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에는 책 리뷰나 페이퍼 글도 한 권조차 못(안) 했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라고 의심을 해도 단순한 지장은 거의! 없다. 조금 바쁜 일상이고 이 조금 바쁨이라는 것으로 시간이 무참하게 쓰러져 지나쳐 가고 있는 셈이다. 반복의 일 같은 기계적인 움직임이라면 그나마 낫겠지만 하여간 일도 상수보다는 변수가 사사건건 스트레스가 되고, 야금야금 심리적인 지침이 부침을 거듭하고 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했다. 그러나 안 먹을 테니 일하지 않을 수는 없을까라는 궁리는 논리적으로도 너무 열악한 현실과 마주한다. 인간의 식욕과 생존이란 일의 유무와는 상관없는 거다. 가끔 먹는 것에 열받을 때도 있다. 이게 다 뭐 하자고 먹고 사느라 미친 것처럼 맹목적으로 살아야 할까라는 물음에는 여전히 오리가 무중이다. "안 먹고 안 살면 안 되겠어?" 틀린 말도 아니지. 밥을 못 먹어도 시간에 걸쳐 순간이란 시간을 억지든 자연스럽든 먹고산다. 다시 말해서 일하지 않는 자는 순간도 먹지 말라면 좀 수긍이 가긴 하다. 그것도 절대적으로.
15년간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실직으로 직장을 그만둔 와이프에게 권한 책이 "심미안 수업"이란 책이다. 보이는 대로 보지 말고 보고자 하는 것으로 보려는 의도의 시선으로, 시야와 시각을 넓히는 것에서 조금의 즐김과 누림이 깃들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권했다. 직장이란 그만한 면적의 시야보다 더 넓은 공간의 파노라마를 의도적으로 보이는 것들을 찾는 것에서 재미를 발견한다는 것.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기약 없이 생겨난 여유에 대해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들을 하려 들지만, 이것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남는 시간의 주체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아직은 모를 일이다. 역시나 책은 어렵다는 핑계로 덮어 놓고 있다. 이 봄날에 베란다에 놓인 책이 햇살을 받아 유난히도 반짝거리는데, 언제 다 읽기가 어렵지 않을까 예상이 된다. 아직은 전 직장에서 받은 그 스트레스 풀리기에는 시간이 여물지 못했고 직독의 여운이 짙게 베여 있고 보니 당분간은 책도 펼치지 말라고 했다. 여행에는 여독이 남는데 직장에서 돌아온 몸은 직독이 무척 많이도 남을 것이다. 희석되고 휘발되려면 아직은 더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할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당분간은 와이프가 가고 싶어 하는 곳으로 무조건 다 갈 작정이다. 그동안 나도 못 가본 곳이 너무 많았다.
돈 복은 없는데 일 복은 많은 모순된 꼬인듯한 인생. 남들은 일이 없어서 황당하기까지 하다고는 하는데 어떻게 나는 일이 밀려들까. 세상이 불공정한 것도 일에 비례하는 돈은 항상 성립하지 않는다는 공식이 엄연히 있다. 회사도 공사 수주를 몇 건 했고 기존에 일들도 여전히 시간을 재촉하는 일이 쌓여간다. (그렇다고 월급은 늘 제자리) 주말과 휴일에는 그동안 일하느라 다니지 못했던 여행에 대한 갈망을 소원 풀이하듯 가자고 종용하는 와이프의 요청도 거절할 수 없었다. 운전을 오래 하다 보니 무릎도 시큰거린다. 나이 들어가는 거 같다. 젊을 때 하루 종일 운전해도 괜찮았던 시절은 이미 과거의 빛바랜 훈장같은 거다. 운전의 피로는 젊은 시절의 영광과 같고 피곤은 누적되고 지쳤다는 번아웃 증상이다. 퇴근 후에는 그저 멍하니 유튜브 영상에 음악만 듣는다. 책의 활자나 책의 이미지를 보면 피로증상으로 인한 것인지 눈에 들어와 박히지도 않고 설사 건성의 활자는 레코드판에 돌아가는 턴테이블 바늘의 오작동처럼 튀기 일쑤이다. 그럴 바에는 아예 활자를 좀 멀리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다. 글 쓰고 책을 내는 작가들에겐 많이 미안한 일이다. 사실 40-50대 남자들이 술 한잔 간단히 마실 수는 있어도 가오 잡고 책 한 권 펼치기가 그리 호락호락한 삶들도 아님을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 과연 그들에게 지금 당장 가장 목이 마른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니즈에 맞는 어떠한 글일 수 있을까. 역시나 당면한 현실의 요구와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서 구두가 터지도록 뛰게 만드는 것에서 어떤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지. 글 쓰는 작가야 제 할 말만 할 때에 외면당한다고 억울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서로의 입장에 대한 처지와 교감이 없는데 서로에게 어긋난 니즈를 누가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전혀 딴 동네에서 노는 애들끼리 모여서 친하게 지내라는 꼴이다.
역시나 이와 비슷하게 사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진 봐달라고 애쓰고 싶지 않고 점점 사진 올리고 싶지가 않다. 비비안 마이어처럼 줄곧 나게 제 혼자 지가 찍어 대며 즐기는 사진이라면 나도 그런 사진이나 자위하듯 찍고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바빠도 카메라의 뷰 파인더로 보는 세상으로 빠져 있노라면 세상 사의 먼지들이 제거되는 기분이 든다. 한 세상 이렇게 살다 가는구나라는 희열과 혹은 자포자기성 자책감들이 서로의 모순으로 으르렁거리며 내부에서의 치열한 전투장이 뷰 파인더로 보이는 듯하다. 결국 수도 없이 셔터를 누를 수 있어도 정작 누르는 횟수는 결과와는 전혀 상관없이 너무나도 적다. 이 적게 잡은 순간들마저도 이젠 블로그에 포스팅 횟수조차 줄어든다. 자꾸 보여서 뭘 하자는 것도 없이, 보이거나 보이지 않아도 그저 무덤덤해져만 간다.
시간은 무색무취의 처절함이거나 혹은 무연의 처연함이다. 늙어가는 것들의 처절함은 때로는 지금 이 순간의 혼란과 악연으로부터 해방으로 변화시킨다. 시간의 본질은 멈추지 않고 늘 변화와 변질과 변동으로 무색과 무취를 갈아 마신다. 색이 무한대로 변할 때, 향기가 무한대로 변할 때 결국은 있어도 없고 없어도 있는듯한 무한의 착각으로 빠져들게 한다. 내 삶에 주어진 시간의 변화는 그래서 잔인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축복이기도 하다. 제벌 3세의 마약에 취한 쾌락이란 짧은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는 영원성의 쾌락은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시간의 무색함에 대해 인생의 지난한 고통의 대가만 놓여 있을 뿐이다. 사진은 그래서 시간을 찍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보자면, 잔인하고도 또한 축복이기도 하다. 이 삶이 영원하다면 언제까지 먹어야 할 것인지 언제까지 변화를 겪고 지켜봐야 할 것인지 형벌처럼 고역적이라는 것. 가끔 시간이 지겨울 때는 더 빨랐으면 좋겠단 생각이 든다.
그동안 리뷰나 페이퍼 글을 못쓰고도 읽은, 아니 봤던 사진 책들이다.
책 세 권이 모두 사진 책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저자가 같은 책이 두 권이다. 대단하기도 하다. 사진 책은 한 권 내기도 빡치는데 두권도 내는 저자가 부러웠다. 나도 다른 거 치워 버리고 사진 찍고 책내기만 하라면 잘 할 자신 있는데.,, 자신은 있는데...그래 자신만 있을 뿐, 실행력은 없는데, 없는데. 그래서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