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보다가 문득 든 생각. 비주류가 뭘까? 


비주류. 


주류, 라는 말이 지금 나에게 왠지 모를 얄미움이 있다. 인기가 많고 돈도 많고 공부도 잘하는 다른 별에 사는 고등학생처럼, 어쩌면 항상 정직하고 예의바른데 그렇다고 지루하거나 재미없지 않은 이런 이미지. 그에 비해 비주류는 번개머리에 껄렁껄렁하고 시덥잖은 소리만 하고 항상 인기있고 싶은데, 그리고 또 좋아하는 여자도 있어서 그 여자한테 잘보이려고 하면 할 수록 밉상이 되는, 그런 불운의 이미지. 라고 하면 될까? 


영화계에서는 (위의 쓸때없는 묘사와는 다르게) 김기덕, 이라는 거대한 비주류가 있다고 한다. 그가 비주류라면 주류/비주류의 기준은 무엇일까? 충무로와 김기덕? 잘 생각해보면 비주류라고 칭해질 수 있는 어떤 것(그게 사물이든 사람이든)들은 항상 주류로부터 인정받는다는 사실이다. 주류가 싫어 비주류가 되려고 노력했든, 주류가 되지 못해 비주류가 되려고 노력했든 언제나 그들이 비주류로 머물 수 있는 것은 주류의 인정, 혹은 선택 때문이다. 그 증거가 바로 앞에서 예를 든 김기덕 감독인데, 만약 그가 영화제 수상경력이 없었더라면 그는 영화계 - 비주류가 아닌 비영화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탓인지 그의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순수한 존경이 없는 듯 느껴진다. 누군가에게 김기덕 감독님 영화는 어때요? 라고 묻는다면 아, 그 사람 영화는 강렬하고 좋은데 뭔가 좀.. 이 뭔가 좀이 바로 비주류에게 걸리는 어떤 것이랄까? 


여자, 성소수자, 유색인종, 장애인, 혹은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 그들은 처음에는 박해의 대상이었다가 시대가 변하고, 그 변함의 증거를 내밀듯 그들의 위치가 보호의 대상이 되었다. 누구나 말한다. 여자들과 남자들을 차별하지 말자고.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너무 많이 당해왔으니까. 마치 이런 느낌이다. 나는 너를 차별하고 싶지만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차별하지 않을 거야. 도덕이라는 것, 상식이라는 것이 예전의 부당함을 가로막는듯한 모습. 여기에는 평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 본 영화에서 레즈비언인 여자에게 형사가 묻는다. 


여자들은 뭘 하나요? 

무슨 질문을 하고 싶으신거에요? 

여자들은 어떻게 하나요?

그걸 꼭 답해야 하나요? 

아니, 아니,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개인적으로 궁금해서요.

손으로 해요! 하나로! 두개로! 세개로! 씨발새끼. 


여기에서, 남자는 절대 여자에게 형사의 심문이라는 공권력을 들이대지 않는다. 그건 정말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이기 때문에. 폭력은 이렇게 변질된다. 공적인 것에서 사적인 것으로. 


사람들에게 물어본적이 있다. 너는 왜 동성애를 싫어하느냐고. 대답은 다양하지만 그 중 제일 터무니없는 대답은 그게 정상적이라는 것이었다. 그게 정상적인거야. 너는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자는 것이 상상이 가? 그건 비정상적인거야. 세상이 그걸 허용하면 애들은 어떻게 낳고? 그러다 인구가 줄어서 세상이 망하는거야. 라는. 


엄청난 비약에 말도 안되는 소리였지만 나는 거기에서 남자와 여자가 잔다, 라는 것에는 납득했던 것 같다. 성기와 성기의 결합만이 완전하다는 것은. 그런데 누가 알겠는가, (비약하자면) 수 많은 방법으로 여자와 남자는 결합할 수 있는데(예를들어 손)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성기와 성기의 결합만이 완전한 어떤 것이라는 주장만 사라지면 그 사람은 여-여, 남-남의 섹스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내가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아닌데 나는 남녀의 섹스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그게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이냐는 문제는 별도로 나에게 섹스는 항상 그 섹스라는 단어 + 어떤 것, 이라는 공식으로 항상 무언가가 딸려들어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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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몽상가들을 봤다. 혁명과 영화는, 어떤 관계일까? 더 넓게 혁명과 예술은, 혹은 유희는 어떤 관계일까? 문득 드는 생각은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을 바꿀 의지와 좋은 방향을 제시할 능력이 있는 것이 혁명가라면 예술은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것. 


2. 이렇게 본다면 혁명을 선동하는, 혹은 혁명을 예찬하는 영화는 그 존재가치가 없어진다. 어쩌면 그것이 불쾌하다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신영철 평론가의 말. "예술이 제도의 혁명에 먼저 나가면 나머지 두 혁명은 유예된다. 예술은 먼저 예술 자체를 혁신하면서 우선 인간을 바꾸고, 멀게는 제도의 변혁에 기여하겠다는 '가망 없는 희망'에 헌신해야 한다. 그래야 셋 다 바뀐다." 마르크스와 랭보와 아방가르드 단체를 인용한 그의 글에서 진실(이라고 개인적으로 판단 할 수 있는)이 읽힌다. 그리고 항상 진실들은 가슴을 답답하게 할 정도로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의 영화 중에, 예술 자체가 혁신한 영화가 얼마나 되는가? 


3. 예컨대 남쪽으로 튀어 같은 영화들이 그렇다. 영화의 정치성에 대해 말하자면 적어도 공감의 측면에서,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뛰어나다. 그러나 이것이 '영화 안에서' 뛰어난가? 쉽게 긍정할 수 없다. 사실 예술 자체의 혁신에 관해서 이 영화는 별로 관심이 없어보인다. 단순히 관심의 차원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부족하지만 어쨋든. 결국 이 영화는 '정치색이 강한' 영화로 남을 것이다. 이 거추장한 수식이 붙어버리면 영화는 더 이상 영화가 아니게 된다. 그저 개인의, 사회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선전물로 되어버릴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이런 영화를 찍을래? 라고 물어봤다면 아니, 라고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주는 메세지는 너무나 매혹적이기 때문에. 그러나 이 말이 영화가 매혹적이라는 것과 같을 수 없다. 


4.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이것들은 방법론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정지영 감독은 언제나 말한다(동시에 행한다). 영화는 언제나 운동이라고. 그러나 운동으로서의 운동과 영화로서의 운동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그 사이의 골이 정지영 감독에게 종이 한 장 차이로 미세하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그 골은 그 곳에 있으니까. 문제는 이것이다. 혁명, 즉 어떤 사태에 대한 즉각적인 실천과 그 사태를 바라보는 시선 중에서 무엇이 더 낫다라고 누가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 '낫다'라는 판단 후에는 보다 좋음 - 좋음 이라는 어떤 보이지 않는 수직관계가, 그 수직관계에서 어떤 폭력이 발생하지 않을까? 물론 이것을 변명이라고 비난하는 자들에게 아니야, 라고 말할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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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랙 캐피털리즘 - 균열혁명의 멜로디 아우또노미아총서 39
존 홀러웨이 지음, 조정환 옮김 / 갈무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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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랙 캐피털리즘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자본, 자본은 항상 나에게 비현질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만질 수 없기에 추상적이며 어쩌면 형이상학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것으로의 자본이 실재의 사물을 사고 팔 수 있는 것, 더 나아가 가치가 매겨지지 않는 것들까지 가치 안으로 포섭되게 하는 것. 지금의 자본주의가 아니었던 시절부터, 말하자면 금세공상에서 처음 예탁증서를 발급해주었던 시절부터 자금은 그저 종이 위에 쓰여 있는 허상의 불과했다. 실제로 금고에 있는 금보다 훨씬 많은 양의 금이 유통되었고 금고에 있는 금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그저 상징으로서의 금이었다. 그것들은 점차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그 인정은 어느새 실재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자본의 창조는 곧 자본에 의한 종속이다. 은행에서 유통하는 자본의 시스템은 태생적으로 불공평하다는 것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텐데 왜 우리는 그것에 대항하지 않는가? 언제부터 우리의 삶이 종이쪼가리에 종속되었으며, 언제부터 우리가 그것에 의해 감정을 느끼고, 그것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하지만 이미 상황은 너무 악화되었고 어쩌면 되돌릴 수 없다, 라고 애기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역사의 종말을 선언한 이후로 공산주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혁명으로 자리 잡음과 동시에 다시는 시도하지 말아야 할 이데올로기가 됐으며 자본주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결점을 극복할 것처럼 변화했다. 그 변화는 언제나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내포했지만 기대는 번번이 무산되었다. 현실적인 대안은 존재하지 않고 언젠가 도래할 미래혁명 말고는 현재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종교인들처럼 현실의 고통을 묵묵히 참으며 버티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지젝의 추상적인(이해하기 어려운) 제안과 유토피아적 넋두리>


 두 가지의 제안이 있다. 하나는 지젝의 제안. 그의 '실패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는 대한민국에 살기 때문에 레드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던 나에게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게 해준 제안이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의 글은 너무 어렵다.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은 나에게는 이해하기도 힘들뿐더라 너무 철학적이기 때문에 현실적인 제안으로 들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는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의 프레데리크 로르동이 말하는 하나의 대안이다. 그의 칼럼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써 코뮤니즘 밖에 떠오르지 않던 나에게 자본주의 안에서 어쩌면 새로운 자본주의가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만큼. 그러나 매력이 큰 만큼 실현가능성은 낮아진다. 그가 말하는 사회는 그저 하나의 공상으로 존재하는 유토피아에 불과하다. 나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그래서 조금의 부담은 감수 할 수 있지만 삶을 포기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이대로 당할 수도 없는 사람들에게 존 홀러웨이의 균열혁명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아니오, 우리는 하지 않겠소'에 대한 불가항력으로써의 바틀비와 슈퍼트램프 또는 순수성의 문제>


 조금 과장을 해본다면, 자본에 온 몸으로 대항하는 두 명의 인물이 있다. 우선 허먼 멜빌의 바틀비는 '하지 않는 편을 택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표현되는 월가에서 그들을 위해 일하지 않는 것을 택함으로써 균열을 만들어낸다. 그의 언행은 이해 불가능하다. 그의 선택하지 않음은 자본에 대항하는 반-자본으로써 저자가 말한 행위에 해당할지도 모르겠다. 또 다른 인물이 있다. 그는 인 투 더 와일드의 슈퍼 트램프, 즉 일하지 않는 자이다. 그는 바틀비보다 조금 더 나아가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며 자신만의 가치를 찾아나서고 타인에게 그것을 권하기까지 한다. 이것 또한 행위에 해당할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책을 읽고 바로 떠오른 이 두 인물은, 그러나 결말이 그리 좋지 않다. 그들은 어떻게 되는가? 굶어죽거나 독사한다. 이것은 자본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낸 하나의 이야기지만, 어쩌면 자본에 대항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또 다시 자본으로 편입되어버리는 동일화과정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 패배주의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순수성의 문제이다. 그들은 결코 자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치가 비자본적인 순수성을 가지고 있을 때 더욱 빛난다고 믿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순수성은 없다. 순수성이 있다면, 균열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우리는 무인도에 사는 것이 아니며 좋든 싫든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자본주의라는 것을 받아들여야한다. '우리의 균열들은 순수한 균열들이 아니다. 우리의 존엄은 순수한 존엄이 아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와 단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의 단절은 여전히 그것의 모반을 갖고 태어난다. 우리가 뭔가 다른 것을 하려고 아무리 애쓸지라도, 자본주의의 모순들은 우리의 반란 내부에 그 자신을 재생산한다. 우리가 아무리 반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해도 우리는 순수한 주체들이 아니다. 자유화의 공간이자 고통스런 파열로서의 균열들은 우리 내부조차도 횡단한다."


<중요한 자기 결정의 탐구, 자본과 비대칭성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균열은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행위이다. 우리는 균열을 일으킬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 더 이상의 추상노동을 거부해야 한다. 추상은 개별적 예들에서 하나의 동일성을 추려내(추) 사물의 특징을 그 동일성으로 규정(상)하는 것으로써 간편하게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론이다. 그런 의미에서 추상은 필연적으로 개별자들에게 폭력을 가하며(동일성이 중요시되면서 차이들이 제거됨으로써) 동시에 동일성의 강제를 만들어낸다. 이 강제는 차이를 언급한다는 자에게 몰상식, 비상식적이라는 비난을 가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폭력의 양상이다. 추상은 이렇게 이중의 폭력으로써 작용한다. 노동은 초역사적인 것도, 보편적인 것도 아니다. 이것은 개별적인 ‘행위’가 되어야 한다. “이제는 의식적인 삶-활동으로, 구제적 행위로 돌아갈 시간이다.”


<보다 나은 가능성을 위한>


 여기에 하나의 전환이 있다. 노동을 위한 투쟁과 노동에 대한 투쟁의 차이점.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것과 자본주의 만들기를 그치는 것. 이것은 이 책에서 내가 느낀 가장 값진 경험이고 이론이다. 너무나 간단하지만, 사실 그렇기에 자본에게 속고 있었던 것을 저자는 정확하게 지적한다. 자본을 만들어내는 것은 노동이다. 그렇기에 해고를 위한 투쟁 - ‘우리에게 일자리를 달라, 우리에게 일할 시간을 달라’ - 의 형식은 반-자본이라기보다 자본적이다. ‘우리는 노동력을 팔아 자본을 만들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일거리를 달라.’ 이것은 삶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반-자본이라는 것은 아니다. 균열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일을 할 것이다.’ 혹은 ‘아니오. 당신이 바라는 식으로는 하지 않을 것이오.’ 노동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노동에 대한 투쟁. 이 차이는 크다.

 노동이 자본을 만드는 것이라면, 결론적으로 자본을 만드는 것은 자본가가 아니라 노동하는 우리이다. 이 사유가 매력적인 것은 자본에 대항하는 행위는 우리 앞에 서 있는 거대한 괴물과 맞서 싸우는 것도 아니고, 절망한 나머지 희생적인 영웅을 그리며 미래의 혁명을 기다리는 것도 아닌, 그저 우리가 노동하기를 멈추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자본을 만드는 것을 멈추기만 하면 된다. 저자는 그렇다고 그게 혁명이 쉬워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현실을 과장할 필요도, 왜곡할 필요도 없이 정확히 바라보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그 시선에서 행위를 만들어 내는 것, 각자의 실험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단지 거부하는 것만이 아니라, 단지 창조하는 것만이 아니라, 거부하고 - 창조하는 것. 이것이 현실에서 조금씩 나아가는 방법이다.

<다가올 미래>


 ‘균열이 확장되어 거대한 금이 되었을 때, 차가 더 이상 다니지 못할 정도로 도로에 잡초가 무성해졌을 때, 오게 될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이 질문은 분명히 멍청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반드시 어떤 것(자본주의를 대체한 어떤 것)으로 존재함으로써 동사적 행위에서 다시 명사로의 흡수, 동일화 과정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균열을 일으킨 후에 오는 세상은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이것은 중요한 문제다. ‘어떤 세계’ 단순히 공간적인 것만을 지시하고 있는 반면, ‘어떻게’ 라는 질문은 공간과 시간 그것의 존재 자체에 질문들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지금이나 다가올 미래에나 중요한 것은 새로운 공간의 창출이 아니다. 창조하기- 이다. 가능한 세계를 위한 미완의 실험을 계속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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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거울 속에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헬렌 맥클로이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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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거리는 간단하게 설명 가능하다. 한 여교사의 도플갱어(생령 혹은 페치)가 다른 이들에게 계속 보인다. 그리고 다른 여교사가 도플갱어에 의해 살해된다. 그리고 그 도플갱어의 주인공인 여교사 역시 심장마비로 즉사한다. 여기에서 한 남자가 개입된다. 그는 두 여자를 죽일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 여자들이 죽음으로써 그에게 이익이 돌아간다.

 이상하게도 여기에서는 해석학적 시각이 존재한다. 범인은 그의 주장(즉 자신이 분장한 것은 첫 번째였으며 그 이후에 도플갱어는 초현실적인 것이다)을 마지막 페이지까지 철회하지 않는다. 소설의 거의 대부분을 미스터리에 초점에 맞춘 저자에게 그 미스터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 그리고 탐정을 통해 확실한 범죄의 동기, 방법, 개연성을 독자들에게 설명하는 것은 그 소설의 완성도와 관련되어 중요하게 다뤄진다. 언제나 추리 걸작이라 불리는 소설들은 스토리가 어찌됐건 탐정이 범인을 잡는 과정 자체는 정확성에 기인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탐정이 등장한다는 것은 반드시 범인이 잡힌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매클로이는 그것을 스스로 거부했을까? 왜, 추리 소설에서 열린 결말을 추구했을까?


 정신분석학은 안타깝게도 21세기에는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해석’으로 취급된다. 예컨대 심리학과에 다니는 대학생들은 프로이트를 믿는 사람들을 바보라고 부른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잠재의식’, ‘자아와 이드’, ‘히스테리’ 등의 용어와 해설들은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과 논증이라고 믿어질 만큼의 정확성 때문에 관습처럼 굳어진 결과물일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우리는 과학시간에 그것들을 배우지 않는가? 여기에는 그것의 진실/거짓 여부를 믿느냐, 안 믿느냐가 개입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진실로 믿는가, 거짓으로 믿는가, 라는 문제에서 보편적으로 후자의 입장에 선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또한 과학적 사실이 언제나 정확한가, 그렇지 않은가 라는 문제도 관련이 없다. 작가가 말해 듯 언제나 어제의 과학적 사실은 오늘의 신화로 취급되는 문제니까.

 그렇다. 이것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 소설에서 사건을 중심으로 나오는 인물들의 대사는 그저 하나의 주장에 불과하다. 이것은 정신분석학과 관련이 깊은데, 왜냐하면 정신분석학이란 언제나 증명불가능한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신분석학이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심리, 욕망, 의도 등 절대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그저 ‘인간’을 보여주려 했을 뿐이다. 두 가지, 혹은 여러 가지의 주장들이 모여 하나의 구도를 이룬다. 우리는 이 주장들 중에 어떤 것이든 선택할 수 있다. 도플갱어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바이닝이 배질에게 오해받는 것뿐이며 그는 무죄라고 주장할 것이다. 철저하게 검증된 과학만을 믿는 사람들은(즉 미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배질의 추리가 정확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주장을 증명할 그 어떤 단서도 소설 내에서 나오지 않는다.


 여기에서 차페크의 말을 곱씹어 볼만 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악은 없다. 언제나 옳다고 믿는 진리와 다른 진리 간의 충돌만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악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진리가 없다는 것이다. 아니, 악과 진리 모두가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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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2disc)
이창동 감독, 윤정희 출연 / UEK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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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시인이 사과를 꺼낸다. 일부러 준비해왔단다. 그리고 묻는다. 우리가 언제 사과를 본 적이 있냐고. 사과의 그림자도 관찰하고, 이리저리 만져도 보고, 한 입 베어 물어도 보고. 그렇다. 우리는 사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적어도 난 한 번도 사물을 그렇게 관찰한 적이 없다. 그저 그렇게 있다고 믿을 뿐. 사물들은 존재론적으로 확실하고 인식론적으로 모호하다. 우리는 그것들을 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순전히 우리들의 오해인 것이다. 확장시켜보자. 안다는 것은 어쩌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소통(서로 안다고 가정하고 상호 교류하는 것)이란 근본적으로 오해를 기초로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시인이 다시 말한다. 무엇이든 진짜로 보게 되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고. 그 이후에 시가 쓰이는 것이라고.

 

소통이라는 이름의 오해

 영화는 집요하게 소통불가능성을 이야기한다. 마치 세상을 안다고 가정된 것들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예컨대 아네스와 5명의 중학생들이 그렇고, 양미자 할머니와 학부모들이 그렇고, 양미자와 그녀의 딸이 그렇고 양미자와 종욱이가 그렇다. 그들은 주고, 받는다. 그렇지만 주고받지 않는다. 그들의 대화는 교류하지 않는다. 그들도 그것을 알고 있지만 서로 소통이 가능하다는 자기기만으로 애써 무시해버린다. 그들의 행동, 말이 전달 될 때 그것들을 가로막는 것은 '폭력(아네스/중학생들, 양미자/학부모들) 혹은 '사랑(양미자/딸, 양미자/종욱)이라는 이름의 벽이다. 처음에 나는 집요하게 시를 쓰려는 양미자 할머니의 시도는 마치 현실의 도피로 보았다. 그러나 그녀에게 도피할 현실이 있는가? 역으로 그녀는 현실은 가상이고 시를 쓰려는 시도가 현실과 직접적으로 대면하려는 것이라고 믿는 것 아닐까?

 

시를 쓰는 양미자의 방법

 시를 너무나 쓰고 싶은 양미자 할머니는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돌아다닌다. 그녀는 꽃을 보고 꽃말을 찾고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빛을 보고 땅에 떨어진 열매를 본다. 그녀는 그것들을 관찰하고 만져보고 느끼려한다. 그리고 글을 써본다. 이상하게 글들, 시구들은 써지지만 시가 써지지 않는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세상은 가혹하다. 시를 쓰려고 마음을 먹은 순간, 그녀에게서 낱말을 빼앗아 간다. 옥타비오 파스는 주저 활과 리라에서 이렇게 말한다. "말은 인간 자신이다. 우리는 말로 이루어져 있다. 말은 우리의 유일한 실재이거나 혹은 적어도 우리의 실재를 표현하는 유일한 증거이다." 그녀에게 말을 잃는다는 것은 '앞으로 말을 못한다.'라는 일차원적인 문제가 아니고 그녀의 실존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반면 세상은 공정하다. 그녀에게 말을 빼앗아 간 후 그것을 슬퍼할 시간도 주지 않고 시를 쓰는 다른 방법을 알려준다.

"시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찾는 거잖아요. 그런데 만날 저런 와이당이나 하고. 꼭 시를 모독하는 것 같아요."

 그녀는 시를 아름다움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그녀는 '시의 그림자도 관찰하고, 이리저리 만져도 보고, 한 입 베어 물어도 본 적이 없다. 그녀는 이것들을 하기 전에는 시 = 아름다움이라는 하나의 공식으로 그녀의 머릿속에 자리 잡아 있을 뿐이다. 그녀는 이제 시를 쓰기 위해 만지고 관찰하고 먹어봐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아니 그런 자연스러운 순간이 찾아온다. "순수한 가능성의 세계, 창조 이전의 세계가."

 

법과 합의

 한 소녀가 죽었다. 그녀의 죽음에 책임을 지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이 침묵한다. 그들은 '진정성 있는 사죄'를 제외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죽음을 덮으로 현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성공할 것이다. 이제 그들은 죽음을 덮음으로써 그에 따른 의무 역시 '덮어버렸다.' 합의라는 이름의 창은 그들을 안전이라는 성으로 대려가 양심의 가책이라는 불청객을 쫒아낼 것이다. 종욱이는 낄낄거리며 다시 무한도전을 볼 것이고 세상은 예전처럼 잘 돌아갈 것이다. 양미자 함머니는 아네스의 사진을 본 후에 그것이 잘못됐다고 느끼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녀는 깨닫는다. 부모들과의 합의는 죽은 아네스에게 어떠한 사과도 하지 못한다고. 그 고통이 그녀에게 시를 쓰게 하는 원동력이다.

 어쩌면 양미자 할머니는 종욱이에게 시를 쓰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에게 법적 처벌은 합의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이게 토론에서 가장 논쟁이 있었던 부분이었던 같은데요. 그녀가 종욱이를 자발적으로 신고했든, 그렇지 않았든 그녀는 종욱이가 법적 처벌을 받는 것에 아무런 감흥이 없었을거라 예상합니다. 왜냐하면 합의와 마찬가지로 그것도 아네스를 뺀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이렇게 사죄는 가장 비합리적이고 비생산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방법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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