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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어릿광대의 견해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9
하인리히 뵐 지음, 신동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평점 :
<어릿광대>
이야기의 화자는 ‘어릿광대’라고 스스로를 칭한다. 그는 희극배우가 아니다. 그 미묘한 어감의 차이는 소설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이 소설은 어릿광대와 희극배우 사이에 있는 어감의 차이가 확실히 드러날 때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드러난다. 그게 어떤 점에서 중요한가? 일단 그가 스스로를 어릿광대라고 말한다는 것은 스스로가 귄위를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아니,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말은 어쩌면 틀린 말일지도 모른다. 그는 중요시하지 않는 게 아니라 경멸한다. 그것은 그의 삶과 관련되어 있다. 그는 나치가 지배적인 헤게모니일 때, 그것을 전면으로 부정한 사람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나치, 나치였다가 전세가 바뀌었을 때 나치임을 부정한 자, 나치임을 인정하고 사과한 자에 대해 비난할 권리가 생기고 나치가 아닌 자를 존경할 권리가 생긴다. (심지어 그는 어느 누구와도 동지애를 갖지 않는다. 그저 그런 사람을 존경할 뿐이다.) 이렇게 그는 하나의 헤게모니가 흥하고 다시 망하는 과정을 지켜본 관찰자의 신분을 지난다. 그 시대에 저항했다는 것은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새로운 시각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첫 번째로 지금 지배적인 것은 언젠가 비난받을 수 있다는 것. 두 번째로 지배적인 헤게모니에 종사했던 누군가가 다시 같은 이유로 그것을 부정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비겁해질 수 있다는 것. 이를 종합해본다면, 그가 말을 시작하는 시점은 천주교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누구나 그것을 믿는 세상에서 저항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과거의 자신의 누이였던 헨리에테의 죽음이 트라우마로 남아 계속해서 지배적인 권력에 거부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현재 지배적인 천주교에 저항하는, 그렇기에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인 것이다. 이게 그가 스스로를 어릿광대로 부르는 이유가 아닐까?
<마리>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를 예술가라고 부르며 좋아했던 과거의 연인 마리의 변심을 잊지 못하고 마리를 찾아 고향으로 가는 과정.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마리는 누구인가? 그는 왜 그녀에게 집착하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마리는 헨리에테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헨리에테는 화자인 한스가 어렸을 때 가장 좋아하는 누이였다. 그는 그녀의 행동, 말투에서 사랑스러움을 느낀다. 그런데 그녀는 어머니의 강요로 인해 대공방위대에 지원한 후 피살된 것에 굉장한 트라우마가 있다. 아마 여기에서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권위에 대한 거부감이 생겼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누이를 죽인 이데올로기가 실패했다는 것, 그럼으로써 누이의 죽음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도. 마리는 어떤가? 그녀는 천주교인이지만 천주교인이 아닌 한스와 동거할 정도로 그를 좋아한다. 그녀는 그를 선택하기 위해 자신의 신념에 죄를 짓는다. 이것은 한스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안겨주면서도 그녀의 선택을 기뻐할 수 밖에 없는 이중적인 잣대가 된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종교적 신념을 지지하면서도 그것에 동조할 수 없다. 그들의 생활은 행복하게 잘 유지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가 그에게 자신의 신념을 강요했을 때, 그리고 그것을 거부했을 때 발생한다. 그는 마리의 요구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는 그런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서 마리는 한스에게 소외감을 느끼고 비어져있는 공간을 천주교로 대체한다. 그렇게 한스는 또 다시 사랑했던 여인을 헤게모니에게 빼앗기게 된다. 그리고 그 방식 또한 헨리에테에게 행해졌던 것처럼 굉장히 모순적이다. 이 모순은 오로지 어릿광대인 그에게만 보인다, 왜냐면 그는 믿지 않음으로써 그것의 외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여인을 찾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다.
<견해>
제목이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라는 사실은 글을 읽고 난 후에 약간의 의문을 남긴다. 왜냐하면 글에서 화자가 나타내고자 하는 성격이 ‘주장’ 이나 ‘비판’에 걸맞지 ‘견해’라는 단어로 표상하기에는 조금 억지스러운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 견해치고는 강경하다. 그런데 그의 모든 말은 ‘견해’라고 불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영원히 소수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소수가 되는 것. 그렇게 됨으로써 합리적 의심과 비판이 견해가 되어버리는 것. 이것이 하인리히 뵐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 아닐까? 작가가 제목으로 소설의 성격을 드러낸다는 점, 등장인물간의 관계가 그 시대의 모든 것을 대변할 수 있다는 점만으로 이 소설이 좋은 소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