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무계획의 철학 - 미루는 본성을 부정하지 않고 필요한 일만 룰루랄라 제때 해내기 위한 조언
카트린 파시히.사샤 로보 지음, 배명자 옮김 / 와이즈베리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처음 업무라는 것을 시작할 때, 팀장이 보여주었던 체계적인 다이어리가
나에게는 꽤나 충격적이었다. 뭐랄까, 나는 시간을 정말 두루마리
휴지 쓰듯이 술술 풀어서 사용했구나 하는 느낌이랄까. 물론 나 역시 다이어리를 사용해오긴 했다. 하지만 내 다이어리 그리고 스마트폰의 일정표에는 데드라인이 표시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무계획의 철학>에서 미루는 습관이 있고 계획 처리에
서툰 사람을 지칭하는 ‘LOBO, Life style of Bad Organization’에게 데드라인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읽고 절로 감탄사가 나왔었다. 일을 미루는 본성에서 자유롭지 않은 나이지만, 그래도 필요한 일을 제때 해내기 위한 자구책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거기다 나도 모르게 ‘성공적인 업무 처리 영웅’과 ‘미덥지 못한 게으름뱅이’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혼때 나의 그런 성향을 남편은 영 마땅치 않게 생각했었다. 미리미리 해두면 실수할 염려도 없고 마음이 편하지 않겠냐는 남편과 그래도 한번도 늦게 처리한 적은 없다고 자신을
변호하던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마 나에게 데드라인을 알람으로라도 해놓는 습관이 없었다면, 나는 ‘미덥지 못한 게으름뱅이’로
찍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속한 세상은 주어진 사회적 부담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계획적인 사람이 되기를 요구할 때가 많다. 이 책은 독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21세기 독일은 성실성이
유일한 미덕인 ‘성실성 르네상스’를 맞이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역시 독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빨리빨리’라는 말은 성급하다는 것도 있지만 그만큼 할 일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열정’이나 ‘열심’같은 말도 한국인에게 잘 어울린다. 심지어 조금 뒤처진 사람에게 함께
가자고 하기보다는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잣대를 들이대기도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나름 당황스럽기도
했고, 이래도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솔직히 했다. 하지만
그것은 머릿속에서 이루어진 것일뿐, 마음속에서는 나 같은 사람도 많고 또 나름의 방식으로 잘 살아가고
있는거 같아 안도감을 느끼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성향을 거부하지 않고 사회에 어울려서 살 수 있게
해주는 실천적인 조언이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되었다.
사실 내적 그리고 외적인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말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도리어 그 요구를 나에게 적합한 수준으로 낮추어야 한다는 말이 신선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늘 다른 사람의 속도를 따라가려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곤 했던 나에게 로미오가 자살하는 것을 조금만 미뤘다면
줄리엣과 함께 행복하게 늙어갈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말이다. 정말이지 파이낸셜타임스
도이칠란트의 평처럼 독일인뿐 아니라 한국인의 마음의 짐 역시 크게 덜어줄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