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 용서받을 자격과 용서할 권리에 대하여
시몬 비젠탈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19년 10월
평점 :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이책은 유대인 포로수용소에서 수용되어 있던 지은이 시몬 비젠탈이, 죽음이 임박한 환자를 격리시켜 놓은 병실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21살의 ss대원인 카를을 만나서 일어난 것을 회고한 책이다. 책의 3분의 1은 그것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 3분의 2는 지은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끝맺으면서, 독자들에게 한 질문에 대하여 세계각지의 인사들이 답변한 내용을 싣고 있다.
시몬비젠탈은 유대인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어있던 어느날, 자신이 예전에 다녔던 기술학교를 개조하여 독일군의 임시병원으로 만든 곳에 쓰레기를 치우러 가게 된다. 거기서 한 간호사가 그가 유대인임을 확인한 다음, 그를 건물위층의 한 병실로 안내한다. 비젠탈은 그 곳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21살의 ss대원인 카를을 만나게 된다. 죽어가는 카를은 침대에 누워 비젠탈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주길 바란다. 그는 어릴때는 성당복사를 하기도 했으나, 히틀러소년단에 가입한후, 전쟁이 나자 ss에 자원입대하였다고 한다.
그가 간호사로 하여금 유대인을 불러달라고 부탁한 이유는 죽기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받기 위함이었다. 그는 우크라이나 중부도시 드네프로페트로프스키에서 그가 소속된 독일군 부대가 자행한 유대인 학살 장면이 잊혀지지 않아 괴로워하고 있었다.
당시 그의 부대원은 러시아 군이 퇴각한 지역에서 유대인 200명 가량을 들어가기 불가능한 한 집으로 석유통과 함계 몰아 넣은 후 불을 질렀다. 그 유대인들은 대부분이 노인과 여인이었고,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아이도 있었다고 한다.
그때 불이 붙은 채로 아이를 안고 건물에서 뛰어내리던 한 가족의 모습을 그는 결코 잊을수 없어 괴로 한다.
“2층 창문에 어린아이를 안은어떤 남자의 모습이 보이 더군요. 그의 옷에는 이미 불이 붙어 있었습니다. 옆에는 아이의 어머니인 듯한 여자가 서 있었고요. 그 남자는 한 손으로 아이의 눈을 덮어서 가려 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그는 창밖으로 뛰어내렸습니다. 잠시 후에 아이의 어머니도 뛰어내렸지요. 그때부터 다른 창문에서도 몸에 불이 붙은 사람들이 잇달아 뛰 어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총을 발사했죠……. 오, 하 느님!"
그는 죄의식에 몸부림치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죽은 사람들을 살려낼 수 있다면 이보다 더 끔찍하고 오래가는 고통도 기꺼이 감수하겠노라고 하였다. 그의 고백은 분명 진정한 참회의 흔적이 있음을 지은이는 느꼈다.
그가 비젠탈을 자신의 병실로 불러 온 것은, 죽기전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누구든지 유대인을 만나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비젠탈에게 마음 편히 죽을 수 있게 제발 용서를 해달라고 간청한다.
이야기를 조용히 모두 들은 후,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비젠탈은 아무말 없이 방을 나선다.
이후 지은이는 그 순간 자신의 결정에 대해 고뇌한다.
그리고 자신의 회고 마지막에 독자들에게 질문을 하면서 이야기를 마친다.
“ 과연 나라면 어떠 했을 것인가”
이책은 용서를 구할 대상이 사라져서 용서를 받지 못할 상황에 처한 사람과, 용서할 대상이 사라져서 용서할 기회를 놓쳐 버린 사람에 관한 것이다.
지은이의 회고가 끝나면서 세계각지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견해는 주로 네가지로 나눠진다. 용서를 하여야 한다. 용서를 할 필요가 없다. 용서하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중요치 않고, 이후의 삶이 중요하다는 견해, 이미 비젠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행하였다는 견해등이 그것이다.
용서를 하여야 한다는 견해의 근거는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신도 나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 즉 모든 인간은 불완전 한 존재이므로 자신도 죄를 짓는 다는 것을 전제로한다. 또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그 기회야 말로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할 기회라는 것,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서의 만찬에서 가장 늦게 온 가롯유다를 아주 반겼다는 것을 말하는 성직자, 비젠탈 자신의 마음을 평화를 위해서 용서를 하였어야 하고, 용서는 상대방의 연민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주장등이 있다. 당시 상황을 겪어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비젠탈에게 이러한 견해를 밝히는 것이 너무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도 있지만, 이러한 견해를 밝힌 사람들 중 여럿은 비젠탈 처럼 유대인포로수용소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이거나, 다른 인종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그리고 실제 용서를 실천하는 종교적 지도자라는 점에서 열린 마음으로 이들의 견해를 듣게 된다.
용서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를 나타내는 사람들이 드는 이유는 글쓴이인 비젠탈이 그 독일인이자행한 행위의 대상자가 아니었으므로 그가.용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유로 드는 사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수용소안의 유대인 한 사람을 고민스러운 자리에 몰아 놓고 자신이 편히 죽을 수 있는 수단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 독일인의 행위는 그 나치가 저지른 최후의 범죄일 뿐이라는 점등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 죽어가는 독일인 병사는 고백하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의 목적을 달성했을 것이고, 비젠탈은 들어 준 것만으로도 그는 자신이 할 수있는 최선의 선행을 베푼 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용서해 주어야 할 사람들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 독일인은 자신의 죄를 회개할 대상이 사라 졌다. 그래서 그들의 일원인 유대인에게라도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자 하였고, 자신이 있는 병실에서 자신의 잘못을 낱낱이 고백했다. 그는 참회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유대인은 그의 말을 제지하지 않고 조용히 그의 말을 모두 들어 주었다.
독일인은 자신의 죄를 고백할 기회를 갖게 된 것만으로도 그렇지 않고 죽음에 이르는 것보다 마음의 짐을 덜었을 것이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포로 수용소의 유대인으로서 비젠탈은 묵묵히 그의 얘기를 들어 줌으로써 자신이 할수 있는 최선의 선행을 행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 질문과 더불어 이책을 읽고 가해자에 대한 용서의 선행조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용서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것도, 가해자가 자신의 행위가 죄임을 인식할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용서란 문제는 애초부터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용서란 어느 한쪽이 죄지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는 자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위 에서 말한 독일인의 경우는 비젠탈이 느꼈듯이 그의 참회가 진정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용서할 지 말지가 문제되고, 그렇기 때문에 비젠탈도 자신의 행위가 합당하였는지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하고 고뇌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