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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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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전략가 혹은 판티랜드의 파라오>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이 한 문장에 두 가지의 이중성이 존재한다. 먼저 판텔라온. 그는 군에서 가장 훌륭한 전적을 가진 군인이고 군 당국의 명령에 어떠한 불만도 없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역시 유혹에 빠지게 되고 그 유혹이 군의 명령인지 혹은 자신의 개인적 감정인지 혼동되는 상황을 초래하게 된다. 그가 그런 상황을 만들어낸 것에는 ‘특별봉사대’가 가지고 있는 개별적 속성 때문인데, 그것은 사회의 악으로 규정되는 매춘을 암묵적으로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은밀한 곳에 존재하는 매춘이 군에 의해 명령으로 수행된다는 것, 그래서 매춘이 표면으로 끌어올려진다는 점이 이 소설의 이중성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성격이다.

 

<완벽한 전략가>

 

 판텔라온을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바로 한나 아렌트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아이히만이다. 그들의 특징은 ‘사유의 불가능성’이다. 판탈레온은 전형적인 사유불가능자다. 그는 상관의 명령에서 어떠한 가치판단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가 완벽한 전략가가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만약 그의 위에 있는 상관이 그에게 내린 명령이 선의의 것이라면 그는 전쟁 영웅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 반대라면 그는 최악의 범죄자가 될 것이다. 아이히만같이. 작가는 판텔라온이 특별봉사대를 조직하는 것과 함께 광신도인 프란시스코 형제가 하나의 종교를 만들어내는 것을 같이 보여주는데, 이것은 군 당국 - 프란시스코, 판텔라온 - 프란시스코의 맹신자들 이라는 하나의 도식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의 유사성으로 인해 독자들은 명령 체계(종교적 도덕)의 무비판적인 수용이 폭력에 얼마나 무심해질 수 있는지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프란시스코의 맹신자들이 동물들의 시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 더 나아가 그 대상이 인간으로 발전하는 것과 판텔라온이 특별봉사대를 조직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확장하는 것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그들의 행위에서 폭력에 대한 저항이 점점 무뎌지는 것을 목격하게 한다. 특히 판텔레온이 미스 브라질과 자신의 의무감에 반하여 섹스를 즐기는 것에 대한 변명으로 군의 명령을 얘기하는 것과 죽은 미스 브라질을 위해 군의 피해를 주는 행위하는 것을 보면 그의 의무감이 위선으로 보이지만 그가 수모를 겪으면서 까지 전역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것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그의 모든 삶에는 ‘명령’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며 그것 없이는 스스로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특별봉사대가 해체되고 봉사대원들이 그에게 사업을 제안했을 때 그가 했던 말이 그 사실을 증명해준다. “나는 윗사람이 필요해. 그들이 없으면 난 뭘 해야 할지 몰라. 그렇게 되면 난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아.” 그렇다. 그는 명령이 있으면 완벽한 전략가다. 그러나 명령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판티랜드의 파라오>

 

 좀 더 거시적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결국 그는 왜 그런 곤경에 처한 것일까? 특별봉사대가 조직된 이유는 병사들의 강간(죄) 때문이다. 그리고 군의 행정장교들은 끊임없이 발생하는 범죄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특별봉사대라는 이름으로 창녀들을 모집한다. 그들은 군에서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하위기관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암묵적’이라는 수사적 표현이다. 이 암묵 사이에서 수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이 특별봉사대는 라캉이 말한 ‘대타자’의 아주 정확한 예를 보여준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말할 수 없는 것. 특별봉사대는 개인적, 사적 차원에서는 누구나 원하는, 그래서 군에 종속되는 것을 질투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그것이 공적 차원으로 넘어가기만 하면 비난의 대상이 되고 죄악의 뿌리가 된다. 작가는 군대라고 하는 무조건적으로 도덕적이어야 하는 조직에 사회의 필요악이라고 평가되는 매춘을 끌어들임으로써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 결과로 개인의 욕망과 사회적 체면의 간극 사이에서 매춘과 창녀들은 언제나 희생될 수밖에 없다. 그들은 군의 사기를 올려주면서도 공공으로 승화되는 순간 비난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남성주의 사회에서 끊임없이 만들어낸 여성의 이미지를 환기시켜준다. 이들의 이미지는 단순히 현상이 아니라 남성들의 대상화 일뿐이다. 그래서 남성들은 그들을 욕망함과 동시에 비난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사회 외부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된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극 중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뿔뿔이 흩어진 특별봉사대의 창녀들과 관계를 맺는 장면에서는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 그 인물들 중 특별봉사대에 대해 비난하거나 침묵하거나 동조하는 자들이 모두 들어있는데 단 하나, ‘특별봉사대였던 자’만 없다. 그렇게 그들은 끊임없이 대상화되는 것이다. 판탈레온도 마찬가지다. 특별봉사대의 창녀들이 마지막으로 그를 떠나는 것을 슬퍼하는 장면은 정서적인 면에서 감동적이다. 그런데 그 이면을 바라보면 그가 떠나 아쉬운 것은 1)그가 특별봉사대를 효율적으로 관리했기 때문이고, 2)그가 떠나는 것은 예전에 있던 장소로 돌아간다는 것 - 즉 그것은 항상 위험에 노출되는 삶을 다시 살아야 된다는 것 - 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누군가의 비난대로 ‘판티랜드의 파라오’가 맞다. 그가 정당하다면 그것은 그들을 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비난받지 않아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그는 ‘그들’이 아니니까. 그는 그저 관리자일 뿐이고 관리방법이 효율적이라고 해서 그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좋은 관리자가 될 뿐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작가가 지적하는 것은 이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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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물고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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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다. 굳이 제목을 연관 지어 얘기해보자면, 그녀는 불가피하게 물고기가 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제목이 나타내고 있는 중첩된 비유는 언제나 늘 이야기를 풍성하게 한다. 왜 그녀가 물고기일 수밖에 없는지, 물고기는 무엇인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물은 어떤지, 그리고 왜 ‘황금’인지를 생각하는 것. 이것이 이야기를 항상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물고기>

 

 그녀는 이름도, 고향도, 부모도 없다. 태어났을 때부터 누군가에게 건네진다. 그리고 그 ‘건네짐’은 삶에서 끊임없이 변주되면서 반복된다. 이 건네짐의 물살에 의해 이동하게 되는 그녀의 삶을 물고기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극의 시작부터 끝까지 거의 대부분 그녀의 행동에는 의지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녀의 삶에서 도망가고 따라가고, 무언가를 배우게 되고, 경험하게 되고, 머무는 행위를 하게 만드는 숨은 주체는 ‘누군가’이다. 그 ‘누군가’는 단 한번도 ‘그녀 자신’이 되지 못한다. 이것은 물고기가 물이 없이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녀를 움직이게 하는 모든 것들, 예컨대 폭력, 운명, 사랑, 배움 등이 그녀를 가두는 동시에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좀 더 확장해보자. 소설의 화자인 그녀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런 특수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그녀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는가? 아니면 모든 것이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것을 우리 스스로 결정하는가? 우리도 어떤 물살에 떠 밀려다니는 물고기가 아닐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소설 속의 환경과 달리 표면적으로 우리의 의사를 결정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위의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물고기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다면, 왜 그녀는 ‘황금’ 물고기인가?

 

<황금 물고기>

 

 물고기를 수식해주는 황금이라는 형용사는 화자의 모든 상황을 설명해준다. 그렇다면 황금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첫 번째로 그녀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피부색. 이 피부색으로 인해서 연쇄적으로 다른 특징들을 갖는다. 그녀가 백인 사회로 들어갔을 때, 그녀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희귀’해진다. 그리고 또한 ‘독특’해진다. 백인 남성 혹은 여성들에 의해서 그녀는 관계를 맺는 인격체가 아닌 소유물이 된다. 그녀가 끊임없이 하는 집안일도 백인들이 흑인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을 형성한다. 이것이 황금이 나타내고 있는 역설적인 진실인 것이다. 두 번째로 특징지어 질 수 있는 것은 ‘빛남’이다. 이것은 같은 흑인이 그녀를 바라보는 하나의 감정인데, 그녀는 다른 의미에서 그 흑인들과 ‘같아’질 수 없다. 예를 들어 하킴에게 그녀는 공부를 해서 뛰어난 학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존재하며 시몬에게는 귀가 멀었다는 이유로 뛰어난 가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보인다. 그들은 그녀를 소유하지 않는다. 그저 하나의 성공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백인 사회에서 흑인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을 만들어낸다. 보편적으로 백인들에게 흑인은 단지 소유물일 뿐이며 이것은 역사가 형성해온 하나의 폭력이다. 그리고 흑인들에게는 ‘다른’ 문화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백인과 같은 문화 안에서 같은 방식으로 좀 더 우월해지는 것을 선택하게 하는 또 다른 폭력을 발생시킨다. 하킴이 박물관에서 비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흑인들의 문화가 백인들에 의해 전시된다는 사실이다. 이 전시 행위는 흑인의 문화가 전시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기보다 백인들에 의해 규정되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절망적이다. 그런데 하킴은 미국에서 배우며 성공을 꿈꾼다는 점에서 스스로 또 하나의 조각상이 되려 한다. 비교적 지식인으로 대변되는 하킴 역시 비판적인 동시에 그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것을 통해 백인-흑인 사이에 뿌리내린 인식이 얼마나 깊은가를 보여준다.

결국 이 황금이라는 형용사는 정확히 우리가 알고 있는 사물로서의 황금을 대변한다. 그것을 둘러싼 폭력과 허황된 꿈의 상징으로서 황금 말이다.

 

<귀환 혹은 반복>

 

 결말 부분에 작가는 두 가지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 두 가능성은 긍정과 부정이 섞여 있어 하나의 역설을 이룬다. 그녀의 귀환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데 비해 결국 그녀는 그곳에서 장이라는 백인 남성에게 의지한다는 점에서 그녀가 아직도 굴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그녀가 출산을 준비하는 것은 그녀가 자신의 근원을 찾았음을 알리는 동시에 그녀의 아이도 역시 그녀와 같은 운명을 반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것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알 수 없다. 작가의 말처럼 ‘부족의 시대를 벗어나 사랑의 시대’로 들어서는 것인지 아니면 끊임없는 폭력에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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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지음, 최필원 옮김 / 그책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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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의 재현일 뿐이다.


 1760년. 마을에서 힘들게 밭을 개간하던 사람들은 어느 날 영문을 모른 채 쫓겨나게 된다. 그들이 밭을 일구는 대신 양을 키우는 게 더 땅을 유용하게 쓸 수 있다는 지주들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서 농사를 짓던 이들은 떠돌며 농장 노동자가 되고 어떤 이들은 공장 노동자가 된다. 우리는 이것은 인클로저 운동이라 배웠다.

 1811년. 영국 노팅엄의 직물공업지대. 사람들이 공장으로 몰려간다. 그들은 광기어린 몸짓으로 기계들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눈에는 기계들이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진보가 아니라 자신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그래서 착취해버리는 괴물로 보였다. 그들은 노동하기 위해, 기계를 파괴하였다. 우리는 이것을 러다이트 운동이라고 배웠다.

이 두 개의 시민운동은 자본이 인간을 대할 때 얼마나 잔인해 질 수 있는지 알려준다. 자본주의라는 소용돌이에서 살아나려면 우리는 항상 쫓겨나는 자보다는 쫓아내는 자가, 기계를 파괴하는 자보다는 그 파괴에 분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항상 인간을 대할 때의 제 1 원칙은 합리성이 되어야 한다. 윤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알랭 바디우는 말한다. “자본주의 안에서 윤리는 존재할 수 없다. 자본 자체가 비윤리적이기 때문에.” 이 책은 자본 안에서 윤리를 지우고 시작하는 이야기이다.


 너무나 절박하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1997년 IMF는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절벽으로 몰아붙였다. 구조조정의 다른 말은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네가 죽어야 되는 것이다. 문제는 수많은 ‘네가’ 바로 ‘우리’라는 것이다. 결국 전자의(살아남는) 우리와 후자의(죽어야 되는) 우리는 절대로 같을 수 없다. 이것은 현재 1%와 99%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액스의 주인공 버크는 물론 후자이다. 그는 열심히 일했고 더 일 할 수 있지만 유행처럼 번지는 인원감축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3년간 무직으로 지낸 버크는 하나의 결심을 한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쟁자를 죽이는 것. 이것은 그의 생각이 아니다. 그는 이미 한 번 당한 피해자이다. 여기에는 윤리와 생존의 선택이 있다. 윤리는, 생존이 보장 된 후에 갖출 수 있는 인간의 교양이다. 적어도 자본주의 안에서는. 그렇다면 그는 왜 자신과 같은 처지인 실업자를 죽이는가? 왜 자신을 자른 임원을, 사장을, 자본가를 죽이지 않는가? 문제는 간단하다. 그들을 죽이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살인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실업자가 되지 않으려 한다. 그는 자신과 처지가 같은 (그러나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판단되는) 실업자와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이 일할 곳에서 운이 좋아 일을 대신하고 있는 한 명의 노동자만 죽이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좀 더 합리적이다. 합리적으로 살인하기. 이것이 자본주의의 생존 법칙이다.

 그렇게 그는 한 명씩 죽여 나간다. 운이 좋을 때도 있고 좋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그는 성공한다. 자신의 행동이 정당한지 의문도 품지만 그 의문 역시 살인이 반복될수록 천천히 정당화된다. 나의 생존과 타자의 죽음을 저울질 할 때 더 무거운 쪽은 당연히 나의 생존이다. 이 정당화는 소설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왜냐하면 그가 걸리지 않는다면, 그것이 단지 윤리의 문제로만 다뤄지고 법/불법의 문제로 다뤄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6, 7번의 살인 후 안전하게 취직되고 행복하게 살아간다면, 그것은 이 이야기가 동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동화 속 세상에서만 권선징악이 이루어진다.


이것은 은유가 아니다. 현실의 조각일 뿐이다.


 말 그대로다. 이것은 은유가 아니다. 해고는 살인이다, 라는 말은 진실이다. 그리고 해고를 한 자의 살인(즉, 해고)과 해고를 당한 자가 다른 자를 살해하는 것(말 그대로 살인)은 역시 윤리적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법의 문제다. 걸리지 않으면 처벌받지 않는다. 더 똑똑하고, 더 빠르고, 더 잘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는 자이다. 나는 언젠가 이 소설의 텍스트가 실재의 세상에서 똑같이 재현된다 해도, 그것을 믿을 수 있다. 왜냐하면 현실에서는 이것보다 더 믿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자본주의 안에서 윤리는 존재할 수 없다. 자본 자체가 비윤리적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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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제노비스를 죽였는가?
디디에 드쿠앵 지음, 양진성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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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총체적 위험만이 철학자의 조용한 잠을 방해하고 

그를 침대에서 끌어낸다. 그의 창문 아래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의 목을 벨 수 있다. 

살해당하는 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본능을 억누르기 위해 

양쪽 귀를 두 손으로 막기만 하면 그만이다. 


- 장 자크 루소 


 누군가가 이런 말을 내게 해줬다. 책을 볼 때 첫 페이지에 인용구가 있다면, 그 인용구가 책의 전부다. 과연 그런가?. 적어도 제노비스에서는 그렇다. 루소를 인용한 드쿠앵은 이 두 문장으로 책의 전부를 표현했다. 루소의 말은 마치 예언처럼 보인다. 그 비유가 너무나 적확하기 때문에. 


 드쿠앵은 글 전체에서 제노비스를 죽인 모슬리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의 관심사는 38명으로 추정되는 방관자, 또는 살인 방조자이다. 어느 평화로운 마을의 아파트에서 한 여자가 30분 동안 잔인하게 살해된다. 그녀는 끊임없이 소리쳤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위해 밖을 나와 도움을 주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녀가 죽기 전까지는. 만약 책이(혹은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이 위의 나열된 사실이 전부라면 이 책은 단순한 기사, 가십거리에 불과할 것이다. 이것이 소설이 되기 위해서는 사실을 이야기 하는 것보다 좀 더 나아가 진실을 보여줄 수 있어야 했다. 


 "모두들 무언가를 보거나 들었고, 모두들 '이제야' 무언가 할 말이 있었다."

하나의 문장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이 문장에서 '모두들'과 '이제야'의 관계는 소설 전체를 꿰뚫는 핵심으로 작용한다. 그 모두들은 38명의 방조자만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 뉴욕 타임스의 기자 마틴 갠스버그, 저자, 그의 아내 길라를 포함한 우리 모두일 것이다. 모두들은 38명을 강조하는 대명사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의미의 모두들이다. 저자는 그것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 같다. 불행하게도 그는 너무나 강력하게 그들을 비판하는데, 저자는 그들과 자신이 동일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저자와 38명의 목격자를 나누고 있는 경계는 그 장소에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만약 내가 거기 있었더라면' 이라는 질문에 절대로 옳은 답을 할 수 없다. 그 모든 것이 사후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38명 중 재판의 참여한 자들의 증언과 마틴의 기사와 드쿠앵의 소설책은 정확한 동일성을 같는다. 그들의 말, 글, 책은 '이제야' 라는 단어에 묶여 사후적으로 규정될 뿐이다. 



 에필로그의 실험 결과(방관자 효과 또는 제노비스 신드롬)은 38명의 방관자들이 모즐리처럼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같다는 것을 보여주는 객관적 지표다. %로 나누어지는 책임의 분산이 실제 상황에서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이 없지만 적어도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들과 공범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드쿠앵의 말처럼 정당화 될 수 없는 일이다. 

 에필로그가 보여주는 또 다른 일화는 그 죄의식을 더욱 더 강화시켜 준다. 에보니 가르시아의 죽음, 이 죽음은 우리가 이전에 겪었던 일을 교훈삼아 반드시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언제나 같은 - 잔인한 일을 겪을 수 있다. 그리고 같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그곳에 있지 않다는 것만으로 방관자 아님을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이 지독한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보거나 들은 순간, 무언가를 말해야 하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것은 38명의 죄를 벌하려는 것도 아니고 모슬리가 사형선고를 받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런 의도도 있겠지만) 다시 한 반 그런 일이 있을 때 우리가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지, 그것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알 수 없는 마비 증상에 사로잡힌 목격자들의 침묵 속에 사라져간 첫 번째 희생자는 키티가 아니었다. 그리고 마지막 희생자도 아니었다. 키티 제노비스 신드롬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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