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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아스 피녜이로 - 방랑하는 영화, 모험하는 영화
마티아스 피녜이로 지음, 시네마토그래프 엮음, 강탄우 옮김 / 코프키노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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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하우스 모모 기획전에서 마티아스 피녜이로 7편의 장편 영화를 모두 상영했습니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작가 영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티아스 피녜이로의 책을 구매하게 됐습니다. 7편의 영화 각 파트에 맞춰 인터뷰, 비평 등이 실려있어 생각을 정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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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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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아픈 이유는, 우리 세대는 감정을 공유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198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제일 부럽다, 고. 그들은 싸워야 할 무언가가 있었으며 동어반복으로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로 묶일 수 있었다. 배부른 소리라는 것을 안다.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을 우리가 누리고 있으니까. 그러나 누가 온전히 그것을 누리고 있는가. 화가 났다. 우리의 사랑이 그만큼 아프지 않고 우리 중 누군가의 죽음이 그렇게 슬프지 않아서. 그 시대는 박물관처럼 그렇게 서 있다. 나를 보고 아파주세요, 나를 보고 슬퍼해주세요. 그러나 나는 이해할 수 있어도 느낄 수 없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마저도 그것을 온전히 느낄 수 없을거라 생각한다. 그 감정은 온전히 그 시대를 위한 것이었으므로. 청춘이라는 단어는 그럴 때만 쓸 수 있다. 오직 그럴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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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과 언어 - 신경제에서 전쟁경제로 아우또노미아총서 42
크리스티안 마라찌 지음, 서창현 옮김 / 갈무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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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리만 브라더스가 파산했다. 같은 달, AIG 또한 정부에 의해 인수되었다. 이것이 2008년 금융 위기의 시작이었다. 금융 자본은 통화주의적인 경제학자들의 주장처럼 노동과 생산과정들로부터 상대적으로 자기생성적이지도, 일부 맑스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허구적인 가치들과 순수한 투기로 이루어진 것도 아님을 위기를 통해 스스로 증명했다. 금융은 대단히 ‘실제’적이었으며 그 피해 또한 실제적은 차원에서 발생했다.


 자본과 언어는 어떤 의미에서 예언적이다. 마라찌의 분석은 2001년 금융 불황을 겨냥했지만 그 화살은 2008년에도 적중했다.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금융자본, 그리고 그것을 작동시키는 방식을 ‘언어적’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금융이 언어적인가?


 첫째, 그는 관습에 관해 설명한다. ‘관습이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다수의 참가자들에게 인지적인 압박으로 작용한다. 특정한 역사적 시기 동안 일어나는 관습의 반복이란 다른 게 아니라, 거의 항상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관습의 관례적인 본성은 망각되며,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관습이 사물의 본성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관습의 기능은 대단히 언어적이다.’ 그러나 그의 설명대로 이것은 그렇게 믿을 뿐 관례적인 본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공황 상황에서 관습은 ‘다시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관습의 관한 비교적 정확한 예는 금융 위기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금융 위기에 몰아넣었던 수많은 주식회사들은, 그들을 자체적으로 평가하는 신용평가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평가 시 그들이 공식적으로 받은 등급과 실제의 등급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을 비판했던 언론에 대한 그들의 변론은 이런 것이었다. “당신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하고 있고,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으므로 어느 누구도 애널리스트에 의존하면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이것은 관습의 공적 본성을 정확히 대변하는 것으로 읽혀진다.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것(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투자한다는 것)은 개인적 판단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더 정보에 밝은, 나머지 세계의 판단에 의지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수의 또는 평균의 행위를 따르려고 노력한다.

 언어에 대해 생각해보자. 소쉬르에 의하면 언어는 인간 동물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관습(랑그)인 동시에 개인적인 발화(파롤)이다. 이 두 가지 범주 중 하나만 해당하는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언어는 어떻게 금융과 연관되는가? 마라찌가 표현했듯 금융이라는 랑그Langue finaciere가 있다. 금융이라는 랑그는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기에 금융에 참여하는 참가자(파롤)를 가져야한다. 연금기금의 ‘조용한 혁명’이 정확히 그것에 해당한다. 그들은 “노동자의 저축을 자본주의적 변형/재구조화의 과정들을 탄탄히 묶어둠으로써 포드주의 급여 관계에 내재하는 자본과 노동의 분리를 제거하게” 된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저축하지 않고 주식에 투자함으로써 더 이상 자본(금융)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자본 일반의 ‘선한 작전’에 공통의 관심사를 갖는다.” 포스트 포드주의에서 말하는 금융화의 역사는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저축은 더 이상 국력의 신장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도 자본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다. 1929년부터 2008년 금융 위기까지, ‘공황’이라고 표상되는 수많은 위기가 이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자본이 우리를 위협하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항상 변해왔다. 예컨대 “예전에 토마토가 높은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노동인구의 임금을 낮추기 위해 파괴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사회적 소통의 수단들은 일반지성의 신체의 평가를 절하하기 위해 해체된다.”

 자본은 더 이상 우리가 노동이라고 말하는 것만을 착취하려 하지 않는다. 사무실에서, 공장에서 정해진 시간 동안 일을 하며 통제되고 감시되는 역할의 자본은 포드주의의 자본이다. 신경제에서는 비-노동(휴식, 열정, 정서, 지식) 등을 노동 안으로 포섭시킴으로써 신체 자체를 통제하려고 한다(수없이 인용되어왔던 광고를 생각해보라, 우리는 편하게 TV를 보면서 노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신경제의 위기는 일반지성을, 지구 전체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그 기동적인 신체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더 이상 해체는 지식을 파괴하지 못한다. “오늘날 일반지성은 산 지식으로, 다중의 신체 안에 남아 있는 협력의 역량으로 이루어져있다.” 즉, 다중의 신체는 자본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퇴장에 대해 생각해보자. 퇴장은 물질적 부의 이동으로 귀결된다. 자본의 순환의 관점에서 볼 때 퇴장은 그 자체로 공황의 한 요소이다. 여기에 마라찌가 설명하는 2가지 방법의 퇴장이 있다. 금융 시장에서 주식을 판매하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에 의해, 즉 주식이 정점에 도달했다고 믿어질 때 판매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금융시장에서 이 합리성은 개별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이 함께 고려되기 때문에 모순적이다. 모두 같은 시기에 주식을 판매한다면 구매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사적 소유의 재할당 과정을 계속해서 만드는 것은 ‘가망 없는 합리성’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방법, 부의 생산이 오로지 일반지성 속에, 고정된 유형의 자본을 갖지 않는 산 노동의 협력 속에 집중될 때의 퇴장은 “다중 사이의 사회적 협력의 자유, 다중을 관통하는 언어들의 자유, 그리고 자신의 신체에 대한 다중의 소유”를 만들어낸다.

 마이클 하트는 서문에서, 금융시장의 유동성, 소통, 미래 지향성 등을 다중 해방의 예시(전도되고, 왜곡되고, 훼손된 예시일지라도)로 읽는 것이 가능한지 물었다. 신경제에서 자본주의적 통제를 벗어나는 잠재적 자율,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아래로부터 삶정치’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 아직 답변되지 않은(이 답변은 실천을 통해서 답변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하트의 질문에 비르노를 인용하여 간격을 메우도록 해본다.

 “살아 있는 신체는 국가의 행정 기구의 관심사로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힘의 유형의 기호이며, ‘아직 대상화되지 않은’ 노동의 시뮬라크라, 또는 맑스가 뛰어난 표현으로 말한 것처럼, ‘주체성으로서의 노동’의 시뮬라크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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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랙 캐피털리즘 - 균열혁명의 멜로디 아우또노미아총서 39
존 홀러웨이 지음, 조정환 옮김 / 갈무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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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랙 캐피털리즘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자본, 자본은 항상 나에게 비현질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만질 수 없기에 추상적이며 어쩌면 형이상학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것으로의 자본이 실재의 사물을 사고 팔 수 있는 것, 더 나아가 가치가 매겨지지 않는 것들까지 가치 안으로 포섭되게 하는 것. 지금의 자본주의가 아니었던 시절부터, 말하자면 금세공상에서 처음 예탁증서를 발급해주었던 시절부터 자금은 그저 종이 위에 쓰여 있는 허상의 불과했다. 실제로 금고에 있는 금보다 훨씬 많은 양의 금이 유통되었고 금고에 있는 금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그저 상징으로서의 금이었다. 그것들은 점차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그 인정은 어느새 실재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자본의 창조는 곧 자본에 의한 종속이다. 은행에서 유통하는 자본의 시스템은 태생적으로 불공평하다는 것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텐데 왜 우리는 그것에 대항하지 않는가? 언제부터 우리의 삶이 종이쪼가리에 종속되었으며, 언제부터 우리가 그것에 의해 감정을 느끼고, 그것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하지만 이미 상황은 너무 악화되었고 어쩌면 되돌릴 수 없다, 라고 애기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역사의 종말을 선언한 이후로 공산주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혁명으로 자리 잡음과 동시에 다시는 시도하지 말아야 할 이데올로기가 됐으며 자본주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결점을 극복할 것처럼 변화했다. 그 변화는 언제나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내포했지만 기대는 번번이 무산되었다. 현실적인 대안은 존재하지 않고 언젠가 도래할 미래혁명 말고는 현재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종교인들처럼 현실의 고통을 묵묵히 참으며 버티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지젝의 추상적인(이해하기 어려운) 제안과 유토피아적 넋두리>


 두 가지의 제안이 있다. 하나는 지젝의 제안. 그의 '실패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는 대한민국에 살기 때문에 레드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던 나에게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게 해준 제안이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의 글은 너무 어렵다.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은 나에게는 이해하기도 힘들뿐더라 너무 철학적이기 때문에 현실적인 제안으로 들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는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의 프레데리크 로르동이 말하는 하나의 대안이다. 그의 칼럼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써 코뮤니즘 밖에 떠오르지 않던 나에게 자본주의 안에서 어쩌면 새로운 자본주의가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만큼. 그러나 매력이 큰 만큼 실현가능성은 낮아진다. 그가 말하는 사회는 그저 하나의 공상으로 존재하는 유토피아에 불과하다. 나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그래서 조금의 부담은 감수 할 수 있지만 삶을 포기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이대로 당할 수도 없는 사람들에게 존 홀러웨이의 균열혁명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아니오, 우리는 하지 않겠소'에 대한 불가항력으로써의 바틀비와 슈퍼트램프 또는 순수성의 문제>


 조금 과장을 해본다면, 자본에 온 몸으로 대항하는 두 명의 인물이 있다. 우선 허먼 멜빌의 바틀비는 '하지 않는 편을 택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표현되는 월가에서 그들을 위해 일하지 않는 것을 택함으로써 균열을 만들어낸다. 그의 언행은 이해 불가능하다. 그의 선택하지 않음은 자본에 대항하는 반-자본으로써 저자가 말한 행위에 해당할지도 모르겠다. 또 다른 인물이 있다. 그는 인 투 더 와일드의 슈퍼 트램프, 즉 일하지 않는 자이다. 그는 바틀비보다 조금 더 나아가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며 자신만의 가치를 찾아나서고 타인에게 그것을 권하기까지 한다. 이것 또한 행위에 해당할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책을 읽고 바로 떠오른 이 두 인물은, 그러나 결말이 그리 좋지 않다. 그들은 어떻게 되는가? 굶어죽거나 독사한다. 이것은 자본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낸 하나의 이야기지만, 어쩌면 자본에 대항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또 다시 자본으로 편입되어버리는 동일화과정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 패배주의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순수성의 문제이다. 그들은 결코 자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치가 비자본적인 순수성을 가지고 있을 때 더욱 빛난다고 믿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순수성은 없다. 순수성이 있다면, 균열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우리는 무인도에 사는 것이 아니며 좋든 싫든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자본주의라는 것을 받아들여야한다. '우리의 균열들은 순수한 균열들이 아니다. 우리의 존엄은 순수한 존엄이 아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와 단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의 단절은 여전히 그것의 모반을 갖고 태어난다. 우리가 뭔가 다른 것을 하려고 아무리 애쓸지라도, 자본주의의 모순들은 우리의 반란 내부에 그 자신을 재생산한다. 우리가 아무리 반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해도 우리는 순수한 주체들이 아니다. 자유화의 공간이자 고통스런 파열로서의 균열들은 우리 내부조차도 횡단한다."


<중요한 자기 결정의 탐구, 자본과 비대칭성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균열은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행위이다. 우리는 균열을 일으킬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 더 이상의 추상노동을 거부해야 한다. 추상은 개별적 예들에서 하나의 동일성을 추려내(추) 사물의 특징을 그 동일성으로 규정(상)하는 것으로써 간편하게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론이다. 그런 의미에서 추상은 필연적으로 개별자들에게 폭력을 가하며(동일성이 중요시되면서 차이들이 제거됨으로써) 동시에 동일성의 강제를 만들어낸다. 이 강제는 차이를 언급한다는 자에게 몰상식, 비상식적이라는 비난을 가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폭력의 양상이다. 추상은 이렇게 이중의 폭력으로써 작용한다. 노동은 초역사적인 것도, 보편적인 것도 아니다. 이것은 개별적인 ‘행위’가 되어야 한다. “이제는 의식적인 삶-활동으로, 구제적 행위로 돌아갈 시간이다.”


<보다 나은 가능성을 위한>


 여기에 하나의 전환이 있다. 노동을 위한 투쟁과 노동에 대한 투쟁의 차이점.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것과 자본주의 만들기를 그치는 것. 이것은 이 책에서 내가 느낀 가장 값진 경험이고 이론이다. 너무나 간단하지만, 사실 그렇기에 자본에게 속고 있었던 것을 저자는 정확하게 지적한다. 자본을 만들어내는 것은 노동이다. 그렇기에 해고를 위한 투쟁 - ‘우리에게 일자리를 달라, 우리에게 일할 시간을 달라’ - 의 형식은 반-자본이라기보다 자본적이다. ‘우리는 노동력을 팔아 자본을 만들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일거리를 달라.’ 이것은 삶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반-자본이라는 것은 아니다. 균열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일을 할 것이다.’ 혹은 ‘아니오. 당신이 바라는 식으로는 하지 않을 것이오.’ 노동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노동에 대한 투쟁. 이 차이는 크다.

 노동이 자본을 만드는 것이라면, 결론적으로 자본을 만드는 것은 자본가가 아니라 노동하는 우리이다. 이 사유가 매력적인 것은 자본에 대항하는 행위는 우리 앞에 서 있는 거대한 괴물과 맞서 싸우는 것도 아니고, 절망한 나머지 희생적인 영웅을 그리며 미래의 혁명을 기다리는 것도 아닌, 그저 우리가 노동하기를 멈추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자본을 만드는 것을 멈추기만 하면 된다. 저자는 그렇다고 그게 혁명이 쉬워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현실을 과장할 필요도, 왜곡할 필요도 없이 정확히 바라보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그 시선에서 행위를 만들어 내는 것, 각자의 실험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단지 거부하는 것만이 아니라, 단지 창조하는 것만이 아니라, 거부하고 - 창조하는 것. 이것이 현실에서 조금씩 나아가는 방법이다.

<다가올 미래>


 ‘균열이 확장되어 거대한 금이 되었을 때, 차가 더 이상 다니지 못할 정도로 도로에 잡초가 무성해졌을 때, 오게 될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이 질문은 분명히 멍청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반드시 어떤 것(자본주의를 대체한 어떤 것)으로 존재함으로써 동사적 행위에서 다시 명사로의 흡수, 동일화 과정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균열을 일으킨 후에 오는 세상은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이것은 중요한 문제다. ‘어떤 세계’ 단순히 공간적인 것만을 지시하고 있는 반면, ‘어떻게’ 라는 질문은 공간과 시간 그것의 존재 자체에 질문들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지금이나 다가올 미래에나 중요한 것은 새로운 공간의 창출이 아니다. 창조하기- 이다. 가능한 세계를 위한 미완의 실험을 계속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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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거울 속에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헬렌 맥클로이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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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거리는 간단하게 설명 가능하다. 한 여교사의 도플갱어(생령 혹은 페치)가 다른 이들에게 계속 보인다. 그리고 다른 여교사가 도플갱어에 의해 살해된다. 그리고 그 도플갱어의 주인공인 여교사 역시 심장마비로 즉사한다. 여기에서 한 남자가 개입된다. 그는 두 여자를 죽일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 여자들이 죽음으로써 그에게 이익이 돌아간다.

 이상하게도 여기에서는 해석학적 시각이 존재한다. 범인은 그의 주장(즉 자신이 분장한 것은 첫 번째였으며 그 이후에 도플갱어는 초현실적인 것이다)을 마지막 페이지까지 철회하지 않는다. 소설의 거의 대부분을 미스터리에 초점에 맞춘 저자에게 그 미스터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 그리고 탐정을 통해 확실한 범죄의 동기, 방법, 개연성을 독자들에게 설명하는 것은 그 소설의 완성도와 관련되어 중요하게 다뤄진다. 언제나 추리 걸작이라 불리는 소설들은 스토리가 어찌됐건 탐정이 범인을 잡는 과정 자체는 정확성에 기인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탐정이 등장한다는 것은 반드시 범인이 잡힌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매클로이는 그것을 스스로 거부했을까? 왜, 추리 소설에서 열린 결말을 추구했을까?


 정신분석학은 안타깝게도 21세기에는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해석’으로 취급된다. 예컨대 심리학과에 다니는 대학생들은 프로이트를 믿는 사람들을 바보라고 부른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잠재의식’, ‘자아와 이드’, ‘히스테리’ 등의 용어와 해설들은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과 논증이라고 믿어질 만큼의 정확성 때문에 관습처럼 굳어진 결과물일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우리는 과학시간에 그것들을 배우지 않는가? 여기에는 그것의 진실/거짓 여부를 믿느냐, 안 믿느냐가 개입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진실로 믿는가, 거짓으로 믿는가, 라는 문제에서 보편적으로 후자의 입장에 선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또한 과학적 사실이 언제나 정확한가, 그렇지 않은가 라는 문제도 관련이 없다. 작가가 말해 듯 언제나 어제의 과학적 사실은 오늘의 신화로 취급되는 문제니까.

 그렇다. 이것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 소설에서 사건을 중심으로 나오는 인물들의 대사는 그저 하나의 주장에 불과하다. 이것은 정신분석학과 관련이 깊은데, 왜냐하면 정신분석학이란 언제나 증명불가능한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신분석학이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심리, 욕망, 의도 등 절대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그저 ‘인간’을 보여주려 했을 뿐이다. 두 가지, 혹은 여러 가지의 주장들이 모여 하나의 구도를 이룬다. 우리는 이 주장들 중에 어떤 것이든 선택할 수 있다. 도플갱어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바이닝이 배질에게 오해받는 것뿐이며 그는 무죄라고 주장할 것이다. 철저하게 검증된 과학만을 믿는 사람들은(즉 미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배질의 추리가 정확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주장을 증명할 그 어떤 단서도 소설 내에서 나오지 않는다.


 여기에서 차페크의 말을 곱씹어 볼만 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악은 없다. 언제나 옳다고 믿는 진리와 다른 진리 간의 충돌만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악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진리가 없다는 것이다. 아니, 악과 진리 모두가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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