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토끼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7
존 업다이크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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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을 해보자. 우리가 어렸을 때 가지고 놀았던 동그라미 형태의 미로가 있다. 우리는 원의 외부에서 시작해서 원의 가운데, 구심점으로 들어가야 한다. 래빗은 소설의 제목 그대로 달린다. 그는 말하자면, 미로의 벽을 부수고 달리는 자다. 그는 ‘규칙을 지키지 않는 자’고 ‘못된 아저씨’다. 그리고 그와 함께 달리는 사람들은 미로를 규칙대로 달리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상하게도 함께 구심점에 도착한다. 문제는 업다이크는 그 구심점의 이름을 죄라고, 그들이 함께 도착하게끔 연결되어있는 희미한 끈을 죄의식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달려라, 모두 같은 곳으로>
 
 이런 것이다.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누구나 아는 규칙들이 있다. 그것을 벗어난다 해도 범법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참는다. 그러나 그것들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성격이 나쁘다고 비난한다. 래빗이 그런 경우다. 그가 제대로 달렸을 때는 농구코트가 마지막이었다. 그가 농구코트를 벗어나자마자 새로운 길이 주어지지만 그 길은 그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살짝 벗어나기로 결심한다. 그것을 그의 아내(재니스)와 아내의 가족(스프링어 부부)은 부도덕이라고 부르고 그의 부모(앵스트롬 부부)는 실수라고 부르고, 어쩌면 루스는 행운이라고 부를 것이고, 그는 모험이라고 부르겠지만 그 이름과 상관없이 어쨌든 그는 단지 자신의 길을 벗어난 것이다. (위의 비유에 따르자면 벽을 부수고 미로를 통과하는 것이다.) 그의 탈선은 재니스가 출산할 때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출산이라는 위대한 사건이 그를 다시 질서 속으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된다. 업다이크의 “달려라, 토끼”는 여기까지 통속적인, 어쩌면 여느 소설과 비슷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항상 그의 문장은 빛난다. 글을 읽고 그 느낌이 읽고 있는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것은 정말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일어난 일들은 정말 ‘사건’이라고 불릴만 하다. 새로운 생명의 죽음. 그 죽음으로 인해서 죽음을 묘사하기 앞에 있는 서술들은 모두 ‘죽음’이라는 단어 안으로 포섭된다. 래빗의 가출, 재니스의 술버릇, 스프링어 부부의 비난, 애클스 목사가 래빗을 설득하는 것 까지. 그들을 엮어주는 것은 죄의식이라는 이름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함께 죄라는 이름의 구심점으로 빨려들어간다.
 
<죄라는 이름의 축복>
 
 동의하는 사람들도,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논란이 많은 부분이므로) 개인적으로 기독교에서 가장 부담스러운 것은 원죄다. 우리는 모두 태어나기 이전에 죄가 있다는 것. 그래서 이 원죄를 현세에서 열심히 회개하고 믿으면 내세에서 천국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죄를 아는 것, 그리고 그것을 회개하는 것은 축복의 가장 큰 열쇠가 된다. (이것에 반대하는 기독교들도 많다는 것을 압니다. 개인적인 생각이라고 밝히겠습니다. 그리고 심하게 단순화시킨 것도 인정하겠습니다.) 이것은 현세-내세를 아우르는 보다 넓은 범위에서도 이루어지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그리고 비록 끔찍하기는 하지만 이 비극(아이의 죽음)이 마침내 해리와 재니스를 신성한 방식으로 결합시켰다고 생각해요.” 다시 미로의 예를 들자면, 해리와 재니스 등의 인물들은 죄라고 이름붙인 구심점에 도착한다. 그 곳에 도착하니 하나의 구멍이 있다. 그들은 그 구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들이 그 구멍을 통해 도착한 곳은 또 하나의 미로다. 그 두 개를 연결해주는 통로 -즉 이전 미로의 구심점과 이후 미로의 출발점을 연결해주는 통로 - 는 두 가지의 이름이 있다. 죄, 혹은 신성함. 죄를 통해서만 신성해질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인생의 가장 큰 모순이고 개인적으로 업다이크가 말하고자 하는 가장 큰 의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들은 그 구멍을 통과하고 깨닫는다. 어쩌면 우리가 처음 시작했던 그 지점 이전에 또 다른 미로가 있었다는 것, 이렇게 미로들이 끊임없이 이어져있어서 우리는 뫼비우스 띠를 달리는 토끼처럼 지칠 때 까지 달려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는 죄와 축복을 반복해서 경험한다는 것, 이 달리기의 또 다른 이름은 인생이라는 것을.
 
<또 다른 탈주 - 되돌아옴>
 
나는 재니스와 해리의 아이의 죽음을 이 소설에서 가장 추격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충격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업다이크는 여기에서 새로운 재미를 준다. 해리가 또 다시 규칙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는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죄의식이라는 사슬을 끊음으로써 ‘우리’라는 범주 밖으로 벗어나버린다. 그리고 그는 루스에게 간다. 그리고 루스와 함께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고 한다. 아니, 어쩌면 새로운 질서-없음을 만들려했을 지도 모른다. 그를 강박적으로 누르고 있는 어떤 것에 저항하기 위해서, 혹은 그것으로부터 의도적으로 멀어지기 위해서. 그러나 그가 미로를 탈출했다고 해방감을 느끼는 순간 그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이 그 미로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새로운 미로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탈주와 귀환을 반복하다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된다. 텅 빈 상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태. “그는 달린다. 아, 달린다. 달린다.”로 끝나는 마지막 문장은 왠지 모르게 어떤 해방감을 주기보다 속임수 같은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그는 자살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인생이라는 굴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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