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온 사나이
벨라 타르 감독, 틸다 스윈튼 외 출연 / 무비플렉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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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했다. 엄청나게 지루했다. 문득 시계를 보니 2시간이 지나가있었다. 벌써? 

영화에서는 대사가 나오고 있었다. "제가 어제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대충 이런 대사였던 것 같다. 어제라고? 아직도? 


 로베르 브레송에 대한 강의에서 김성욱 프로그래머님이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브레송은 리얼리즘의 재현을 거부했다. 그는 영화가 단지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파편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현실을 재구성하려고 했던 것 같다. (정확하게 이런 말을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이해하기에는 이런 식으로 들렸다.) 벨라 타르는 브레송과 정반대의 지점에서 리얼리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현실의 재현" 이라는 기준이 있다면 그것을 파편화하는 방법이 있는 반면(브레송) 그 재현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가 우리의 행동 - 집을 나서서 목적지에 가는 행위, 술을 마시는 것, 시선 등 보통 영화에서 생략하는 것 - 을 해부학의 시선으로 보여주는 방법(벨라 타르)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의 영화는 런닝 타임이 150분이나 될 이유가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150분이다. 보통 영화에서 어떤 사건을 보여주는 것에 중점을 맞추는 것에 반해 이 영화는 사건의 시작부터 사건 이후의 시간까지 모든 시간을 다 보여준다. 불필요하다, 라고 관객이 느낄 때까지. 


 초반에 목격 스퀀스를 보면 알 수 있다. 영화사에서 어느 감독도 벨라 타르처럼 그 장면을 찍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한 컷으로 스퀀스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어느정도 지루함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그 지루함을 정확히 일상적인 것임을 말해주는 피사체도 함께 보여준다. 우리는 영화를 우리의 삶과는 멀리 떨어져있는 '주인공의 삶'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극장에 간다. 그곳에서는 기쁨도, 슬픔의 극복도, 쾌감도 발생하지만 살인도, 강간도, 신성 모독도, 죽음도 발생한다. 그것들은 우리의 삶이 아니기 때문에 가치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도로에 죽어있는 비둘기의 시체를 불쾌하다고 생각하지만 프레임 안에 있는 사람의 시체는 불쾌함보다는 (영화에 따라) 쾌락, 고통, 슬픔의 감정으로 느끼게 된다. 그러나 벨라 타르의 영화에서는 '특별한 사건'들보다는 '일상적인 반복'이 주를 이룬다. 이 영화를 보고 지루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것뿐이다. 목적없는 목격. 누구도 아무 이유없이 타인을 관찰하지 않는다. 사랑, 증오, 관심이라는 감정적인 렌즈를 통해서만 우리는 '재미있게' 어떤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벨라 타르의 영화는 영화의 목적 자체를 전복시킨 것을 수도 있다. 


 언젠가 벨라 타르의 영화(토리노의 말)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일주일의 반복을 보여주면서 2시간 20분 내내 지루함을 유발하다가 마지막 10분으로 생각지도 못한 충격을 준 영화였는데, 극장을 나오면서 문득 아, 나는 정말 감정을 소모하는 방법을 몰랐구나. 라는. 왜냐면 나는 극장에 갈 때(혹은 책을 볼 때, 친구를 만날 때, 연인을 만날 때, 사람들을 만날 때, 밥을 먹을 때 등등) 항상 즐거움만을 생각하고 행동한다. 고통, 슬픔 등의 부정적인 감정(지루함까지)은 즐거움을 목적으로 했지만 상황이 따라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느끼는 부차적인 감정인 것이다. 그러나 벨라 타르의 영화를 보면 누구나 지루함을 돈 주고 경험할 수 있다. 억울하다고 느끼기 전에, 먼저 반성할 것. 나는 왜 즐거움'만을' 위해 영화를 보고 있는가? 말도 안되지만, 어쩌면 즐거움이라는 감정이 어떤 한계가 있어서 계속 그곳에만 물을 주다보면 죽어버리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예술 영화라는 것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다. 영화에는 예술이 없다. 어쩌면 모든 영화가 예술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기준도 세우고 싶지 않고 누군가의 기준에 따르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냥 나에게 좋은 영화, 나에게 나쁜 영화만 있을 뿐이다. 어떤 점에서 런던에서 온 사나이는 나에게 좋은 영화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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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7 0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mvbelt 2014-08-17 0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성욱 프로그래머님의 해설은 언제나 좋지요:)
바이바이몽키 저도 보고싶었는데 정신 차려보니 이미 지나갔더군요 부럽습니다 ㅠ
도발적, 인 수식어를 가진 감독 중 요즘 가장 관심있는 사람은 고다르인데 언제 한번 아트시네마에서 특별전이나 해줬으면 좋겠네요
 
시 (2disc)
이창동 감독, 윤정희 출연 / UEK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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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시인이 사과를 꺼낸다. 일부러 준비해왔단다. 그리고 묻는다. 우리가 언제 사과를 본 적이 있냐고. 사과의 그림자도 관찰하고, 이리저리 만져도 보고, 한 입 베어 물어도 보고. 그렇다. 우리는 사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적어도 난 한 번도 사물을 그렇게 관찰한 적이 없다. 그저 그렇게 있다고 믿을 뿐. 사물들은 존재론적으로 확실하고 인식론적으로 모호하다. 우리는 그것들을 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순전히 우리들의 오해인 것이다. 확장시켜보자. 안다는 것은 어쩌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소통(서로 안다고 가정하고 상호 교류하는 것)이란 근본적으로 오해를 기초로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시인이 다시 말한다. 무엇이든 진짜로 보게 되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고. 그 이후에 시가 쓰이는 것이라고.

 

소통이라는 이름의 오해

 영화는 집요하게 소통불가능성을 이야기한다. 마치 세상을 안다고 가정된 것들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예컨대 아네스와 5명의 중학생들이 그렇고, 양미자 할머니와 학부모들이 그렇고, 양미자와 그녀의 딸이 그렇고 양미자와 종욱이가 그렇다. 그들은 주고, 받는다. 그렇지만 주고받지 않는다. 그들의 대화는 교류하지 않는다. 그들도 그것을 알고 있지만 서로 소통이 가능하다는 자기기만으로 애써 무시해버린다. 그들의 행동, 말이 전달 될 때 그것들을 가로막는 것은 '폭력(아네스/중학생들, 양미자/학부모들) 혹은 '사랑(양미자/딸, 양미자/종욱)이라는 이름의 벽이다. 처음에 나는 집요하게 시를 쓰려는 양미자 할머니의 시도는 마치 현실의 도피로 보았다. 그러나 그녀에게 도피할 현실이 있는가? 역으로 그녀는 현실은 가상이고 시를 쓰려는 시도가 현실과 직접적으로 대면하려는 것이라고 믿는 것 아닐까?

 

시를 쓰는 양미자의 방법

 시를 너무나 쓰고 싶은 양미자 할머니는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돌아다닌다. 그녀는 꽃을 보고 꽃말을 찾고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빛을 보고 땅에 떨어진 열매를 본다. 그녀는 그것들을 관찰하고 만져보고 느끼려한다. 그리고 글을 써본다. 이상하게 글들, 시구들은 써지지만 시가 써지지 않는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세상은 가혹하다. 시를 쓰려고 마음을 먹은 순간, 그녀에게서 낱말을 빼앗아 간다. 옥타비오 파스는 주저 활과 리라에서 이렇게 말한다. "말은 인간 자신이다. 우리는 말로 이루어져 있다. 말은 우리의 유일한 실재이거나 혹은 적어도 우리의 실재를 표현하는 유일한 증거이다." 그녀에게 말을 잃는다는 것은 '앞으로 말을 못한다.'라는 일차원적인 문제가 아니고 그녀의 실존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반면 세상은 공정하다. 그녀에게 말을 빼앗아 간 후 그것을 슬퍼할 시간도 주지 않고 시를 쓰는 다른 방법을 알려준다.

"시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찾는 거잖아요. 그런데 만날 저런 와이당이나 하고. 꼭 시를 모독하는 것 같아요."

 그녀는 시를 아름다움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그녀는 '시의 그림자도 관찰하고, 이리저리 만져도 보고, 한 입 베어 물어도 본 적이 없다. 그녀는 이것들을 하기 전에는 시 = 아름다움이라는 하나의 공식으로 그녀의 머릿속에 자리 잡아 있을 뿐이다. 그녀는 이제 시를 쓰기 위해 만지고 관찰하고 먹어봐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아니 그런 자연스러운 순간이 찾아온다. "순수한 가능성의 세계, 창조 이전의 세계가."

 

법과 합의

 한 소녀가 죽었다. 그녀의 죽음에 책임을 지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이 침묵한다. 그들은 '진정성 있는 사죄'를 제외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죽음을 덮으로 현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성공할 것이다. 이제 그들은 죽음을 덮음으로써 그에 따른 의무 역시 '덮어버렸다.' 합의라는 이름의 창은 그들을 안전이라는 성으로 대려가 양심의 가책이라는 불청객을 쫒아낼 것이다. 종욱이는 낄낄거리며 다시 무한도전을 볼 것이고 세상은 예전처럼 잘 돌아갈 것이다. 양미자 함머니는 아네스의 사진을 본 후에 그것이 잘못됐다고 느끼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녀는 깨닫는다. 부모들과의 합의는 죽은 아네스에게 어떠한 사과도 하지 못한다고. 그 고통이 그녀에게 시를 쓰게 하는 원동력이다.

 어쩌면 양미자 할머니는 종욱이에게 시를 쓰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에게 법적 처벌은 합의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이게 토론에서 가장 논쟁이 있었던 부분이었던 같은데요. 그녀가 종욱이를 자발적으로 신고했든, 그렇지 않았든 그녀는 종욱이가 법적 처벌을 받는 것에 아무런 감흥이 없었을거라 예상합니다. 왜냐하면 합의와 마찬가지로 그것도 아네스를 뺀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이렇게 사죄는 가장 비합리적이고 비생산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방법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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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스티븐 달드리 감독, 랄프 파인즈 외 출연 / UEK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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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왜 영화를 보고 이 책이 났을까? 단순히 나치즘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내 생각에는, 어쩌면 감독이 한나의 캐릭터를 아이히만에서 가져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아이히만인가, 라는 첫 번째 의문과 왜 아이히만인가, 라는 두 번째 의문에 답하는 것이 이 영화를 보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왜 문을 열어주지 않았나'가 아닌 '왜 그녀가 그 시대에 경비원이었나'의 문제

 

 아이히만과 그녀의 유사점은 이 대목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중 한 장면. 판사가 한나에게 묻는다. “사람이 죽을 것을 알았으면서 왜 문을 열어주지 않았죠?” 한나는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듯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저는 경비원이었으니까요.” 이 지점에서 나는 한나와 아이히만이 겹쳐진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들 말고도 수많은 독일인들이 그것이 ‘명령’이기에 수행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악을 ‘평범성’으로 규정한 후, 그의 악행은 그가 남들보다 사악하지도, 비윤리적이지도 않다고 말한다. 그가 무고한 유태인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죽일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남들보다 조금 ‘천박하거’나 ‘사유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사유의 불가능성, 이것이 그들의 문제이다. 한나가 문 앞에 서 있을 때에 그 문 뒤에는 600명의 유태인이 불에 타 죽고 있었다. 그녀에게 이러한 상황은 윤리적으로 선택해야할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명령 체계에 복종하는 것의 문제, 이것이 본질이다.

 

reader와 leader의 사이에서

 

 그렇다면 그녀는 그렇게 되었을까? 그곳에 그녀와 함께 있었던 다른 가해자들을 보자. 그들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행위에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과 한나의 차이는 분명하다. 우리는 그들(한나를 포함해서)을 손가락질 할 수 있다. 당신들은 비윤리적이라고, 사람이 못 할 짓을 저질렀다고. 그러나 대답은 다를 것이다. 한나는 나는 나의 할 일을 했다, 라고 대답할 것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한나가 시켰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차이는 단순히 솔직함과 비겁함의 차이가 아니라 혹은 멍청함과 순응력의 차이가 아니라 ‘사유’ 자체의 문제이다.

 

 영화상에서 가장 극명하게 두 그룹 간에 드러나는 차이는 한나가 글을 못 읽는 문맹이라는 것이다. 문맹의 상징은 일방적인 소통의 상징, 즉 주고, 그것을 받는 알레고리로 설명된다. 한나는 절대 교류하지 못한다. 다만 받을 수 있고, 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꼭 그와 같은 방식으로만 가능하지 그것이 절대로 다른 것으로는 대체될 수 없다. 예컨대 그녀는 글을 읽어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가 글을 읽어줄 것이다. 이것이 한나의 기능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그 누군가가(reader) 그녀에게 전쟁과 평화를 읽어주면 그녀는 그것을 듣고 울 것이다. 나무위의 남작을 읽어주면 그녀는 웃을 것이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읽어주면 역겨워할 것이다. 그녀는 전달자가 전달해주는 방식으로만 그것을 이해한다. 비판이 없고 비난 또한 없다. 그저 묵묵히 수행할 뿐이다. 그녀에게 reader는 그녀의 사유에 있어 leader가 되어 버린다. 이제 그녀에게 왜 문을 열어주지 않았느냐는 물음은 의미가 없다. 그녀에게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그 시대에, 당신은 경비원이 되었느냐고. 혹은 질문 받는 자를 대체해야 한다. 그녀에게 명령을 내린 주체, 혹은 그보다 위에 있는 주체에게.

 

카타르시스는 극장에서

 

 그녀의 죄는 단지 시대를 잘못 타고 났다는 이유, 윤리적 판단을 할 수 없는 멍청이라는 이유로 증발되어야 하는 것일까? 어찌되었든 그들이 한 행동으로 피해자가 발생했다. 그 피해자들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삶의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에 유태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거시적인 것이야 어찌되었든 미시적으로 보자면 분명 피해자가 있고 그것을 가해한 자가 있는데 그들의 죄가 어떻게 -법적이든, 윤리적이든(후자가 더욱 중요하겠지만) - 용서받을 수 있을까? 감독은 한나와 유태인 사이에 마이클을 위치시킴으로써 그들 사이의 인류애적 화해를 만들어내는 이끌어내는 역할을 그에게 주는 것처럼 영화를 만든다. 깜빡하면 속을 뻔 했다. 한나가 자살하고 마이클이 한나의 유품을 가지고 생존자에게 가는 장면에서 나는 마이클이 어쩌면 한나의 죄를 용서받으려고 가는 것일 수도 있겠구나, 그녀의 죄가 단지 ‘실수’였다고 생존자에게 선처를 부탁하러 가는 것일 수도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영화 내에서도 마이클의 행동을 ‘마치’ 그런 것처럼 보인다. 생존자 앞에서 마이클이 사랑이라는 감정에 취해 그녀를 변호할 때, 생존자는 말한다. 카타르시스를 느끼려면 극장으로 가라고. 이것이다. 마이클은 그녀를 용서할 수 있다. 왜냐면 사랑이란 이름의 폭력으로 그녀가 그의 삶을 망가뜨렸더라도 그에겐 그녀에 대한 추억, 향수, 애틋함이 남아있기에. 그렇지만 유태인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무엇인가? 고통, 참혹함, 등등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가 카타르시스는 극장에서, 라고 말 할 때 마이클의 화해의 제스처는 오만이 되어버린다. 그는 그만한 고통을 겪지 못했기 때문에. 법에 의해 판단되는 종류의 고통, 수치화 되는 고통, 남에게 이해되는 고통이 아니라 실존 그대로의 고통, 절대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고통이 그들에게 있기에, 그녀는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겪은 일은 영화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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