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꼬리
딸이 이럴 때마다 저럴 때마다
아빠가 어떻게든 해볼게
딸에게 장담하다 어쩐지 자주 듣던 소리다 싶어
가슴 한쪽이 싸해진다
먹고 죽을 돈도 없었을 내 아배
아들이 이럴 때마다 저럴 때마다
아부지가 어떻게든 해볼게
장담하던 그 가슴 한쪽은 어땠을까
아빠가 어떻게든 해볼게
걱정 말고 너는 네 할 일이나 해
딸에게 장담을 하면서도 마음속엔
세상에 수시로 꼬리를 내리는 내가 있다
장담하던 내 아배도 마음속으론
세상에서 무수히 꼬리를 내렸을 것이다
아배의 꼬리를 본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아배의 꼬리는 떠오르지 않는데
딸은 내 꼬리를 눈치챈 것만 같아서
노심초사하며 오늘도 장담을 하고 돌아서서
가슴 한쪽이 아려 온다 꿈틀거리는 꼬리를 누른다
(안상학 시집,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실천문학사, 82-83P)
아비는 어떻게 해볼게라고 했지만 적어도 나는 아비처럼 딸에게 어떻게 해볼게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비의 꼬리를 나의 당대에서 끊는 것. s나는 아비의 꼬리를 그대로 물려받고 싶지는 않았으리라. 둘중 하나다. 내가 아비가 되지 않는 것이거나, 혹은 내 아비처럼 어떻게든 해볼게라는 어떻게 할 수없어 꼬리를 내리는 걸 하지 않도록 어떻게든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두는 것. 이 둘 중 하나라면 되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는 안타깝게도 선대의 어떻게든 해볼 도리가 마땅하지 않음에도 이어서 또 내가 그 전철을 그대로 밟아서 어떻게든 해볼 께라며 꼬리를 내려야 하는 것도 유전인가 싶었다. 나는 아비에게, 딸은 나에게 어떻게든 꼬리를 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어떻게든 해볼게"라는 막막함에 치를 떨게 만든다.
아버지요. 하늘에서 잘 계시죠? 이젠 어떻게든 해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물론 내 딸에게도 어떻게든 해볼 수 있으면 된 거 아닌가요? 딸아이의 2학기 등록금과 기숙사 생활비가 나왔다. 그래 어떻게 볼 도리가 없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그게 아비의 삶을 압류한다 하더라도, 여하튼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더라도, 졸업까지는 무수히 어떻게든 해봐야 한다는 걸 딸아이도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그때 나는 그 사람을 기다렸어야 했네
노루가 고개를 넘어갈 때 잠시 돌아보듯
꼭 그만큼이라도 거기 서서 기다렸어야 했네
그때가 밤이었다면 새벽을 기다렸어야 했네
그 시절이 겨울이었다면 봄을 기다렸어야 했네
연어를 기다리는 곰처럼
낙엽이 다 지길 기다려 둥지를 트는 까치처럼
그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어야 했네
해가 진다고 서쪽 벌판 너머로 달려가지 말았어야 했네
새벽이 멀다고 동쪽 강을 건너가지 말았어야 했네
밤을 기다려 향기를 머금는 연꽃처럼
봄을 기다려 자리를 펴는 민들레처럼
그때 그곳에서 뿌리내리듯 기다렸어야 했네
어둠 속을 쏘다니지 말았어야 했네
그 사람을 찾아 눈 내리는 들판을
해매 다니지 말았어야 했네
그 사람이 아침처럼 왔을 때 나는 거기 없었네
그 사람이 봄처럼 돌아왔을 때 나는 거기 없었네
아무리 급해도 내일로 갈 수 없고
아무리 미련이 남아도 어제로 돌아갈 수 없네
시간이 가고 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네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네
그때 나는 거기 서서 그 사람을 기다렸어야 했네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 위와 같은 시집 )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했던가. 시간의 변화는 모든 것을 압도하는 이 속에서 시간의 운명이다. 만나야 할 운명은 만날 것이고 헤어질 운명은 헤어져야만 한다. 시간은 그래서 더 모질다. 영원한 구속이다. 그러나 각자의 시간은 길이가 다르고 주관적인 속도가 다르다. 자의적인 시간이 물리적인 시간을 무마시켜 버리는 오도된 삶이다. 각자가 가진 시간은 그래서 미스매치될 때, 우리는 만날 수가 없다. 기다림은 시간의 그리움이다.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은 그리움이 없다는 것. 그러나 아무리 그리워 기다림이 깊어도 각자가 가진 시간이 어긋날 때마다 애절해진다. 너의 시간과 나의 시간은 같았거나 다르거나 그 공유된 한정된 시간에서 우리는 합일한다. 아니면 더 많은 불합치가 있다. 선택은 늘 집중을 비켜가고 우리는 삶의 공간은 스쳐간다. 이모든 것이 스쳐 지나갈 때 잠시 옷깃 하나 스치는 인연의 고통스러운 마찰력이 발생하겠지.
이렇게 두 시의 느낌이다.
이웃분의 소개로 안상학 시인의 시집을 두 권이나 주문해서 읽었고 감상했다. 평이한 시어들. 일반적인 흔히 자주 쓰는 단어들의 조합은 진부한 단어에서 흘러나오는 공감대의 만연한 미소를 번지게 한다. 그런가. 역시 같은 동시대에 나고 자랐던 사람의 공통된 정서는 시대를 가르며 살아온 자들끼리 부대끼는 언어 총합들이다. 아버지. 딸. 고향. 그리움. 기다림. 꽃. 내가 자식을 낳아 보지 못하면 도저히 나의 아버지를 느낄 수 없듯이 아버지의 정서가 아이에게로 전달되는, 그러나 사뭇 다른 처지와 환경의 소용돌이에서도 전달되는 묘한 동질감. 그래서일까. 이 시를 소개해준 분도 아마 비슷한 정서를 가졌음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이처럼 시는 이해의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의 바탕으로 한다고 믿는다. 비록 한 번이라도 뵌 적이 없는 시인과,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시인의 소개자와 읽는 내가 느끼는 서로 간의 연대감이랄까 공감대랄까. 한 번도 본 적이 없어도 뭉쳐지는 그 정서의 울림이라는 것이 시의 문장에서 터져 나오는 빛 같은 것들이다. 언어가 문장이 되고 정서가 맞물릴 때 비로소 시는 감정에 휘말리는 애절함과 어찌해 볼 도리의 없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모종의 비애감이 짬뽕 국물과 함께 울어 나온다. 별도로 넣은 감미료가 없어도 재료 하나하나에서 나오는 본연의 맛이 어울리는 시의 맛은 우리가 일상에서 먹는 짬뽕 같은 맛이다. 시에 밥이라도 말아 먹는 듯이 짬뽕 국물에 밥 말고 소주 잔 기울이며 읽은 시가 마치 밥알을 돌돌 굴려가며 삼키는 듯이 식도를 타고 흐른다. 언젠가 기분 억수로 내키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두서없이 차를 몰고 시인을 찾아가서 얼큰한 얼큰한 짬뽕에 소주 한잔 대접하고 소개해준 이웃분을 찾아가서도 홍합살 그득그득한 한 대접의 시가 우려낸 짬뽕을 드리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