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것이 자랑은 아니다. 그러나 가난을 자랑하듯 알릴 때는 대부분 이 가난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가난함에 대한 질문을 던질 때 가능하다. 왜 가난할까를 파헤쳐 봐야 할 이유가 고작 가난한 것을 자랑으로 내세우려 함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난을 이유로 누군가로부터 적극적인 부조나 동정을 받고자 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현시대의 자본은 돈이 전부처럼 여길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의 조건이 결코 돈이 전부는 아님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인간의 조건이라? 인간이란 조건이 무엇인가 묻는 질문처럼 느껴지는 제목이다. 혹은 다르게 해석하자면, 인간의 (살아가야 하는데 필요한) 조건으로 보이기도 했다. 본질적인 조건이란 인간으로 태어난 생물학적 조건일 것이고 또 하나는 사회환경적인 조건일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저자의 소위 밑바닥 인생을 전전한 다양한 이야기를 실 체험적 경험으로 서술한다. 즉 먹고사는 일에 대부분의 삶을 이야기한다. 치열하게 산 작가의 인생사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글이기도 하다. 즉 가난함의 대항이든 적응이든 일종의 개별적 분투기였던 셈이다. 왜 열심히 일해도 가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없다. 그동안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인간의 조건을 변화시켜 왔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조건은 무엇인가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다. 제대로 물어봐야 할 이유가 인간이 한 세상을 살아가야 할 조건의 부합과 탈락에 따라 삶의 건강도가 달라질 것이 확실한다. 질문은 없고 가난한 상황만 있다.
금수저로 혹은 무슨 돈벌이 재능이 좋은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다 가난할 수밖에 없다. 혹은 가난하다고 말할 수는 없어라도 일상의 생활에 급급한 쪼들림은 늘 있어 왔다. 자본은 자본적 조건이 형성되지 못하면 쉽게 가난을 물리칠 수가 없다. 사극 드라마에서도 곧잘 나오지 않는가. 가난한 나라님도 구제를 못한다는 말. 어느 정치 체재에 상관없이 자본은 늘 불공평하고 어딘가 정점으로 집중된다. 권력으로 집중되든 세력으로 집중되든 여하튼 모이고, 모이는 곳에 내가 열외 되어 있으면 가난할 뿐이다.
선사시대에 누구나 자기 손으로 먹이를 잡고 식물을 채집하며 동굴에서 먹고 자던 시대야 공평했다. 가난이 공평했던 거다. 굶주림이 공평했고 먹이를 찾으로 다니는 활동 반경이 공평했다. 누군 더 먹고 덜먹고 가 아니라 전체적인 허기조차 평등했을 것이다. 하기야 똑같이 먹이를 찾고 똑같이 나눠 먹던 시대에 얼마나 절대적인 평등이었을까. 그렇다고 그때가 인류가 이상사회였다는 것도 아닐 테다. 모든 걸 똑같이 공산하는 사회가 왜 바뀌게 되었을까 따져 볼 수 밖에 없다. 오늘날은 저마다의 조건과 여건, 가진 재능과 부여받은 책임과 권리로써 선사시대와는 다른 체제를 살고 있다. 따지고 보면 무조건 가난할 일도 아니고 무조건 모두 떼부자일리도 없다. 모르긴 몰라도 여기가 동남아시아에 위치한 부르나이처럼 조상님들의 은덕으로 지하자원이 풍부해서 일년에 국민들 호주머니를 자동으로 채워주는 곳이 아니라면 말이다.
가난을 너무 강조하지 말자. 무슨 자랑도 아니라면 말이다. 어제가 근로자의 날이라서 통계가 하나 나왔다. 직업군 중에서 최저 소득 1등이 시인이라고 했다. 1년 소득이 평균 600만 원도 되지 못하는 직업. 1년 12달로 따지면 그야말로 최저 생계비조차도 되지 못한 직업이다. 그런데 시인은 시를 쓰고 시를 쓰기 위해 돈을 벌고 먹고산다. 무엇을 위해 한 인생을 받치겠는가를 따져보면 뭐 빠지게 돈만 찾는 길이 아니라 문학에 자신의 모가지를 거는 직업이라는 소리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인간의 조건이란 결코 돈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말하고 싶었다. 가난해서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일들이야 나름대로 다 처절하기 마련이다. 나만이 특별한 더 처절함도 아니고 가난하면 닥쳐야 할 저소득 저임금의 굴레는 개별적이기도 하고 공통적이기도 하다. 자본적 신분사회에서 나타나는 가난의 현상은 직업의 귀천이 없다고는 하나 직장의 귀천은 엄연히 존재한다. 직업으로써의 시인과 직장으로써의 시는 가능하지도 않다. 시업의 직장은 결코 아닌 까닭이다. 그래서 시인은 최저 소득에 대해 스스로가 자존심은 상할지언정 자존감은 하늘을 찌른다. 그 자존감이 자신들의 직업을 고귀하게 만들고 숭고하게 엮어 나간다. 누구나 다 특별한 공부할 재능이나 물려받은 재산이 없으면 다 고만고만하게 분투에 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인은 단순히 먹고사는 일에 시를 더한다. 물론 시인도 시인 나름이라서 전업 시인은 극히 소수이다. 다 아는 바 아닌가?
여기서 그런데 말이다. 시인의 최저 소득이란 통계가 있긴 해도 전업 사진가는 최저 소득이란 통계조차 아예 없다. 시인이라도 등단하면 적어도 원고료 푼돈이라도 벌 수 있는 기회라도 잡지만 사진가는 전혀 그런 게 없다. 그런데 사진가는 오늘도 사진을 찍으러 카메라를 메고 세상을 주유하려 한다. 필름 한 롤 때문에 오늘의 밥을 사 먹을 돈으로 대신 필름으로 바꾼다. 그런 사람이 제주도에서 일찍 세상을 등진 김영갑 작가였다. 기초소득조차 없었던 작가는 왜 죽을 만큼 사진을 처절하게 찍었을까?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서는 결코 아니란 결과가 그는 자신의 온몸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가난에 저항하는 방식. 가난에 대항하는 자신의 저항 방식. 이것도 곧 그의 사진을 위대하고 숭고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이 가난해도, 가끔 자본이란 돈이 삶의 자존심을 팍팍 꺾더라도, 스스로의 자존감과 예술에 대해 자존감은 죽지 말자. 이 우주에서 인류가 멸절하더라도 인간의 순수와 고귀한 영혼은 돈 많은 부자가 결코 가질 수 없는 것들이다. 편리함에 길들여진 삶이 늘 가난으로 비굴하게 여길지는 모르나 차라리 불편하고 고달파도 오늘의 내가 인류의 최고의 가치를 만들어 낸다고 스스로를 착각하자. 어차피 착각이고 오해의 시대에 이왕이면 가치로운 착각이 덜 슬프지 않을까 해서이다. 아니 이렇게라도 착각하지 못하면 너무 억울하고 우울증으로 졸도하고 말거 같아서이다.
또한, 체재가 불공정으로 가난하다면 대의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일말의 어떤 후보가 나의 입장을 대변할 작은 티끌이라도 찾아내자. 아니 이것도 못하겠다면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연대도 하고 토론도 하고 열변도 하자. 수전 손택의 저서 타인의 고통에서 피력했듯이 나의 고통이 비슷한 처지의 고통에 대해 외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의 고통을 덜어내는 것이 곧 나의 고통도 덜어낼 가능성을 더 증폭시킬 수만 있다면 해야하는 활동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결코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그러나 대신은 못하지만 연대와 공감은 가능하다. 이런 공감과 교류와 연대가 인간의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의 조건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