일문학은 피상적이라 생각하는데 생각을 조금 고칠 필요가 있겠군요.. 역시 아는만큼 보이나 봅니다. 씁쓸해요...

[그장소] 2016-01-22 16:47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ㅡ이 부분이 신경숙작가와 그 백낙청님인지 만 도려내어져 돌을 맞아서 끝 ㅡ그럴 일이 아녔거든요. 더 많고 더 크고 시스템적인 라인이 문제인데.....아직 살아있으니...버젓이..에이바님 말씀처럼 ㅡ확실히 비난 ㅡ비판에만 열을 낼게 아니라
이제 이 판을 들어서 어떤 모색을 해나가야 하느냐 하는걸로 가얄텐데 ㅡ그냥 굳히기ㅡ네요..일본 과 이쪽 문화의 차이는 사회 경제 문학 음악 그 모든 쪽에 두루두루 엮인 채 끌려 가고있어요..안타깝게도...그래도 그럴수록 더 지켜봐야한다 고 저를 달래는 중인데....실망스러운 것만 자꾸 생겨서요..^^
 
[세트]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 전2권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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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프랑스 파리에 사는 여섯 살 난 소녀 마리로르는 선천성 백내장으로 눈이 보이지 않으리란 진단을 받는다. 딸에 지극정성인 아빠는 자연사 박물관에서 일하는 자물쇠장인으로, 딸을 위해 비싼 점자책을 마련하고 혼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훈련시킨다. 한가지 감각이 부재하면 다른 감각들은 예리해진다고 했다. 마리로르는 아빠의 선물인 수수께끼 모형을 손의 감각만으로 풀어내는 경지에 이른다. 1934년, 독일의 탄광도시 졸페라인에 사는 여덟 살 베르너는 갱도가 무너져 아버지를 잃고 동생 유타와 ‘아이들의 집’에 맡겨진다. 충격 때문일까. 남매의 머리는 하얗게 새어버렸다. 언덕 너머 쌓아둔 더미에서 라디오를 찾아낸 소년은 기계 회로에 마음을 빼앗긴다. 타고난 재능으로 라디오를 고친 소년은 밤늦게 몰래 라디오를 듣는다. 어린이를 위한 방송과 음악을 들려주는 프랑스 남자의 목소리는 소년이 꿈을 꾸게 한다. 〔같은 해, 히틀러는 ‘긴 칼의 밤’을 거쳐 총통이 되었다.〕 1940년 5월, 소녀는 열두살 소년은 열네살이 되었다. 소년의 꿈은 선명함을 더해가지만 1년 후면 탄광노동자가 될 예정이었다. 소녀는 집과 박물관을 오가며 공부 중이었다. 그러나 파리가 함락될 거란 소리에, 박물관의 귀중한 보석 ‘불꽃의 바다’를 가지고 소녀와 아빠는 피난길에 오른다. 졸페라인에 온 간부의 커다란 전축을 고친 소년은 추천장을 들고 국립 정치 교육원으로 향한다. 소녀에겐 절망이, 소년에겐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라디오와 보석, 소년과 소녀의 시각이 교차되며 이어지는 이야기는 전쟁이 인간의 삶을 황폐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리로르와 아버지는 파리로 곧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럴 일은 요원하다. 그들이 향한 생말로는 소녀의 작은 할아버지인 에티엔이 사는 곳이다. 에티엔은 1차대전 이후로 PTSD를 앓고 있어 집에서 나오지 않는다. 소녀는 박식한 할아버지와 좋은 친구가 되지만 파리에 다녀오겠다던 아버지의 소식이 끊긴다. 내면으로 파고들던 소녀는, 생말로 해변에 밀려온 파도와 바람이 싣고 온 바다 내음으로 마음을 치유한다. 한편, 국립 정치 교육원에서 수학과 공학을 공부하게 된 베르너. 약육강식은 소년들의 세계도 지배하여, 단짝인 프레데리크는 숱한 괴롭힘에 시달린다. ‘다른’ 사람들을 핍박할 구실이 전쟁을 일으켰듯이, 소규모 복사판인 학교에서도 ‘다른’ 소년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단짝을 보호하지 못한 베르너의 죄책감은 어쩌면, 정치 교육원에 오기 위해 라디오를 부쉈던 그 밤- 동생의 원망스러운 눈동자에서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검은 줄이 가득한 동생의 편지에 답장하지 않은 비겁함은 단짝의 멍한 눈동자에 비춰진다. 그 죄책감에 따른 명령불복, 괘씸함 때문인지 베르너는 어린 나이에도 전쟁에 차출된다. 한편 생말로는 여인들을 중심으로 반독일 활동이 이루어진다. 마리로르의 존재로 힘을 얻은 에티엔은 레지스탕스에 참여하게 되고, 다락방에서 라디오 방송을 시작한다. 30년대에 이어, 그의 레코드에서 울려 퍼지는 드뷔시의 달빛(월광)은 영국과 독일에도 드리운다. 이 거대한 달무리를 따라 베르너가 생말로를 향한다. 전파 발신지를 추적하여,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영리한 소년은 단번에 그 장소-졸페라인에서 들었던, 그 라디오 속 프랑스 남자의 목소리가 퍼지는 진원지-를 찾아낸다. 소년은 입 안에서 프랑스어 문장을 만들어 본다. 전쟁 전에, 선생님의 방송을 라디오에서 들었습니다..

 

전쟁이 시작될 무렵,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기회였고 누군가에게는 삶의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베르너도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쓸모, 소용은 오직 국가를 위한 것이라는 구호가 거북하게 느껴진다. 동시에 프레데리크의 몸과 마음이 파괴되는 것을 보며 고통스럽다. 베를린의 집에서 바라본 별을 단 사람들, '치워 버려'서 홀가분하다는 말들.. 어디에 발을 붙여야할지 모른 채, 그저 허공에서 발을 저을 뿐이다. 마리로르는 아빠의 부재 속에, 생말로에서 고군분투한다. 히틀러가 '장애'를 가진 이들을 어떻게 대우했는지 생각할 때, 소녀가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집 밖을 나선 것은 엄청난 일이다. '보이지 않는 모든 빛'은 라디오 전파, 그 속에 녹아 든 달빛이라는 음악 그리고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미세한 전기이다. 전파를 통해 전해지는 달빛이 우리 귀로 들어와 마음을 움직인다 해도 좋을 것이다. 우연을 거듭하여, 마리로르와 베르너가 만나게 되는 순간은 기다려왔던만큼 아름다웠다. 독자는 베르너를 알지만, 마리로르와 유타를 비롯한 이들은 그를 모른다. 성인이 된 그들이 베르너를 오해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침묵 속에 묻힌, 전쟁 중 베풀어진 친절과 희생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전쟁의 명분은 정신을 마비시켜, 칼과 총을 들게 하지만 아주 작은 한 가지로도 그 마비가 풀릴 수 있다. 라디오를 통해, 한가지 목소리를 통해 선동된 이들에게 회의의 씨앗 하나가 심긴다면.. 1차대전 때 참호에서 전투 속개를 기다리며 듣던 그 노래가 상대 진영에서 들려오자 한동안 전투를 못했다고 한다. 괴물처럼 느껴지던 적군이 '인간'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줄곧 회의와 죄책감에 시달리던 베르너가, 생말로 모퉁이에서 마리로르를 보고 전파에 실려온 목소리를 들으면서 하게되는 결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무너진 잔해를 헤치고 나온 소년이 어디로 향할지도 안다. 소년이 추구한 순수한 학구열과 재능이, 나이 든 소녀의 모습에서 이어져가는 것을 보며.. 전쟁이 아니었다면 소년의 재능이 과연 꽃피울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파왔다. 두 소년 소녀가 겪은 비정함, 생말로의 풍경과 동유럽의 해바라기 밭을 지나는 문장 사이 숨은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다면 이 작품을 더 풍부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소년과 소녀의 시선에 끼어드는 보석 사냥꾼 룸펜은 역사를 반영한 악당이다. 실제로 히틀러는 전쟁 중에 다양한 미술, 예술품을 모아 고향 린츠 박물관에 모아두려 했다. 룸펜은 영원한 삶을 약속한다는 '불꽃의 바다'를 찾고 있다. 감수성과 예술, 문화를 제거한 이들이 예술품을 찾는데 혈안이 된 모습은 아이러니하다.

 

 

달빛이 반짝이며 부풀어 오른다. 찢어진 구름들이 나무 위를 휙휙 질주한다. 나뭇잎들이 사방에서 날아다닌다. 그러나 달빛은 부는 바람에도 동요하지 않고, 베르너가 보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느리고 차분하게 구름을 뚫고, 허공을 뚫고 지나간다. 그 빛줄기들은 풀들이 드러 누운 들판에 넓게 걸쳐져 있다.

 

왜 빛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을까? 

2권 391-3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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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5-08-03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주말 내내 붙잡고 있었어요. 최세희 역자가 조금 자기 스타일이 강한 것 같아요. 가시내에서도 그러더니.. 아직 2편 1/3정도 남았다는

2015-08-07 2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07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08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5-08-05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시내는 아마도 불어번역이고 최정수님 번역인데 제가 엉뚱한 소리를.. 프레데리크에게 닥친 일은 차마 적을 수도 없을 만큼 마음 아팠어요. 장님이어도 그렇게 성공할 수 있게 점자책들을 많이 발행하고 배려하는 시스템이 있었으니 교수가 되는 일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읽고나서 여운이 더 긴 책이네요. 읽을 때도 시간이 오래걸리더니. 문장이 평이하지 않고 시 같기도 산문 같기도 .. 아마존 보니 미국 독자들에게도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책이었던 것 같더라구요. 일던 뒤쪽 반이 얼버무린 것같다는 의견. 시간이 왔다갔다 해서 너무 헷갈리고 산만하다는 의견이 많더라구요

에이바 2015-08-07 21:18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부분 다 공감하고요. 글을 읽고나서 어떤 교훈이나 전쟁이 주는 딜레마에 대한 고민같은 건 크게 다가오는게 없더라고요.(말하자면 이 작품만의 독특함?) 치밀한 구상을 하고 아름답게 쓰려고 했다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배경을 충실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샀어요. 읽으면서 생말로랑 동유럽의 해바라기 밭 떠오르는게 참 대단하더라고요. 기억도 되살리고.. 베르너가 애타게 바라던 배움의 기회가 마리로르에겐 (쉽지 않았지만) 한 번의 결심이었다는 것이 안타까웠어요. 기대보다는 평이했습니다.. 문장이 아름답다고 하던데 솔직히 못 느꼈어요. 얼른 이해가 되지않아 1권 초반부 내내 붙들고 있었거든요.
 
로마 공화정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
데이비드 M. 귄 지음, 신미숙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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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의 입문서. 건국과 왕정 폐지, 공화정을 거쳐 제국 직전에 이르기까지- 위엄과 영광에서 비롯된 귀족들의 경쟁과 정복 전쟁, 가정과 종교 등을 통해 도시국가 로마가 제국 로마로 발전하는 과정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 로마 공화정이 현 국가들의 체제모델로서 끼친 영향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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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지음, 히스테리아 옮김 / 황금가지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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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노르웨이에서 출간된 이 소설은 미러링- 여성과 남성의 역할 전복을 통해 사회의 뿌리깊은 성차별을 고발한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2015년의 한국사회에 적용되는 사례를 발견할 때면 착잡해진다. 맨움 해방 운동이 나오기 전, 초반부라도 꼭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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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하녀의 일기
옥타브 미르보 지음, 이재형 옮김 / 책세상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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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에포크의 날카로운 지성, 미르보를 소개하기에 제격인 작품이다. 드레퓌스 사건 등 프랑스 사회의 위선을 폭로하고 문예 경향을 비판했으며 천재들, 그 중에서도 까미유 끌로델의 재능을 알아 본 고마운 사람.. 아주 아주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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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7-29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주인공 레아 세이두 때문에 이 책에 관심ㅋ;; 주객이 전도))

까미유 끌로델, 실비아 플라스, 프리다 칼로 등 많은 재능있는 여성예술가들이 남성들과 시대에 치여 굴곡진 삶을 산 거 생각하면 참...
수많은 천재들의 산파역할을 한 조르주 상드는 잘 된 케이스인가 안 된 케이스인가 늘 갸웃....

에이바 2015-07-29 11:58   좋아요 0 | URL
전 영화 나온줄도 몰랐는데ㅋㅋ 조르주 상드는 꽤 주체적이지 않았던가요? 남성 살롱에도 출입하고 애정관계에선 쇼팽이 휘둘렸던 기억이 있는데.. 물론 제 기억이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ㅠㅠ 전 끌로델 무지 좋아했어요 중고등학교 때인가 푹 빠져서 지금은 절판된 책도 사고.. 로댕 맨날 욕하고ㅋㅋ 지옥의 문도 우리 까미유가 만든 부분 찾아보고ㅋㅋ

AgalmA 2015-07-29 12:36   좋아요 0 | URL
영화 개봉 맞춰 같이 출간한 듯. 요즘 이거 유행이잖아요ㅎ
표지가 그 영화 스틸컷이라 생각됩니다. 담달 개봉이더라고요. 레아 세이두 인기 때문에 불발되진 않을 거 같고, 씨네큐브 같은 데서 소규모로 상영하지 않을까 싶어요.

조르주 상드가 그렇게 뛰어난 지성과 글재주가 있었던 거에 비해 특출한 저작이 없어서 그 ˝주체성˝이 의심된단 말이죠. 주변 교류에 빠져 자기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한 한계? 그녀에 대해선 천재들에 대한 수필만 좀 관심이잖아요. 저라면 그 수많은 천재들의 연인 소리 듣는 걸로 만족하지 못할 듯.

까미유 클로델 때문에 저도 로댕 욕 엄청ㅎ;;; 로댕 전기보니 전형적 자기몰입형 천재라 주변에서 그리 휩쓸릴 만도...

에이바 2015-07-29 12:22   좋아요 1 | URL
레아 세이두 엄청 잘나가네요. 전 레아를 드라마 la belle personne에서 첨 봤거든요. 친구가 루이 가렐이랑 크리스토프 오노레를 좋아해서 보라고 추천한건데ㅋㅋ 그리고 나서도 여기저기 나왔죠. 그땐 매력을 모르겠던데 괜찮은 배운것 같아요. 조르주 상드에 대한 기억은 단편적이라 그런 비판점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크~ 당시 살롱의 뮤즈들 얼마나 많았나요. 그걸 벗어난 인물은 높이 평가받는거고 안되면 거기까지인거고.. 좀 슬프네요

다락방 2015-07-29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랑 [미스 줄리] 궁금하더라고요. [미스 줄리]는 굿 다운로더로 다운 받아놨어요.
근데 이 책 미출간이네요 아직. 일단 읽고싶어요 체크하긴 했는데 말이죠. 흣

에이바 2015-07-29 11:55   좋아요 0 | URL
미스 줄리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차스테인이 나오는 아!일!랜!드! 배경의 영화라고요? 아.. 봐야겠네요ㅎㅎ 전 이 책 나오면 꼭 볼거예요! 다른 책이 많이 밀렸지만 이번에 안나 드 노아이유도 그렇고 벨 에포크도 좀 볼까 싶었는데 반가운 출간소식이.. 망했어요..ㅋㅋ

cyrus 2015-07-29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옥타브 미르보가 고갱의 그림을 높게 평가한 작가 중 한 사람이기도 해요. 특히 고갱의 ‘황색 그리스도’의 예수 표정이 슬프다는 평을 했습니다. 이름만 듣던 작가의 소설 출간 소식이 반갑습니다. ^^

에이바 2015-08-07 21:32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미르보는 고갱이 타히티로 가는 경비마련에 도움을 주었죠. 고흐와 세잔도 높이 평가했는데 당시 인정받지 못하던 천재들을 알아본 평론가였습니다.. 회화뿐 아니라 조형미술에도 관심이 있어 로댕의 그늘에서 클로델을 끄집어내고(동생은 시인이라 같이 칭찬..) 그녀가 인정받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