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갖고 있는 작가의 글을 읽을 때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그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한 통행증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모디아노도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을 통해 집중력을 요구하는 그만의 세계를 창조해냈다. 그가 창조한 세계는 기억, 상실, 추적으로 설명 가능한,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세계였다. 훌륭한 작품을 읽을 때는 어떤 것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것을 채우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해야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이 독자라고 불리는 이들의 책임감일 것이다.

 

<불확실함을 더 불확실하게 만들기>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한 시대의 거인이 되었다. 그에게 세계란 불확실한 어떤 것, 그래서 결국 의심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으로 인식됐고 그 결과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의심하는 나라는 명제를 토대로 인간을 설명했다. 모디아노는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간다. 그의 인물은 의심할 수 없다. 오직 의심하는 나를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계를)의심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의심하는 나의 존재를 확신해야 한다. 그러나 모디아노는 불확실한 세계에 불확실한 나를 설정함으로써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그래서 오로지 찾아야만 하는 독특한 세계를 만들어냈다. 부유하고 방황하는(상투적이지만 정확한 형용사인 ‘안개의’ 를 사용함으로써 역자는 정확히 그의 세계관을 포착했다) 세계. 그 세계를 탐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몇 가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기억에 관하여>

 

 우리의 기억은 믿을 만한 어떤 것인가? 그렇지 않다. 프로이트는 기억이(특히 유아기 때의 기억이) 조작된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기억의 불확실함을 증명했다. 그러나 자신의 과거를 찾는 ‘기’는 자신의 기억이 확실하다는 것을 가정해야 자신의 존재 자체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정보를 수집한다. 그리고 그 수집된 정보와 자신의 느낌(가슴을 찌르는 듯 한 통증)을 대조해가며 정보가 자신의 과거와 일치하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그것이 맞는다고 느껴지면 과거의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하나씩 확신한다. 그러나 그 확신은 언제나 느낌에 판정을 받기 때문에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그가 자신을 ‘프레디’로 착각하는 부분은 그 후에 그가 확신하는 ‘페드로 맥케부아’가 아닐 수도 있음을 증명하는 단서가 된다. 게다가 그가 자신이 맥케부아라는 것을 증명해줄 사진을 보고 타자에게 자신과 비슷하게 생겼냐고 질문할 때에도 아무도 그것이 ‘당신이 사진의 사람과 동일인물이 맞습니다’라고 얘기해주지 않는다. 그들은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그의 과거를 흐리게 하는데 일조할 뿐이다. 이러한 나의 주장은 어쩌면 그가 페드로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두 사람 - 경마기수 빌드메르, 그가 자신의 옛 아파트에서 찾아낸 지인 -이 있다는 것으로 억지 주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혹시 그들이 그가 상상해 낸 인물들이라면? 기억이 과거의 ‘나’를 찾기 위해 조작해낸 조작의 증거들이라면? 물론 이런 주장은 매우 억지스럽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과거가 안개처럼 희미하다는 데에서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할 수도 있다.

 

<과거에 대하여>

 

 그렇다면 우리의 과거는 우리의 실존을 증명해주는 근거로서 충분한 역할을 하는 것일까? 만약 위의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기억이 지금 살아있다는 현실보다 과거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좋다는 것일까? 모디아노는 마치 그것을 긍정하는 듯하다. 그의 등장인물들은 과거를 찾아 헤맨다. 그리고 그것을 찾기 전까지는 현실의 나를 발견할 수 없다. ‘기’에게는 위트가 편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모디아노는 과거에 이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현실의 부재, 그리고 과거에 대한 이상적 희망>

 

 보통 우리는 이상을 꿈꿀 때에 ‘미래’를 상상한다. 유토피아라는 말은 미래에 다가올 이상향이라는 것으로 설명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유토피아는 절대 다가올 수 없을 미래를 설정함으로써 현실을 타락시킨다. 미래가 막혀버린 우리는 어디에 기대야할까? 모디아노는 그 해답으로 과거를 선택한다. 그리고 과거를 지워버린다. 그에게 과거란, 우리가 꿈꾸던 어떤 것, 즉 유토피아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현실에게 실현된 가장 이상적인 공간으로서의 파라다이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현실은 이렇게 비참한가? 과거가 파라다이스로서 존재했다면 현실이 비참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는 그렇기 때문에 그가 과거를 지웠다고 믿는다. 다가올 미래가 긍정적이지 않다면, 지금의 현실이 비참하다면, 과거를 행복했던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위해 과거를 지워버린다. 그리고 현실을 무시한 채 과거를 찾아다니자. 그래서 과거‘만’이라도 행복했다고 믿자. 이것이 어쩌면 내가 모리아노의 소설을 읽고 느낀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기’ 혹은 ‘페드로’가 만들어낸 과거를 믿지 않는다. 그의 과거는 그가 상상한 것보다 조금은 더 행복한 것이길 바라는 것일지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