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7
에드워드 올비 지음, 강유나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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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허상을 깨기 위해서>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이하 버지니아)는 미국의 '이상적'인 가족에 대한 환상을 무참히 깨버린, 그런 이유로 퓰리처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작품해설 참조) 오히려 희곡에서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그것이 적용가능한 사실임을 각인시킨 작품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이상이란 무엇인가? 버지니아에서 외적으로 보여주려는 미국의 가정이란 좋은 직장(교수직)에 화목한 부부, 건강한 아들, 훌륭한 아버지(혹은 장인)으로 표상되는 '건전한(wholesome)' 모습의 가정이다. 이들에겐 불만도, 가난도, 고통도 없어야하며 행복과 사랑과 존경과 화목만이 존재해야 한다. 과연 현실적으로 이같은 환상에서나 가능할 법한 가정이 존재할 것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그렇지 않다는 것.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이러한 가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모든 이들은 이런 가정을 생각하는가?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왜 이와같은 가정이 '만들어졌는가?' 이 질문에 나름의 방법으로 대답을 찾는 것, 이것이 버지니아를 읽는 한 가지 방법이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권력 놀이>

 

 중년의 부부가 신혼의 부부를 초대한다. 이들에겐 중년과 신혼이라는 피상적인 차이뿐만 아니라 그 관계들 깊숙히 스며든 차이가 존재한다. 이들은 애초부터 불평등하게 시작한다. 대학 총장의 딸 부부와 그 대학의 교수로 있는 젊은 부부를 생각해본다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불평등. 이들의 초대와 방문은 애초부터 어떤 목적성을 띄고 시작한다. 그리고 '보통' 현실에서 이와 같은 관계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마치 라캉의 '텅 빈 제스처'처럼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 모른 척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버지니아에서는 그런 필수불가결한 가식이 사라져버린다. (적어도 중년부부인 마시와 조지는) 텅 빈 제스처로부터 자유로워보인다. 사실 마사/조지 부부가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 모임의 주도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권력을 이용해 젊은 부부를 조롱하고 치부를 낱낱이 파헤친다. 물론 그들이 서로를 물어 뜯은 후에야 그런 일이 벌어지는 하지만 말이다. 또한 두 부부들의 모임에서 재미있는 것은 권력이 두 가지 층위에서 활동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가시적인 권력으로 그들의 사회적 배경, 직업, 나이 등을 통해서 일어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권력으로 더 많이 가진 자와 더 적게 가진 자 사이에서 나타나는 권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조금 특이한 권력인데, 바로 누가 더 상처를 입었나에 관한 것이다. 더 상처 받은 사람일 수록, 그러니까 더 이상 드러낼 치부가 없는 사람일 수록 게임에서 우위를 차지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모든 치부가 드러나버린다.

 

<진실 놀이> 
 연극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인가? 연극이 아닌 것의 장점들을 살펴보면 연극의 장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산문은 그것만이 가질 수 있는 '문장'으로 서술을 함으로써'상상'의 여지를 만든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영화는 프레임을 지정해두었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한계와 그 한계 밖을 상상함으로써 새로운 '공간을 느낄 수 있는'매력이 있다. 반면 연극은 시간, 공간, 등장 인물 등 거의 대부분의 것들이 제약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연극의 가장 큰 매력은 한계가 없는 말들, 그리고 그 말들이 만들어내는 
특수한 상황이 가장 큰 장점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버지니아는 훌륭한 희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등장인물들의 말은 모두 보조텍스트로 이루어져 있어 그 진위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예컨대 조지가 닉에게 들은 허니와 닉의 결혼의 진실을 폭로하는 순간의 장면들이 그렇다. 여기에서 조지의 모든 대사들이 조지가 말하는 것과 다른 하나, 혹은 두 가지의 텍스트를 가지고 있다. 즉, 조지는 진실도 거짓도 아닌 그 사이에 있는 언어로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모든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이 모호해진다. 그리고 그 모호해진 경계 사이에서 또 다른 거짓이 생성되어 지고, 그 거짓에서 또 다른 상황이 만들어진다. 조지 뿐만 아니라 버지니아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말이 이런 식의 연쇄작용을 거쳐 계속해서 새로운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아이 만들기, 혹은 없애기>


 버지니아를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하지만 미국인들에게 가장 충격적이었을) 부분은 이들 부부에게 아이가 부재한다는 사실이다. 단순히 부재였으면 문제가 아닌데, 그 부재가 특수한 상황에서 일어난 부재라는 것이다. 가장 처음 등장하는 것은 닉/허니 부부의 아이다. 앞에서 말한 폭로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들의 결혼은 허니의 상상임신으로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들의 '아이 때문에' 결혼을 했지만 결국 아이를 갖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들의 결혼은 어떤 조건때문에 이루어졌지만, 그 조건 자체가
부재한 상황이 된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의 '결합'자체가 부정되는 걸로 귀결된다. 닉은 그 사실을 조지에게 폭로함으로써 그 사실을 인정하게 되어버린다. 반면 마사/조지 부부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언어'로 아이를 만드는 작업을 하는데 그것 역시 (닉/허니 부부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가정의 불완전함을 의미한다. 닉/허니 부부에게 있어 아이의 부재가 결혼의 토대 자체가 붕괴되는 것을 의미했다면 마사/조지 부부에게 아이의 부재는 완벽한 가정의 불가능성을 의미하게 된다. 남녀 사이의 결합으로 인해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것은 결혼의 (생물학적) 목표이자 (이상적) 화목의 상징으로 읽힐 수 있는데, 아이가 없음으로써 그것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에드워드 올비는 가정에 있어 성역에 해당되는 '아이'라는 상징적 기호를(오해가 있을 것 같아 덧붙이자면 이상적 가정의 상징직 기호라는 의미) 거세함으로써 그 허상을 깨버린 시도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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