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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 - 김종태 디카시집
김종태 지음 / 창연출판사 / 2018년 8월
평점 :
우리는 왜 밥을 먹어야 하는가라는 우문의 우답은 자명하다. 배고프니까라는 증상과 허기의 감각을 즉답으로 내놓는다. 아니 너무나도 당연한 답을 굳이 물어야 하는 것은 우리 삶이란 지속적인 허기의 위기에 늘상 직면해 있다는 절박함 때문이다. 이 허기증에는 물리적인 에너지라는 보이지 않아도 증상으로 처절하게 느껴 온 것이 무엇인지 안다. 즉, 인간은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에너지를 공급받지 못하면 허기가 생기는 열역학 에너지의 법칙처럼 우리 육체가 이미 이렇게 진화되어 온 이유이다. 움직임에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에너지를 외부로부터 공급받음으로써 생존에 더 효율적이라는 진화의 과정을 거쳤다. 달리 물어보자.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왜 시를 쓰는가? 왜 예술이라는 빌미로 음악과 그림과 영상과 미학에 에너지를 쏟으려 하는 것인가?라는 질문도 우문스럽지만 역시 우답에는 허기진다는 것이 그 답이 될 수 있다. 미학의 허기증은 그럼 왜 생길까?
앞서 언급했듯이 물리적으로는 살 수 있지만 인간은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복잡다단한 난해의 존재들이다. 물론 일부 특별한 인간은 밥만으로도 충분히 산다. 그러나 모종의 인간들 중에는 도저히 밥만 가지고는 살아낼 재간이 없는 결핍의 인간이 반드시 있다. 미학의 허기와 예술의 허기, 그리고 표현의 허기증은 몇몇 인간들의 중대한 결핍의 증상으로 나타나고, 그래서 나오는 증상으로써 나는 도저히 밥만 가지고 이 세상을 살 수가 없다는 절규가 터져 나온다. 이쨋든 절규의 표현이 되었든 절박의 표출이 되었든 탄식과 탄성의 포효가 되었든지 간에 도저히 밥만 가지고는 못 살겠다는 아우성의 표현이 곧 문장으로 나타낼 때 거창한 문학을 끄집어 내지 않아도 시를 지어서 문장의 푸짐한 밥상을 끼고 한 세상 유람하듯이 표현을 하는 결정적인 이유이다.
모든 시는 표현의 허기에 대하여 밥 먹기와도 같다. 사람은 먹어야 산다는 명제에 있어서 이 먹기는 시를 먹잇감이라는 거. 생산자의 시와 소비자의 시는 그래서 밥을 짓듯이 시를 지어야 하고 밥을 먹듯이 시를 먹어야 산다. 그래서 삶이란 행위가 마음에서 쌓여 존재의 이유에 밥을 먹어 존재에 대한 사유적인 힘을 내게 되는 거다. 이것이 결핍이 강해지면 얼마 버티지를 못하고 결국 영혼의 아사로 이어진다. 굶어 죽는 사람은 자살자와 다를 바 없다. 인생의 질곡을 좀 더 해안과 통찰로 버무렸더라면 끝없이 생존을 위협하는 것들로부터 방어의 힘을 내는 것이 곧 문학의 역할이고 예술의 힘이다. 문학의 힘이 떨어져 갈수록 세상의 자살자와 타살자는 점점 늘어가는 것은 비단 우연일까 따져 보지 않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결핍이 만든 존재의 끝은 결국 자살자의 지표로 나타난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것도 없다. 다들 굶어 죽어가는 거다. 허기진 상태에서 움직일 힘도 없어졌을 때 더 이상 움직임을 포기하는 것이 곧 문학의 죽음일 테니까 말이다. 영혼이 거세된 좀비처럼 사는 것은 산다 말할 수는 없는 이치가 시에서 발견하는 이유와도 맥이 닿아 있다.
시인은 농부와도 같다. 마음의 밭에 마음의 양식을 만들고 마음의 밥을 지어내는 요리사이다. 언어라는 도구를 가지고 모락모락 한 공기의 따순 밥을 지어내는 역할이다. 이 밥으로 마음의 일용할 양식이 되어 거대한 자본이 만들어 내는 결핍의 밥상 위를 풍성하게 올리는 풍요의 사신이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그리고 색다른 밥과 반찬을 올린다.
이른바 디카시로 최초로 등단한 시인이 지어낸 밥상에는 사진과 시가 올려져 있다. 허기의 시대에 풍성하다 못해 그동안 먹어 보지 못한 새로운 밥과 반찬을 올리는 디카 시인이 만들어 냈다는 점이다. 허기로 주림의 마음 고픔을 가득가득 채워 포만감이 변환시켜서 일어나는 행복감이다. 여기에 끝없이 치밀어 오르는 허기증에 직면한 나에게 디카 시집을 소비하는 이유와도 같다.
단순히 사진을 찍고 사진에 걸친 시를 소비하는 것은 다른 무엇의 목적보다 내 삶의 허기를 채우고 이 허기를 채움으로써 내 삶의 상상력에 대한 동력을 만들게 한다는 점이다. 모름지기 우리가 살았고 살아가고 살아갈 이유가 단지 밥 끼니나 때우자고 사는 목적이라면 지금 죽어도 하등의 이상할 것도 없으며 다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오늘 내가 사는 이유. 그것은 끝없는 허기에 대한 소비를 반드시 동반한다는 운명을 받았던 까닭이 아닐까 한다. 그만 찍을 힘이 없을 때까지 사진을 찍고 시를 읽고 쓰는 행위는 결국은 우리가 한 세상을 살아가는 운명이라면 그 운명을 겸허히 수렴하는 것이 일종의 도리이자 인간의 품격을 갖추는 일일 것이다. 인간 다움이란 다른 무엇보다 차별화된 행위에서 비롯된다. 오늘 하루 한 끼의 밥을 먹으면서 한 장의 사진과 한줄의 시의 밥을 동시에 먹어야 양식은 불균형에서 벗어난다. 삶이 병들어가는 것은 어쩌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기보다는 불균형과 부조리함과 불공정함에서 비롯된다. 병은 균형이 무너질 때 나오는 허기의 증상일 것이다. 사유의 균형감각, 육체의 균형 감각을 잃어버릴 때에 나타나는 온통의 불균형들의 세상은 더더욱 난해한 바다에 요동을 치며 떠밀려가는 시간 위의 부평일 것이 아닐까 한다.
사진과 시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디카 시집 한 권 읽어도 그리 나쁘지 않은 시간을 소비시킬 수 있으리란 믿음을 이 시집을 통해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 시집에 나오는 사진들은 우리들이 흔히 만나는 일상적인 사진에 특별한 상상력의 시들이 결부되어 있다. 흡사 기차의 철도 레일처럼 두 개의 카테고리가 서로를 서포트하며 시집은 기관차처럼 상상의 레일 위를 힘차게 달린다. 그 달리는 힘은 시인의 끝없는 일상에서 만나는 언어의 상상력이다. 흔한 것을 특별하게 만드는 그의 시선과 사유가 한 권의 시집에 그대로 녹아들어 있고 녹아든 상상력이 시집에 프린트되어 염색약처럼 우리들의 허기진 상상력에 새로운 언어로 담담하게 쏟구치도록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혹은 내일이나 우리 삶의 일상은 특별할 것도 없는 이벤트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어제와 비슷한 오늘이 어제와 약간의 간격을 두고 미세한 균열같은 차이가 만들어내는 삶의 스펙트럼은 단절이 아니라 연속된 작은 변화에서 나타난다.
지나온 시간을 되돌이켜 보면 그 작은 차이가 시간을 더할수록 점점 벌어져 큰 격차의 변함으로 이어지듯이, 스마트폰이나 카메라로 찍고 쓴 시가 그런 미세한 내 삶의 영혼에 균열이 일어나고 점점 치밀해지고 농도를 더해갈 때 그런 시간이 쌓여갈 때 지나고 보니 어느새 이만큼이나 누적되었음을 삶이 결과로 부각되는 것일테다. 하루의 몇 끼를 소비하든 우리 인생은 부단히 먹음으로써 다른 무언가를 생산하고 다시 소비한다. 이 과정에서 인생의 윤택함에서 만들어지는 작은 사유의 행복은 곧 자신의 정체를 만들고 자신의 내면을 구성한다. 이런 점에서 사진과 시의 가장 큰 목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