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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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갖고 있는 작가의 글을 읽을 때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그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한 통행증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모디아노도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을 통해 집중력을 요구하는 그만의 세계를 창조해냈다. 그가 창조한 세계는 기억, 상실, 추적으로 설명 가능한,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세계였다. 훌륭한 작품을 읽을 때는 어떤 것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것을 채우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해야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이 독자라고 불리는 이들의 책임감일 것이다.

 

<불확실함을 더 불확실하게 만들기>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한 시대의 거인이 되었다. 그에게 세계란 불확실한 어떤 것, 그래서 결국 의심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으로 인식됐고 그 결과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의심하는 나라는 명제를 토대로 인간을 설명했다. 모디아노는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간다. 그의 인물은 의심할 수 없다. 오직 의심하는 나를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계를)의심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의심하는 나의 존재를 확신해야 한다. 그러나 모디아노는 불확실한 세계에 불확실한 나를 설정함으로써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그래서 오로지 찾아야만 하는 독특한 세계를 만들어냈다. 부유하고 방황하는(상투적이지만 정확한 형용사인 ‘안개의’ 를 사용함으로써 역자는 정확히 그의 세계관을 포착했다) 세계. 그 세계를 탐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몇 가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기억에 관하여>

 

 우리의 기억은 믿을 만한 어떤 것인가? 그렇지 않다. 프로이트는 기억이(특히 유아기 때의 기억이) 조작된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기억의 불확실함을 증명했다. 그러나 자신의 과거를 찾는 ‘기’는 자신의 기억이 확실하다는 것을 가정해야 자신의 존재 자체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정보를 수집한다. 그리고 그 수집된 정보와 자신의 느낌(가슴을 찌르는 듯 한 통증)을 대조해가며 정보가 자신의 과거와 일치하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그것이 맞는다고 느껴지면 과거의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하나씩 확신한다. 그러나 그 확신은 언제나 느낌에 판정을 받기 때문에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그가 자신을 ‘프레디’로 착각하는 부분은 그 후에 그가 확신하는 ‘페드로 맥케부아’가 아닐 수도 있음을 증명하는 단서가 된다. 게다가 그가 자신이 맥케부아라는 것을 증명해줄 사진을 보고 타자에게 자신과 비슷하게 생겼냐고 질문할 때에도 아무도 그것이 ‘당신이 사진의 사람과 동일인물이 맞습니다’라고 얘기해주지 않는다. 그들은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그의 과거를 흐리게 하는데 일조할 뿐이다. 이러한 나의 주장은 어쩌면 그가 페드로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두 사람 - 경마기수 빌드메르, 그가 자신의 옛 아파트에서 찾아낸 지인 -이 있다는 것으로 억지 주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혹시 그들이 그가 상상해 낸 인물들이라면? 기억이 과거의 ‘나’를 찾기 위해 조작해낸 조작의 증거들이라면? 물론 이런 주장은 매우 억지스럽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과거가 안개처럼 희미하다는 데에서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할 수도 있다.

 

<과거에 대하여>

 

 그렇다면 우리의 과거는 우리의 실존을 증명해주는 근거로서 충분한 역할을 하는 것일까? 만약 위의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기억이 지금 살아있다는 현실보다 과거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좋다는 것일까? 모디아노는 마치 그것을 긍정하는 듯하다. 그의 등장인물들은 과거를 찾아 헤맨다. 그리고 그것을 찾기 전까지는 현실의 나를 발견할 수 없다. ‘기’에게는 위트가 편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모디아노는 과거에 이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현실의 부재, 그리고 과거에 대한 이상적 희망>

 

 보통 우리는 이상을 꿈꿀 때에 ‘미래’를 상상한다. 유토피아라는 말은 미래에 다가올 이상향이라는 것으로 설명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유토피아는 절대 다가올 수 없을 미래를 설정함으로써 현실을 타락시킨다. 미래가 막혀버린 우리는 어디에 기대야할까? 모디아노는 그 해답으로 과거를 선택한다. 그리고 과거를 지워버린다. 그에게 과거란, 우리가 꿈꾸던 어떤 것, 즉 유토피아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현실에게 실현된 가장 이상적인 공간으로서의 파라다이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현실은 이렇게 비참한가? 과거가 파라다이스로서 존재했다면 현실이 비참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는 그렇기 때문에 그가 과거를 지웠다고 믿는다. 다가올 미래가 긍정적이지 않다면, 지금의 현실이 비참하다면, 과거를 행복했던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위해 과거를 지워버린다. 그리고 현실을 무시한 채 과거를 찾아다니자. 그래서 과거‘만’이라도 행복했다고 믿자. 이것이 어쩌면 내가 모리아노의 소설을 읽고 느낀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기’ 혹은 ‘페드로’가 만들어낸 과거를 믿지 않는다. 그의 과거는 그가 상상한 것보다 조금은 더 행복한 것이길 바라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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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눌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1
헤르만 헤세 지음, 이노은 옮김 / 민음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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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에 관하여

 

 ‘자유’라는 명사가 나에게 언제부턴가 완전한 긍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단어가 되었다. 나는 자유로운 사람을 부러워하고, 심지어 질투하지만 왠지 그들처럼 될 수 없다는 열등감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자유는 항상 포기를 동반한다. ‘어떤 것으로부터 자유롭다’라는 의미는 ‘어떤 것을 포기한다’라는 의미와 동의어로 느껴진다. 예컨대 ‘크눌프’에서 주인공 크눌프는 직업과 가족으로부터 자유롭다. 동어반복이지만, 그는 직업과 가족을 포기한다. 그래서 그는 자유로움을 느끼기 위해 삶의 안락과 안정성을 포기해야 한다. 그렇다, 핵심은 안정성인 것 같다. 자유는 바람과 같이 유려하고 흘러가는 삶을 살 순 있지만 절대로 고정될 수 없는 어떤 액체성을 띄고 있다. 우리는 뿌리를 땅에 두기 때문에 그 액체성을 견디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을 스스로 선택한 크눌프를 부러워할 수밖에. ‘크눌프’에서는 크눌프에 대한 3가지 이야기가 나오는 데, 모두 그의 머무름과 떠남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3편의 이야기에서는 거의 모든 단어들이 그의 머무름을 서술하는데 할애되지만 이상하게도 그 글을 읽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은 항상 떠남에 관한 어떤 것이다. 그가 마을에 머무를 때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를 걱정하고 조롱하고, 그에게 충고하지만 그 이상으로 설득하지 않는다. 그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되고 스스로도 어떤 생산성을 가지지 못하지만 그와 있을 때는 누구나 즐거워한다. 그리고 그가 떠남으로써 누구나 아쉬워한다. 그리고 그를 부러워한다. 내가 할 수 없기 때문에 부러울 수 있는 것, 이것이 타인이 크눌프에게 느끼는 감정이다. 반면, 내가 하지 않기에 그를 조롱하는 것 또한 동반된다. 그렇다면 왜 ‘나’는 그처럼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일까?

 

생산성에 관하여

 

 “크눌프 같은 인물들이 저를 사로잡습니다. 그들은 ‘유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해롭지도 않습니다. 더구나 유용한 인물들보다는 훨씬 덜 해롭습니다. …… 만약 크눌프처럼 재능 있고 영감이 풍부한 사람이 그의 세계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면, 크눌프뿐만 아니라 그 세계에도 책임이 있다고.”

-헤르만 헤세

 

 그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못한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는 어쩌면 시인이 될 수도 있었고 자연 연구가, 신부, 교사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그는 시인이 되지 못했고, 자연 연구가, 신부, 교사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들은 비록 행복하지 않더라도 대장장이가 되어야 하고, 의사가 되어야 하고, 석공이 되어야 하며 무두장이가 되어야 한다. 왜냐면 불행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기 때문에. 어쩌면 그것은 ‘시선’이라고 불러야할 지도 모른다. 어쨌든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에게 ‘어떤 것’으로 인정받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어떤 것’이기 때문에 크눌프를 ‘아무 것’도 되지 않았다고 그를 격려할 수 있는 것이다. 헤세는 이런 매력적인 인물을 창조하고 나서 그가 살아갈 수 없다면(세계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면) 그 뿐만 아니라 세계에도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크눌프가 살아 갈 수 있는 세계, 혹은 크눌프가 살아갈 수 없는 세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헤세가 썼던 텍스트 안에서는 크눌프가 살아갈 수 있지만 지금 우리 세계에서는 그가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비록 유용하지 않지만, 오히려 유용한 인물보다 훨씬 덜 해롭지만 그는 단지 ‘아무 것’도 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살아갈 수 없다.

 

*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크눌프를 읽은 날 자음과 모음에서 나온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책을 샀다. 아직 첫 장 밖에 읽지 못했지만, 그는 자유를, 크눌프와 거의 비슷한 방법으로의 자유를 얘기하고 있었다. 세상이 주는 정보, 시선으로부터 무능해지기, 그럼으로써 자신의 방법을 선택하기. 이것이 그의 자유였다. 그는 모든 것이 두렵고 불안하지만, 게다가 전혀 멋진 일도 아니지만 책이(니체가) 그에게 한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의 자유를 좀 더 배워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또 한 가지. 어쩌면 이 세계에서도 크눌프의 존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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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토끼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7
존 업다이크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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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을 해보자. 우리가 어렸을 때 가지고 놀았던 동그라미 형태의 미로가 있다. 우리는 원의 외부에서 시작해서 원의 가운데, 구심점으로 들어가야 한다. 래빗은 소설의 제목 그대로 달린다. 그는 말하자면, 미로의 벽을 부수고 달리는 자다. 그는 ‘규칙을 지키지 않는 자’고 ‘못된 아저씨’다. 그리고 그와 함께 달리는 사람들은 미로를 규칙대로 달리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상하게도 함께 구심점에 도착한다. 문제는 업다이크는 그 구심점의 이름을 죄라고, 그들이 함께 도착하게끔 연결되어있는 희미한 끈을 죄의식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달려라, 모두 같은 곳으로>
 
 이런 것이다.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누구나 아는 규칙들이 있다. 그것을 벗어난다 해도 범법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참는다. 그러나 그것들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성격이 나쁘다고 비난한다. 래빗이 그런 경우다. 그가 제대로 달렸을 때는 농구코트가 마지막이었다. 그가 농구코트를 벗어나자마자 새로운 길이 주어지지만 그 길은 그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살짝 벗어나기로 결심한다. 그것을 그의 아내(재니스)와 아내의 가족(스프링어 부부)은 부도덕이라고 부르고 그의 부모(앵스트롬 부부)는 실수라고 부르고, 어쩌면 루스는 행운이라고 부를 것이고, 그는 모험이라고 부르겠지만 그 이름과 상관없이 어쨌든 그는 단지 자신의 길을 벗어난 것이다. (위의 비유에 따르자면 벽을 부수고 미로를 통과하는 것이다.) 그의 탈선은 재니스가 출산할 때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출산이라는 위대한 사건이 그를 다시 질서 속으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된다. 업다이크의 “달려라, 토끼”는 여기까지 통속적인, 어쩌면 여느 소설과 비슷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항상 그의 문장은 빛난다. 글을 읽고 그 느낌이 읽고 있는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것은 정말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일어난 일들은 정말 ‘사건’이라고 불릴만 하다. 새로운 생명의 죽음. 그 죽음으로 인해서 죽음을 묘사하기 앞에 있는 서술들은 모두 ‘죽음’이라는 단어 안으로 포섭된다. 래빗의 가출, 재니스의 술버릇, 스프링어 부부의 비난, 애클스 목사가 래빗을 설득하는 것 까지. 그들을 엮어주는 것은 죄의식이라는 이름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함께 죄라는 이름의 구심점으로 빨려들어간다.
 
<죄라는 이름의 축복>
 
 동의하는 사람들도,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논란이 많은 부분이므로) 개인적으로 기독교에서 가장 부담스러운 것은 원죄다. 우리는 모두 태어나기 이전에 죄가 있다는 것. 그래서 이 원죄를 현세에서 열심히 회개하고 믿으면 내세에서 천국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죄를 아는 것, 그리고 그것을 회개하는 것은 축복의 가장 큰 열쇠가 된다. (이것에 반대하는 기독교들도 많다는 것을 압니다. 개인적인 생각이라고 밝히겠습니다. 그리고 심하게 단순화시킨 것도 인정하겠습니다.) 이것은 현세-내세를 아우르는 보다 넓은 범위에서도 이루어지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그리고 비록 끔찍하기는 하지만 이 비극(아이의 죽음)이 마침내 해리와 재니스를 신성한 방식으로 결합시켰다고 생각해요.” 다시 미로의 예를 들자면, 해리와 재니스 등의 인물들은 죄라고 이름붙인 구심점에 도착한다. 그 곳에 도착하니 하나의 구멍이 있다. 그들은 그 구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들이 그 구멍을 통해 도착한 곳은 또 하나의 미로다. 그 두 개를 연결해주는 통로 -즉 이전 미로의 구심점과 이후 미로의 출발점을 연결해주는 통로 - 는 두 가지의 이름이 있다. 죄, 혹은 신성함. 죄를 통해서만 신성해질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인생의 가장 큰 모순이고 개인적으로 업다이크가 말하고자 하는 가장 큰 의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들은 그 구멍을 통과하고 깨닫는다. 어쩌면 우리가 처음 시작했던 그 지점 이전에 또 다른 미로가 있었다는 것, 이렇게 미로들이 끊임없이 이어져있어서 우리는 뫼비우스 띠를 달리는 토끼처럼 지칠 때 까지 달려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는 죄와 축복을 반복해서 경험한다는 것, 이 달리기의 또 다른 이름은 인생이라는 것을.
 
<또 다른 탈주 - 되돌아옴>
 
나는 재니스와 해리의 아이의 죽음을 이 소설에서 가장 추격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충격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업다이크는 여기에서 새로운 재미를 준다. 해리가 또 다시 규칙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는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죄의식이라는 사슬을 끊음으로써 ‘우리’라는 범주 밖으로 벗어나버린다. 그리고 그는 루스에게 간다. 그리고 루스와 함께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고 한다. 아니, 어쩌면 새로운 질서-없음을 만들려했을 지도 모른다. 그를 강박적으로 누르고 있는 어떤 것에 저항하기 위해서, 혹은 그것으로부터 의도적으로 멀어지기 위해서. 그러나 그가 미로를 탈출했다고 해방감을 느끼는 순간 그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이 그 미로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새로운 미로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탈주와 귀환을 반복하다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된다. 텅 빈 상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태. “그는 달린다. 아, 달린다. 달린다.”로 끝나는 마지막 문장은 왠지 모르게 어떤 해방감을 주기보다 속임수 같은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그는 자살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인생이라는 굴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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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어릿광대의 견해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9
하인리히 뵐 지음, 신동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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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릿광대>

 

 이야기의 화자는 ‘어릿광대’라고 스스로를 칭한다. 그는 희극배우가 아니다. 그 미묘한 어감의 차이는 소설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이 소설은 어릿광대와 희극배우 사이에 있는 어감의 차이가 확실히 드러날 때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드러난다. 그게 어떤 점에서 중요한가? 일단 그가 스스로를 어릿광대라고 말한다는 것은 스스로가 귄위를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아니,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말은 어쩌면 틀린 말일지도 모른다. 그는 중요시하지 않는 게 아니라 경멸한다. 그것은 그의 삶과 관련되어 있다. 그는 나치가 지배적인 헤게모니일 때, 그것을 전면으로 부정한 사람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나치, 나치였다가 전세가 바뀌었을 때 나치임을 부정한 자, 나치임을 인정하고 사과한 자에 대해 비난할 권리가 생기고 나치가 아닌 자를 존경할 권리가 생긴다. (심지어 그는 어느 누구와도 동지애를 갖지 않는다. 그저 그런 사람을 존경할 뿐이다.) 이렇게 그는 하나의 헤게모니가 흥하고 다시 망하는 과정을 지켜본 관찰자의 신분을 지난다. 그 시대에 저항했다는 것은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새로운 시각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첫 번째로 지금 지배적인 것은 언젠가 비난받을 수 있다는 것. 두 번째로 지배적인 헤게모니에 종사했던 누군가가 다시 같은 이유로 그것을 부정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비겁해질 수 있다는 것. 이를 종합해본다면, 그가 말을 시작하는 시점은 천주교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누구나 그것을 믿는 세상에서 저항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과거의 자신의 누이였던 헨리에테의 죽음이 트라우마로 남아 계속해서 지배적인 권력에 거부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현재 지배적인 천주교에 저항하는, 그렇기에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인 것이다. 이게 그가 스스로를 어릿광대로 부르는 이유가 아닐까?

 

<마리>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를 예술가라고 부르며 좋아했던 과거의 연인 마리의 변심을 잊지 못하고 마리를 찾아 고향으로 가는 과정.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마리는 누구인가? 그는 왜 그녀에게 집착하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마리는 헨리에테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헨리에테는 화자인 한스가 어렸을 때 가장 좋아하는 누이였다. 그는 그녀의 행동, 말투에서 사랑스러움을 느낀다. 그런데 그녀는 어머니의 강요로 인해 대공방위대에 지원한 후 피살된 것에 굉장한 트라우마가 있다. 아마 여기에서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권위에 대한 거부감이 생겼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누이를 죽인 이데올로기가 실패했다는 것, 그럼으로써 누이의 죽음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도. 마리는 어떤가? 그녀는 천주교인이지만 천주교인이 아닌 한스와 동거할 정도로 그를 좋아한다. 그녀는 그를 선택하기 위해 자신의 신념에 죄를 짓는다. 이것은 한스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안겨주면서도 그녀의 선택을 기뻐할 수 밖에 없는 이중적인 잣대가 된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종교적 신념을 지지하면서도 그것에 동조할 수 없다. 그들의 생활은 행복하게 잘 유지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가 그에게 자신의 신념을 강요했을 때, 그리고 그것을 거부했을 때 발생한다. 그는 마리의 요구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는 그런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서 마리는 한스에게 소외감을 느끼고 비어져있는 공간을 천주교로 대체한다. 그렇게 한스는 또 다시 사랑했던 여인을 헤게모니에게 빼앗기게 된다. 그리고 그 방식 또한 헨리에테에게 행해졌던 것처럼 굉장히 모순적이다. 이 모순은 오로지 어릿광대인 그에게만 보인다, 왜냐면 그는 믿지 않음으로써 그것의 외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여인을 찾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다.

 

<견해>

 

 제목이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라는 사실은 글을 읽고 난 후에 약간의 의문을 남긴다. 왜냐하면 글에서 화자가 나타내고자 하는 성격이 ‘주장’ 이나 ‘비판’에 걸맞지 ‘견해’라는 단어로 표상하기에는 조금 억지스러운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 견해치고는 강경하다. 그런데 그의 모든 말은 ‘견해’라고 불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영원히 소수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소수가 되는 것. 그렇게 됨으로써 합리적 의심과 비판이 견해가 되어버리는 것. 이것이 하인리히 뵐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 아닐까? 작가가 제목으로 소설의 성격을 드러낸다는 점, 등장인물간의 관계가 그 시대의 모든 것을 대변할 수 있다는 점만으로 이 소설이 좋은 소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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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코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1
존 치버 지음, 박영원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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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너무 많이 보았다>

 

 이상적인 가족.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편과 그의 우람한 어깨에 기대어 행복한 미소를 짓는 아내. 그들 사이에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아이들. 이런 이들만이 존재할 거라는 환상을 가진 사람이 아직도 있을까? 완벽한 가족에 대한 이상은 깨졌다. 그리고 우리는 환상이 깨지는 것을 너무 많이 봤다. 유진 오닐, 에드워드 올비, 아서 밀러, 도리tm 레싱 등등. 완벽한 가족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려고 투자했던 시간만큼 이 이데올로기를 파괴하려는 시간이 소모되었다. 그들의 작업이 실제로 그런 이상이 허상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할지라고 현대에 사는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봐온 우리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작가에 대한 무례라고 생각되어지지 않을까 고민하지 말자. 왜냐면 예술이란 목적론에 입각해서 바라보면, 즉 작가의 의도에 맞게 그것을 읽어버리면 광고지와 비슷해져버리니까. 하나의 목적이 없다는 것, 그래서 그것으로부터 수많은 목적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 예술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힘이 아닐까?

 

<팔코너, 데카르트의 좌표>

 

 마약중독자에 형제 살인을 저지른 한 남자를 보기 전에 공간을 바라보자. 팔코너라는 교도소를. 이들이 여기 갇혀있는 이유가 뭘까? 죄를 지어서이다. 그런데 그들은 기존에 있던 법이라는 체계 자체를 무시하거나 파괴하거나, 어쨌든 그것들을 지키지 않았던 자들이다. 그런 자들을 갱생, 혹은 격리의 목적으로 가둔 곳이라면 그 곳은 좀 더 체계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팔코너가 묘사되는 부분들은 너무나 엉성하다. 일단 2가지 사실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첫 번째가 조디의 탈출이다. 그는 감옥을 너무 쉽게 탈출한다. 그리고 두 번째가 더 월의 폭동 이후의 팔코너의 모습이다. 팔코너의 간수들은 두려움을 숨기지 못한다. 그들은 훈련받은 사람들이 아니다. 누군가의 선동이 있었다면 죄수들이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로 글을 읽는 내내 폭동이 일어나는 순간이 있을 거라는 짐작을 계속 했다.) ‘허술’하다고 표현 할 수 있는 이런 곳에서 왜 죄수들은 탈옥하지 않는가? 무엇이 그들을 그곳에 있게 하는가? 데카르트를 가져와보자. (데카르트는 패러것이 교도소에서 유일하게 읽는 철학자이다. 왜 데카르트인가?) 그의 코기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명제는 어떤 증거를 끊임없이 찾아가는 명제이다. 그는 결국 자신이 직접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명제를 찾고 그래서 과학에 의존하게 된다. 그리고 중세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그는 신을 포기해야 했으며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이성에 의한 육체, 즉 감정의 통제이다. 그는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고, 인간이 스스로 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그래서 인간이 위대하다는 것을, 동물들은 그저 기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해야 했다. 그래서 합리적 이성과 비합리적인 감정과 만나는 지점을 반드시 만들어야 했다. 그것이 ‘송과선’이다. 이는 정신(이성)과 육체(감정)이 만나 정신에 따라 육체가 통제받는 기관이다. 송과선이 바로 팔코너이다. 합리적 이성이 감정을 지배하는 곳. 팔코너에서는 모든 감정이 필요에 따라 분출되고 통제된다. 그들의 감정은 팔코너가 제한하는 이상의 선을 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에 통제를 받으며 머물 수 있고 간수들은 그들을 안전하게 감시할 수 있다. 죄수를 통제하는 그 무엇은 폭력도, 억압도, 회개하려는 마음도 아니다. 합리적 이성이라는 이름이다. 그것들은 물론 죄수가 아닌 자들과 죄수를 분리시켜주는 것이기도 하고 죄수 스스로가 자신이 죄수라고 인식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팔코너에서 철저하게 죄수의 신분으로 옳다고 생각되는 어떤 것에 의해 통제된다. 그런 예들은 많지만, 정말 수도 없이 많지만 가장 큰 사건은 패러것의 마약치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치킨이 말한다. “우릴 기니피그처럼 실험할 생각인 거야. 우리는 실험쥐라고. 예전에 후두염에 걸린 녀석이 하나 있었지. 새로운 약을 그놈한테 쓰더군. 이틀인가 사흘인가 연속으로 주사를 놨어. 하지만 의무실로 데려가기도 전에 놈은 결국 죽어버렸지.”

 

간호사가 친절하게 말한다. “우리도 자네가 언제 알아챌지 궁금했어. 자넨 거의 한 달 동안 가짜 약을 받았어. 이제 깨끗해진 거야, 친구.”

 

이 두 인물의 대사에서 차이점은? 앞의 것은 죽음을 뒤에 것은 치료를 의미한다는 것.

이 두 인물의 대사에서 공통점은?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무엇인가가 주입된다는 것. 즉 통제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약이 치료된다는 것은 좋은 것인가? 적어도 패러것에게는 그렇지 않는 듯하다. 사실 그들에게는 그렇게 할 권한이 없다. 그들이 마약이 나쁘고 치료되어야할 대상이라고 여기는 것은 어떤 법적인 기준인데, 모순적이게도 패러것에게 ‘진짜’ 마약을 투여해야한다고 정한 것도 법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합리적인 어떤 것을 믿고 패러것에게 그것을 시행했고 패러것은 그것을 몰랐다. 그는 통제받는지도 모른 채로 통제받고 있었다. 이것이 팔코너가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통제하는 기준도, 통제받는 것도 아무것도 모르는 곳. 그러나 통제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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