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만 해도 수월한 팔자?라서 살만하면 "까이 거" 좋아하는 독서를 안 할 이유가 없다. 시간 없다는 핑계라 해도 어쩔 도리 없이 바쁜 일상에 정신이 아득하다. 돈 복은 없이 일 복이 터진 인생이라 그런지 독서할 시간이 "좃또마떼" 부족하다. 널널한 시간을 가진 사람이 진짜 부자라는 걸 실감한다. 돈 많아도 늘 시간이 부족해서 허덕거리는 놈은 가난한 자이다. 시간의 여유를 가질 수만 있다면 모를까, 다들 이렇게 바쁨으로 삶에 매몰되는 줄도 모르고 인생이 묻어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러나저러나 책 사놓고 책장에 쌓인 책도 아직 몇 권이나 된다. 낮에 일하고 퇴근하여 운동이라도 한두 시간 소비하고 나면 그다음은 책을 펴놓고 졸음과 싸운다. TV는 거의 보지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것은 눈꺼풀이라는 게 괜히 나온 건 아니다. 피곤함인지 그야말로 몽롱함으로 마치 꿈을 꾸는 듯 멍해진다. 내가 무슨 수험생이나 된다고 읽다만 책과, 사놓고 읽지 못한 책을 읽어 내야만 하는 의무감을 가질 것도 없다. 맑은 정신으로 또렷할 때나 가능하다. 책상에 앉으면 졸리니 러닝머신에 걸으면서 책을 읽는다. 한편으로 내가 뭘 하겠다고 이렇게까지 책 읽기에 몰입해야 하는가라는 회의감도 살짝 들기도 한다. 함께 운동하던 와이프가 옆에서 "운동으로 워킹하며 책 보는 냥반은 당신이 처음이지?"라고까지 핀잔성 거들먹거린다. 답은 간단하다. 안 그래도 희미해지는 지성이랍시고 조금은 또렷해지고 싶은 몸부림, 이게 독서라고 설명했다. 사진 찍으러 가고 싶다. 책 끼고 살고 싶지는 않는데, "그나마 책이라도..."라는 꿩 대신 닭의 심정일뿐이었다.
오늘도 많은 책들이 출간되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요즘은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책이 너무 흔하게 다량 출판 시대이다. 하루에 몇 권이나 출간되는지조차 다 모른다. 알라딘 서재에서도 소개되는 거의가 대부분 신간으로 구입도 못 했던 책이다. 그거 다 보겠다는 목표라면 도저히 무리. 간행물 등록 건수가 얼마인지도 찾아보기도 벅차다. 그리 많은 책은 누군가에게 읽히기나 해야 할 텐데 결국 다 못 읽고 세상을 떠난다. 그래서 선택과 집중이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뭐라고 되는 것도 아닌데, 이 책의 편집자께서 친히 메일까지 주셔서 고맙기는 한데 '앗, 철학 책을 소개' 했다, 솔직히 (학문적 혹은 기타 등등) 철학은 내가 쥐뿔도 모른다. 철학에 사용하는 단어조차 전혀 적응이 되지 않는 독자 중 하나이다. 아쉽게도 편집자 분께서 나의 알라딘 서재 글 몇 번만 주의 깊게 봤다면, "아 이놈은 사진 좋아하는 놈이구나"라고 간파하고도 남을 것이다. 대상을 잘 못골랐다. 그런데 철학 책이라니. 뭔가 조금 찜찜하다. 철학 책은 상상의 세계. 대부분 단어조차, 개념조차 모르니까 활자가 레코드판에 바늘 튀듯이 글씨가 겉돈다. 게다가 꾸벅꾸벅 졸다 보면 책 페이지가 진도가 잘 나가질 못한다. 그래서 휴일 주말에 몰아서 읽는 편인데 가끔 책 읽기도 때로는 노동같이 피로하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사진에 관한 현장에서 기록한 메시지를 담은 책이었더라면 진짜, 뻑~갔겠지만, 철학의 읽기가 어렵다. 괜히 메시지 받고 책까지 구입해놓고 쌓여 있는 책 읽기에 대한 부채감이 생기기도 한다. 빨리 읽지 못해 뭐라도 책 안내성 글이라도 쓰고 싶지만 빨리 쓰지 못해 미안하고 한편으론 뭐냐, 사진 서재 블로그에게 사진 책 소개는 못할망정 철학 에세이 책이라니, 갑뿐사~이기도 하다.
그래도 어쩔까? 개인적으로, 누구 부탁이나 요청에 대해 진짜 거절을 못하는 편이다. 오죽했으면 거주하는 집 명의를 와이프 이름으로, 통장이나 카드의 대부분을 와이프 명의로 했겠는가. 보험도 마찬가지로 와이프 명의로 했다. 아예 내 이름으로 하지를 않는 이유를 누구보다도 잘 하는 와이프의 안전장치였다. 그런데 책에 대한 요청은 와이프 허락받을 건 아니라서 질렀는데 여전히 책장에 쌓여있어도, 또 이 책도 구입했다. 이 나이에 아직도 부사수 하나 없이 가방 들고 다니며 버티는데 게다가 요즘 가을철로 접어들어 사진 찍으러 나가기가 너무 간절하다. 책보다 사진이 좋은데 언제 책을 읽고 리뷰까지 마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집중하여 몰입하게 읽어야 하지만 책상에 앉아서 읽자니 너무 졸아서 시간 관계상 이 책도 운동하면서 읽었다. 쉽게 쓴 철학 담론의 책이라고 저자가 설명하고 있지만 역시 퍼득 이해되기가 간단하지가 않다. 며칠 동안 땀나게 걸으며 읽은 바, 첫 느낌은 그저 "쎄하다"였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문자가 "그"이다. "그것, 그들, 그런데, 그러나, 이런저런 그런 등등의 지시대명사와 접속사의 연속". 내가 철학"적" 사유나 지식과 정보가 부족해서 지시하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철학의 문장은 왜 "그것", "그들"이 많이 나오는가? 지시하는데 지시의 대상을 찾아도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재차 "그것"이 대체 뭘 지시하여 말하려 하는 건지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찾는다. "그것들, 그것이, 그들은"이 너무 많이 나와서 읽어도 읽은 거 같지가 않았다. 아! 책 읽기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또한, "우리, 우리들"이란 단어가 상당히 많이 나온다. 과연 여기서 의미하는 "우리"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타자인가 자아인가? 한참을 헤맨다. 다음으로 많이 나오는 "~~적"이다. 논증적, 자연과학적, 선험적, 초월적, 현실적, 윤리적, 도덕적, 철학적, 종교적, 실증적, 관념론적, 독자적, 자발적, 어떤 단어에 무슨 적, 무슨 적 적적적이 줄줄이 알사탕으로 엮어져 나온다. 그야말로 ~적은 만능"적"인 철학"적"의 조어 같은 단어인듯하다. 아무런 단어 하나라도 "~적"이라 붙여도 문장이 되는 듯이 보인다. "그"와 "우리"와 "~적". 이 세 가지를 빼면 과연 책의 정체는 무슨 철학 책인가? 문장 자체가 이 셋을 빼면 뭘까? 오늘도 마지막 페이지를 향해 끝까지 달린다.
회사의 회식이 있어서 입빠이 한잔하고 얼큰하게 취한 술기운에도 불구하고 운동을 하며 오기로 책을 펼쳤다. 끝까지 페이지를 넘기려 했다. 꼭 마지막 페이지까지 끈기와 인내를 가지고 펼치려고 작정을 했다. 그런데 또 지겹게 나온다. 그것들. 우리들. 뭐시적들. 아니 이 세 가지를 빼면 문장이 아니게 된다. 일부러 빼고 읽었는데 아, 너무 철학"적"이다. (김어준처럼) 씨발!~. 철학을 다루는 책에서 철학이 "것"과 "적"과 "그"라는 세 가지의 복합 작용은 아닐까. "그, 우리, ~적."이 셋을 빼면 과연 문장이 되는 걸까 모르겠다. 진짜로~. 아 또 하나 빼먹은 "것이다"이다.
실증과학? 예술, 문학. 이런 단어도 종종 등장한다. 철학 책에서 과학과 예술과 문학이 등장하는 이유는 뭘까. 사진을 10년 넘게 사진으로 예술을 구하려 해도 예술이 뭔지를 여전히 모르겠는데 철학을 전공한 학자의 예술에 대한 관념이 도대체 무엇인가. 혹은, 과학자로써 실험실에서 데이터를 구하고 데이터를 토대로 수식을 더하여 공식을 만들어 내며 기호를 써서 표현하는 그 과정을 알기는 아는가? 뭘 해봤다고 하지 않고도 상상으로 언어의 유희같은 애매함과 모호함의 지시대명사 남발과 "것"과 "~적"의 나열이 주야장천 나오는가 말이다. 정 궁굼하면 전자기 회로도를 공부해서 컴퓨터 PC 메인 보드의 회로도를 캐드로 한번 그려나 보시라는 말을 꼭 하고 싶다. 하다못해 건축학을 전공해서 캐드로 건축 도면이라도 그려서, 철근과 시멘트의 저항을 구하고 힘의 공식을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해보는 건 어떨까? 혹은, 전자기학으로 전류가 어떻게 흐르고 많은 콘덴서와 저항 보드를 거처서 모니터에 나타는 현상이 어떤 건지 철학"적"인 사유로 말이다. 아! 철학은 이렇게 공허하게 나열해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막상 예술을 하는 사람은 말로는 하지 않는다. 내가 찍은 사진이 얼마나 개 허접해서 마냥 사진에 글을 써대는 이유가 뭐겠는가. 여전히 다 사진으로 만으로써의 사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와 적과 것과 우리가 철학인 거 같았다. 이게 대체 뭐냐는 거다. 철학이 이렇게 모호하고 애매하고 오리무중의 언어의 난무의 무용수가 되어 막춤으로 오늘도 책을 넘긴다. 힐렐레 팔렐레. 맥락도 없는 상징도 의미조차 내가 모르는 읽어도 읽은 거 같지 않은 느낌은 내가 뭔지도 모르는 무의식 속에서 한 판의 춤사위라고 해도 좋을듯하다.
철학은 사유와 논증이라고 한다. 사유는 어쨌거나 단어의 능력에서 나온다. 일단 내가 자주 접하는 단어가 아니라서 그런지, 철학적인 사유는 어렵다. 아니 불가능에 가깝다. 이 책의 저자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전공했는 거 같다. 학위를 못봤으니 무엇으로 학위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비트겐슈타인이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종군 기자로 전쟁 사진으로 유명했던 로버트 카파, 유진 스미스, 결정적 순간의 카르티에 브레송 이런 작가들의 사진을 자주 봤었다. 난 비트겐슈타인이 뭘 했던 사람인지를 전혀 모른다. 그래서 찾아 봤다. 비트겐슈타인이 남긴 가장 유명한 말은 "말할 수 없는 것은 보여져야 한다"라고 했다. 비트겐슈타인의 문장을 쮜뿔도 모르면서 내 나름대로 해석하고 이해를 하고자 했다. "언어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아무리 떠들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라" 즉 주절거리지 말고 행동으로 말하라는 의미로 받야 들어진다. 이 해석이 맞든 틀리든 난 아쉽지만 비트겐슈타인을 만나서 대화를 해본 적은 없다. 대체 그 말의 의미 해석이 맞나요?라고 묻고 싶지는 않다. 살아온 시대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사유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며 설사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돌아가서 만난다 하더라도 대화는 불가능하다. 즉 알 턱이 없다. 혹시 비트겐슈타인도 그, 우리, ~적, 것이다 이걸 많이 사용했을까 난 이게 더 궁금하다. 궁금할 뿐 직접 답변을 듣는 건 역시나 불가능하다.
글이 길었다만은, 하나의 예를 들고 끝내기로 한다.
오래전에 모 방송국 TV프로그램 중에 가족오락관이 있었다. 가족 오락관 프로그램 중에 게임의 참여자가 5명씩 일렬로 서서 맨 첫 사람이 진행자가 보여준 단어 팻말에 적힌 단어를 맨 끝 사람이 맞추는 게임이었다. 다만 입모양만으로 진행자가 보여준 단어를 표현해서 처음 팻말을 봤던 사람이 맨 끝 사람이 맞추어 점수를 내게 되는 식으로 진행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철학도 어쩌면 가족 오락관에서 하는 게임처럼, 원래의 저자인 철학자가 펴낸 철학의 책과 논문으로 다음 사람으로 전달되고 또 전달되고 다른 언어로 번역되고 번역된 언어로 다시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 최종적으로 나에게 까진 전달될 때, 과연 나는 원 저자 철학자의 뜻과 마지막으로 내가 전달받은 철학"적"인 것을 얼마나 알아먹을 수 있을까 싶었다. 가족 오락관에서 처음 전달한 사람과 마지막 전달자의 입모양은 거의가 빗나갔으며 전혀 엉뚱한 단어로 둔갑해버린다. 언어의 소리가 없는 단어의 무음 전달은 뉘앙스가 없고 억양이 없고 고저가 없는 흡사 금붕어가 뻥긋하며 입만 벌리는 무음의 입모양으로 금붕어의 철학을 알아듣는 듯이 철학자의 뜻을 알아듣고 있는 셈이다.
물론, 나는 이 책이 뭔 말인지 몰라도, 활자만큼은 끝까지 다 읽을 예정이다. 이제 반 이상 읽었고 취향 편에서 변명 편으로 넘어간다.
이 책은 철학자로써 쉽게 쓰려고 노력했다고 머리말에서 언급하였다. 쉽게 쓴 책이었는데 그렇다면, 내가 철학에 대해 무지하였다는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