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의 문장 - 우리가 가졌던 황홀한 천재 이상 다시 읽기
이상 지음, 임채성 주해 / 판테온하우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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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시인 이상하면, ‘오감도라는 시가 먼저 떠오릅니다. 아무래도 문학시간의 “13인의아해(兒孩)가도로로질주하오.”가 나오자 교실 안이 웃음바다가 되었던 기억이 있어서 그렇겠죠. 김상용 시인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에서 왜 사냐건 웃지요라는 구절이 나왔을 때와 비슷했죠. 그 두 시가 제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을 보면, 문학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의 분위기도 참 중요한 것 같아요.  본고사를 준비하면서 이상의 시를 몇 편 더 보기는 했지만,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할까요? 그래서 더욱 저에게는 난해한 작품을 남긴 시인으로 기억되었고, 대학교 때 과제물이었던 기형도 시인 이후로 제가 시와 멀어지기도 했어서 더욱 인연이 없었네요.

그런데 이번에 <이상의 문장>을 보면서, 이상이라는 인물에 대한 호기심이 정말 커졌어요. 이 책은 1934년부터 그가 사망하기 전까지 썼던 산문을 담고 있는데요. 짧은 삶을 살기도 했고, 그림과 건축 같이 예술적 재능이 탁월했던 그가 이상이라는 필명으로 작품 활동을 한 것은 짧다면 짧은 시간이 아닐까 해요. 그래서 그래도 소설이나 시에 비해 쉬운 편인 산문으로 그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기도 하네요. 산문들은 그가 발표한 시기나 그 주제에 따라 분류되어 있고, 한자체나 고어에는 충실하게 주석이 붙어 있어서 읽기 편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물론 선이는 내 선이 아니다. 아닐 뿐만 아니라 XX를 사랑하고, 그다음 X를 사랑하고, 그 다음……

그 다음에 지금 나를 사랑한다, 는 체 해보고 있는 모양 같다. 그런데 나는 선이만을 사랑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좋을까까지 발전한 환술(사람의 눈을 어리어 속이는 기술)이 뚝 천장을 새어 떨어지는 물방울에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창밖에서는 빗소리가 내 나태를 이러니, 저러니 하고 시비하는 것만 같은 벌써 새벽이다

영화로 잘 알려진 금홍으로 분류된 이야기들을 보면, 사랑에 대한 그의 시선이 어렴풋이 보이는 듯 합니다. 마치 오감도라는 시를 선이나 나로 바꿔서 읽어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도 들어서 슬쩍 제 맘대로 해보기도 했었네요. 그렇게 해보니, 기괴하다고 느껴지던 그 시가 조금은 다르게 느껴지더군요.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나, 더욱 내 마음대로 될 수 없는 타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처럼 다가왔거든요.

심지어 빗소리마저 자신의 나태를 탓하는 듯 했던 이상, 그래서일까요? 4부였던 멜론에 실린 권태라는 글도 기억이 납니다. 산의 곡선마저 단조롭고, 벌판의 색조마저 녹색일 뿐이고, 그렇게 모든 것이 권태로웠던 하루를 그리고 있는데요. 얼굴에 닿는 세숫물마저 미지근하고, 자는 것마저, 심지어 자살을 생각하는 것마저 권태롭기만 했던 그의 하루였지요. 어쩌면 시인의 운명이었을까요? 남들보다 예민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시선 속을 따라가면서 한 켠으로는 안타까움마저 느껴집니다. 그의 삶을 돌아보면, 예민하기만 한 자신의 영혼을 달래고 보살피기에도 헛헛한 시간이 아니었을까 해요.

5부였던 거울은 제목이 정말 딱 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편지 글이라 조금 더 편하게 읽혔고, 그를 비치는 거울과 같은 관계들, 그리고 그가 바라보는 거울과 같은 세상을 살펴볼 수 있었거든요. 물론 시에 비해서 쉽다는 것이지, 결코 쉬운 글은 아니었지만, 이상에 대해서 더 알게 되고, 또 더 알고 싶게 만들어주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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