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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ㅣ 창비시선 394
송경동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평점 :
02월에 구입해 놓고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라는 송경동의 시집을 최근에야 다 읽었다. 그것도 겨우겨우. 개인적으로는 시집은 리뷰를 거의 하지 않는다. 시집은 리뷰라는 형식으로 소비하기보다는 감상이라는 방식으로 소비돼야 한다고 생각했고, 시집을 읽으므로써 시인의 삶을 되새겨 보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집은 굳이 리뷰를 하지 않아도 시집 갈무리 부분에는 항상 시집의 시평론이 나와 있으니 굳이 리뷰하고 적을 것도 없다. 그렇다고 시에 대해서 대단한 조예가 깊어서 평론을 일삼을 만큼 시적인 공부가 되어진 것도 아니라면 굳이 리뷰는 쓰고 싶지 않았다. 따라서 이 리뷰 형식도 독후감은 아니다.
솔직히 송경동 시인은 잘 모른다. 간혹, 노순택 사진가와 친구쯤으로 알고 함께 노동 활동을 하는 것쯤으로 알았다. 그러나 그의 시집에서 시적인 절규는 참 뭐랄까 애절하고 간절하고 소위 말하는 열폭이다. 시집의 제목부터가 얼마나 자극하는지 바로 느껴지는 대목이다. 내 나라를 부정하고 거부하고 싶을 만큼 그의 시에 드러난 우리 사회의 모순과 비합리성을 그는 시로써 깐다. 그리고 울분이 그의 시이다. 사실 시인이 시의 서정을 깡그리 외면할 정도로 그의 마음은 떨고 있음을 느낀다. 시위 한번 나가도 소송장 날아오고 과태료 날아오고 손해배상청구 소송이 날아드는 그의 삶은 시인이라기보다는 그냥 노동운동가이다. 아니 노동운동가라기보다는 약자들 속에서 같이 약자들과 함께 부대끼는 그도 역시 시인이라고 하기엔 맞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시를 쓰니 시인인 줄 알지 그냥 노동판에 있으면 비정규직 인부이자 노동자일 뿐이다. 그러니 그의 시가 개 풀 뜯어 먹는 외계인 같은 글이 아니었다. 지금 시가 은유랍시고 예술이랍시고 빙빙 둘러댈 만큼 한가하지 않는다고 한다. 직설적이라서 죽창의 직선을 닮은 시다. 그래서 그 죽창의 끝에 그의 시가 달려 있다. 푹푹 찌른다.
이 시는 참 재미없다. 재미는 없는데 좀 아프다. 송경동 시인은 시를 재미있으라고 쓰진 않는다는 걸 느낀다. 그의 시 문학에 대하여 문학적인 기교, 운율의 미학, 문학의 서정성 같은 개 조까는 소리는 하고 싶지 않다. 할 필요도 없고 혹시나 했다간 시인에게 뒤통수 짱돌 맞을 각오를 해야 할런지도 모른다. 이 시들이 대부분은 현장에서 졸라 게 울부짖듯이 쓴 시라는 걸 느낀다. 직장 잘 다니며, 한 달 한 달 주는 봉급을 받고, 넉넉하게 여유 부려가면서 인생이 어쩌고 존재가 어쩌고 아 본질의 고민은 뭐라야 하는 따위의 고뇌와 고독을 시로써 풀어야겠다고, 혹은 그래도 누구처럼 많이 배워 지성을 두루두루 갖춘 놈은 그저 시인이란 껍데기 감투 정도는 쓰었어야 뽀대가 나는 듯이, 이 생존의 존재론적인 미학을 발현 시켜야 한다는 시의 위대함에 내가 적격이라는 개 발싸게 같은 시인임네 하지도, 할 필요도 없는 시들이다. 시가 목에 힘주고 나 시인임네 따위를 씨불여야 감성의 허영 부리는데 있어서 시인이 적격이라는 따위는 소용도 없다. 낙서인지 시인지 구분도 모호한 시대에는 무슨 영감을 얻기 위해 사흘 밤낮을 고독과 싸워 소주 한 상자를 들이키고도 모자란다고, 각혈하듯이 시가 피처럼 쏟아낼 용감함은 사실 기대하기 어렵다. 시인이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시의 뽀대정도는 네 세워야 자뻑질도 먹히는 거라는 사이비 동네 시인이 없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마침 이 송경동 시인의 시집을 읽을 무렵부터, 온라인에서는 박모 시인의 성추행 사건이 묵은 지릴 병이 이제야 공론화되었다.(글쎄 이런 세끼들이 한 둘이 아니었어. 그냥 못물 터지듯이 아예 콸콸 넘치는구나.) 완전 조또, 언제 부터 시가 그렇게 가르쳤더냐, 문학을 배우겠다는 소녀들 엉덩이 만지라 했나. 더~~러 워서. 그냥 이런 세끼들이 시 자체를 모독하고 욕 보이고 시를 강간해버린 쓰레기 세끼이다. 누구는 강정마을에서, 어느 공장 파업장에서 눈물 나게 싸우며 온 몸으로 압력에 맞서 시를 쓰는데, 언 놈은 이 시의 힘을 빌려서 뭣도 모르는 시 지망생들에게 몹쓸 지랄을 했단 말이지. 이것도 모르고 시집을 사고 시집을 리뷰하고 아 당신의 시는 참 똥고 빠지게 아름다워요. 어쩌면 이렇게 시가 감동적인가요라며 치켜세울 때 너는 조슬 욜심히 세웠구나. 언제부터 니 조슬 세우라고 시를 팔아먹었더냐? 이것도 모르고 열심히 물고 빨았던 독자들은 뭐가 되는 것인가 말이다. 참담함이란 얼마나 비참한 비극인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 개새끼의 발정난 짓들에 대해 독자는 철저히 배신 당하고 처참하게 쓰러져 버리게 만들었다.게다가 비겁하기 까지 해서 싹 사라져 버린다.
송경동 시인은 시를 투쟁의 토로의 현장이다. 천박하고 비열하기 짝이 없는 자본에 대한 그의 시는 무기이다. 따라서 언어가 아무런 힘이 없더라도 사람의 측은지심과 공감과 이해를 바탕으로 자극하는 촉매제와도 같은 무기이다. 누구처럼 지 조슬 세우기 위한 비아그라는 아닌 거니까. 결국 시의 언어는 물과 같다. 누가 어떻게 마시느냐에 따라 약이냐 독이냐는 마시는 놈의 위장에 달린 셈이 아니었던가. 그럴지도 모른다. 시는 아픔을 건드리고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역할과 의무를 지우는 편이 차라리 낫다. 어쩌면 이런 시의 구절 하나로 촉발된 변화의 혁명은 이루어졌으니까. 여자 후리라고 명성 얻은 시인들은 언젠가는 그 본색이 다 드러난다. 시는 병아리 감별사처럼 적나라하게 보일 수는 없어도 어느 누가 쓴 것인가에 따라 언젠가는 행동으로 증명한다.
나는 시의 진정성은 시인의 몸으로 나타낸다고 결론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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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알라딘, 북풀 이웃 서친 분들에게 글 속에 비속어와 욕설이 있어서 송구합니다.
글의 내용상 쓸 수 밖에 없던 심정이었음을 변명으로 둘러 댑니다.
사과합니다.
개인적으로 시를 이용해서 성폭행의 도구로 악용했다는 점에서 매장되어야 합니다.
독자를 얼마나 웃습게 봤으면요.
발정이 주특기인 놈이 시를 만나면, 개 짓거리 나오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