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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 전2권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평점 :
1934년, 프랑스 파리에 사는 여섯 살 난 소녀 마리로르는 선천성 백내장으로 눈이
보이지 않으리란 진단을 받는다. 딸에 지극정성인 아빠는 자연사 박물관에서 일하는 자물쇠장인으로, 딸을 위해 비싼 점자책을 마련하고 혼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훈련시킨다. 한가지 감각이 부재하면 다른 감각들은 예리해진다고 했다. 마리로르는 아빠의 선물인 수수께끼 모형을 손의 감각만으로
풀어내는 경지에 이른다. 1934년, 독일의 탄광도시 졸페라인에 사는 여덟 살 베르너는 갱도가 무너져 아버지를 잃고 동생 유타와 ‘아이들의
집’에 맡겨진다. 충격 때문일까. 남매의 머리는 하얗게 새어버렸다. 언덕 너머 쌓아둔 더미에서 라디오를 찾아낸 소년은 기계 회로에 마음을
빼앗긴다. 타고난 재능으로 라디오를 고친 소년은 밤늦게 몰래 라디오를 듣는다. 어린이를 위한 방송과 음악을 들려주는 프랑스 남자의 목소리는
소년이 꿈을 꾸게 한다. 〔같은 해, 히틀러는 ‘긴 칼의 밤’을 거쳐 총통이
되었다.〕 1940년 5월, 소녀는 열두살 소년은 열네살이 되었다. 소년의
꿈은 선명함을 더해가지만 1년 후면 탄광노동자가 될 예정이었다. 소녀는 집과 박물관을 오가며 공부 중이었다. 그러나 파리가 함락될 거란 소리에,
박물관의 귀중한 보석 ‘불꽃의 바다’를 가지고 소녀와 아빠는 피난길에 오른다. 졸페라인에 온 간부의 커다란 전축을 고친 소년은 추천장을 들고
국립 정치 교육원으로 향한다. 소녀에겐 절망이, 소년에겐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라디오와 보석, 소년과 소녀의 시각이 교차되며 이어지는 이야기는 전쟁이 인간의 삶을
황폐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리로르와 아버지는 파리로 곧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럴 일은 요원하다. 그들이 향한 생말로는 소녀의 작은
할아버지인 에티엔이 사는 곳이다. 에티엔은 1차대전 이후로 PTSD를 앓고 있어 집에서 나오지 않는다. 소녀는 박식한 할아버지와 좋은 친구가
되지만 파리에 다녀오겠다던 아버지의 소식이 끊긴다. 내면으로 파고들던 소녀는, 생말로 해변에 밀려온 파도와 바람이 싣고 온 바다 내음으로 마음을
치유한다. 한편, 국립 정치 교육원에서 수학과 공학을 공부하게 된 베르너. 약육강식은 소년들의 세계도 지배하여, 단짝인 프레데리크는 숱한
괴롭힘에 시달린다. ‘다른’ 사람들을 핍박할 구실이 전쟁을 일으켰듯이, 소규모 복사판인 학교에서도 ‘다른’ 소년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단짝을
보호하지 못한 베르너의 죄책감은 어쩌면, 정치 교육원에 오기 위해 라디오를 부쉈던 그 밤- 동생의 원망스러운 눈동자에서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검은 줄이 가득한 동생의 편지에 답장하지 않은 비겁함은 단짝의 멍한 눈동자에 비춰진다. 그 죄책감에 따른 명령불복, 괘씸함 때문인지 베르너는
어린 나이에도 전쟁에 차출된다. 한편 생말로는 여인들을 중심으로 반독일 활동이 이루어진다. 마리로르의 존재로 힘을 얻은 에티엔은 레지스탕스에
참여하게 되고, 다락방에서 라디오 방송을 시작한다. 30년대에 이어, 그의 레코드에서 울려 퍼지는 드뷔시의 달빛(월광)은 영국과 독일에도
드리운다. 이 거대한 달무리를 따라 베르너가 생말로를 향한다. 전파 발신지를 추적하여,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영리한 소년은 단번에 그
장소-졸페라인에서 들었던, 그 라디오 속 프랑스 남자의 목소리가 퍼지는 진원지-를 찾아낸다. 소년은 입 안에서 프랑스어 문장을 만들어 본다.
전쟁 전에, 선생님의 방송을 라디오에서 들었습니다..
전쟁이 시작될 무렵,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기회였고 누군가에게는 삶의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베르너도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쓸모, 소용은 오직 국가를 위한 것이라는 구호가 거북하게 느껴진다. 동시에 프레데리크의 몸과 마음이 파괴되는 것을 보며 고통스럽다. 베를린의 집에서 바라본 별을 단 사람들, '치워 버려'서 홀가분하다는 말들.. 어디에 발을 붙여야할지 모른 채, 그저 허공에서 발을 저을 뿐이다. 마리로르는 아빠의 부재 속에, 생말로에서 고군분투한다. 히틀러가 '장애'를 가진 이들을 어떻게 대우했는지 생각할 때, 소녀가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집 밖을 나선 것은 엄청난 일이다. '보이지 않는 모든 빛'은 라디오 전파, 그 속에 녹아 든 달빛이라는 음악 그리고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미세한 전기이다. 전파를 통해 전해지는 달빛이 우리 귀로 들어와 마음을 움직인다 해도 좋을 것이다. 우연을 거듭하여, 마리로르와 베르너가 만나게 되는 순간은 기다려왔던만큼 아름다웠다. 독자는 베르너를 알지만, 마리로르와 유타를 비롯한 이들은 그를 모른다. 성인이 된 그들이 베르너를 오해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침묵 속에 묻힌, 전쟁 중 베풀어진 친절과 희생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전쟁의 명분은 정신을 마비시켜, 칼과 총을 들게 하지만 아주 작은 한 가지로도 그 마비가 풀릴 수 있다. 라디오를 통해, 한가지 목소리를 통해 선동된 이들에게 회의의 씨앗 하나가 심긴다면.. 1차대전 때 참호에서 전투 속개를 기다리며 듣던 그 노래가 상대 진영에서 들려오자 한동안 전투를 못했다고 한다. 괴물처럼 느껴지던 적군이 '인간'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줄곧 회의와 죄책감에 시달리던 베르너가, 생말로 모퉁이에서 마리로르를 보고 전파에 실려온 목소리를 들으면서 하게되는 결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무너진 잔해를 헤치고 나온 소년이 어디로 향할지도 안다. 소년이 추구한 순수한 학구열과 재능이, 나이 든 소녀의 모습에서 이어져가는 것을 보며.. 전쟁이 아니었다면 소년의 재능이 과연 꽃피울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파왔다. 두 소년 소녀가 겪은 비정함, 생말로의 풍경과 동유럽의 해바라기 밭을 지나는 문장 사이 숨은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다면 이 작품을 더 풍부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소년과 소녀의 시선에 끼어드는 보석 사냥꾼 룸펜은 역사를 반영한 악당이다. 실제로
히틀러는 전쟁 중에 다양한 미술, 예술품을 모아 고향 린츠 박물관에 모아두려 했다. 룸펜은 영원한 삶을 약속한다는 '불꽃의 바다'를 찾고 있다.
감수성과 예술, 문화를 제거한 이들이 예술품을 찾는데 혈안이 된 모습은 아이러니하다.
달빛이 반짝이며 부풀어 오른다. 찢어진 구름들이 나무 위를 휙휙 질주한다. 나뭇잎들이
사방에서 날아다닌다. 그러나 달빛은 부는 바람에도 동요하지 않고, 베르너가
보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느리고 차분하게 구름을 뚫고, 허공을 뚫고 지나간다. 그 빛줄기들은 풀들이 드러 누운 들판에 넓게 걸쳐져 있다.
왜 빛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을까?
2권 391-3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