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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틈 ㅣ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지넷 윈터슨 지음, 허진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6월
평점 :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기념하는 호가스 ‘셰익스피어 리톨드’ 시리즈. 기다렸던 책들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시리즈 첫 권은 『겨울 이야기』를 개작한 지넷 윈터슨의 『시간의 틈』이다. 셰익스피어의 후기 희비극으로 분류되는 이 작품은 사랑과 상실, 그리고 용서에 관한 이야기다. 셰익스피어 작품 읽기를 준비하는 동안 『겨울 이야기』에도 관심이 생겼는데, 그 이유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질투가 『오셀로』와 유사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흘러간다는 점과 강력한 여성 캐릭터 파울리나가 등장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또 작품의 주인공인 페르디타와 작가 윈터슨의 개인사가 비슷하다니 『시간의 틈』에 더 관심이 갔다.
개작- 희곡을 소설로 옮기면서 얻는 효과는 시간과 배경의 제약이 사라지고, 동시에 논리적 설명이 빈 공간을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레온테스가 폴릭세네스와 헤르미오네를 의심하는 이유가 실은 리오가 양성애자였기 때문이라거나, 안티고누스의 ‘곰에 쫓겨 퇴장한다’가 토니가 ‘베어 브릿지 아래서 사망’으로 대체되는 것들……. 소설이 시작되기 전, 희곡의 줄거리 요약을 삽입하고 있으니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지 않아도 이해에는 큰 무리가 없다. 각 장의 제목은 희곡의 대사에서 가져왔으며, 등장인물의 이름과 성격도 희곡의 이미지와 대응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런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실직한 리오는 시칠리아라는 헤지펀드를 운용하면서 자산을 쌓는다. 일에서의 성공과 달리 사생활은 평탄치 않다. 리오는 아내 미미와 죽마고우 지노의 관계, 그리고 복중태아까지도 의심한다. 리오는 아내의 침실에 설치한 웹캠을 보며 미미, 지오, 폴린 세 사람의 일상에 음탕한 프레임을 씌워 분노한다. 결국 질투에 눈이 먼 그가 미미와 지노를 죽이려 들고, 아내와 친구에게 상처를 주겠다는 일념 하에 벌어진 딸 퍼디타의 납치는 딸의 실종과 아들 마일로의 사망, 미미와의 이혼으로 끝난다. 16년 후, 뉴 보헤미아에서 솁과 클로의 보호아래 자란 퍼디타는 젤과 사랑에 빠진다. 젤의 아버지인 지노가 솁의 가게 플리스에 찾아오면서 출생의 비밀도 밝혀진다.
원작에서 레온테스는 뜬금없이 질투를 일으키는데 소설에서는 설명이 붙으면서 이야기가 아주 재밌어진다. 소년 시절 리오와 지노는 부모에 방치되었고, 자연스레 가까워진다. 어느 날 키스를 하고 얼마 후엔 몸을 겹치고 ‘특별한 사이’가 되지만- 리오의 실수로 지노가 절벽에서 떨어진 후 회복하는 동안 두 사람은 멀어진다. 서로를 원하면서도 모호한 우정으로 포장된 채 세월이 흐른다. 많은 사람들을 거쳤지만 두 사람 다 사랑에 빠지진 않았다. 그리고 미미의 등장. 특별한 미미, 그녀와 헤어진 1년. 사랑을 깨달은 리오는 지노에게 미미를 되찾아달라 부탁하고, 프랑스를 찾은 지노는 미미와 사랑에 빠진다. 지노는 호모섹슈얼이고, 미미는 가장 사랑하는 친구의 아내가 될 사람이다. 두 사람은 거기까지였고 리오와 미미는 결혼한다.
그렇다면 지노와 미미의 관계를 의심하고, 질투한 리오도 나름 합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리오의 열여섯, 지노를 잃을 뻔했던 공포. 그 트라우마가 미미를 잃을 수 없다는 광기로 발현된 것이다. 하지만 질투의 대상은 여전히 모호하다. 리오는 지노에게 질투한 것일까, 미미에게 질투한 것일까? 그렇게 세 사람의 관계는 16년 동안 동결된다. 리오와 미미의 사랑을 증거했던 아들 마일로가 사망하면서, 그리고 또 다른 증거인 딸 퍼디타가 사라지면서. 그리고 리오가 지노를 두 번째로 죽이려고 하면서……. 세 번째는 견딜 수 없다며 도망친 지노는 게임 개발에 매달린다. 언젠가 리오에게 이야기했던 꿈의 게임, 미미가 들려준 제라르 드 네르발의 꿈속에 나온 천사 이야기를 말이다. 사랑과 시간의 비행을 가능하게 할 천사의 깃털을 모으는 게임. 그렇게 ‘시간의 틈’을 메울 수 있는 게임.
두문불출하는 지오, 조각상이 된 미미, 괜찮은 듯 괜찮지 않은 리오. 게임 속에서 세 사람은 만나고 또 만나지 않는다. 소설의 전반부를 휘몰아친 상처가 치유되는 데에는 16년이 걸린다. 부모에게 버려졌지만 입양되어 사랑받은 퍼디타, 부모에게서 버려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젤이 자라는 동안이다. 서로에게 반한 두 사람의 결합으로 이야기는 또 다른 구원의 계기를 얻는다. 원작과 다른 점은 지노가 폴릭세네스처럼 두 사람의 결합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업둥이 퍼디타의 운명은 작가 지넷 윈터슨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윈터슨 역시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려져 독실한 오순절 교회파 부부에 입양된다. (퍼디타를 기른 솁이 오순절 교회파 신자다.) 지넷의 열여섯에 찾아온 첫사랑은 리오와 지노, 퍼디타와 젤이 경험한다.
현대사회의 특징인 다양성도 빼 놓을 수 없다. (윈터슨의 삶처럼)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은 리오와 지노, 이후 등장할 로레인의 삶이 보여준다. 인종적 다양성은 원작과 달리 솁과 클로가 흑인이라는 점에서 또 그들 고유의 문화를 향유하는데서 찾을 수 있다. 왕과 신하, 백성으로 나뉘어졌던 신분제는 현대에 와 경제적 차이로 구분되지만, 솁과 리오의 대화에서 인간은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종교 아래 자라난 지넷 윈터슨, 그녀가 한 소녀와 사랑에 빠져 경험한 자각은 첫 소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 윈터슨은 『겨울 이야기』를 개작함으로써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들려준다.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작품 속에는 ‘떨어진다’는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영어로는 fall, 불어로는 tomber. 가을이기도 하고 추락이기도 하고, 사랑에 ‘빠지는’ 것이기도 하고. ‘시간’ 역시 중요한 키워드다.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다 생각하지만 과거가 바로 뒤를 그림자처럼 쫓아오고 있다.’, ‘일어난 일을 되돌리는 것’. 지노가 과거를 돌려보겠다며 게임에 매달리는 것은 어떠한가. 과거에 박제돼버린 미미와 과거를 회상하며 고통스러워하는 리오는 어떠한가. 지넷 윈터슨은 퍼디타의 입을 빌려 말한다. 역사는 반복되고 추락(fall, tomber)하지만 용서와 구원의 씨앗, 사랑은 우리 안에 있다. 그러니까 (폴린이 말한 것처럼) ‘시간에게 시간을 주어라.’
분노도 고통도 사랑도 구원도 모두 우리 내면에 있다. 셰익스피어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셰익스피어도 로버트 그린의 『판도스토-시간의 승리』을 다시 썼고, 지넷 윈터슨도 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를 다시 썼다. 윈터슨은 거기에 자신의 인생과 인생에서 얻은 깨달음도 함께 들려준다. 위대한 작가의 작품을 다시 쓰는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이야기의 힘, 그 영속성을 빛나게 하는- 이보다 더 적절한 ‘다시 쓰기’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