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의 힘 2

호수로 소풍 가서 수영도 하고 축구도 하고 가족 게임도 했던좋은 추억들, 멘데스는 크게 소리 내어 말하고 그들의 대답을 머릿속에서 들었다. 밖에서 연주하고 있는 음악보다 더 달콤한 음악이었다.
‘나도 곧 그곳으로 가겠소.
‘당장은 아니라도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요.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소.‘
‘먼저 바레라를 위한 테이블을 차려야 하거든.
‘거기에 쓰디쓴 열매를 쌓아야 하오
‘미겔 앙헬, 라울, 아단의 이름을 새긴 해골사탕들을 쌓아야 하오.
‘그들의 영혼을 지옥으로 보내야 하오.
‘하지만 오늘은 죽은 자의 날이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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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여행하고 다시 돌아오기까지

모든 인물들의 개성이 뚜렷한데도 어느것하나 흐트러짐없이 조화롭게 이야기를 이끌어나갈 수 있다는 것에 또 한 번 감탄하게 된다.

공작이 백치라고 불리지만 실상 그는 누구보다 선하고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다. 다만 무언가 그 안에 내재돼있는 열정이 튀어오르게 되면 뛰어나던 통찰력이 붕괴되고 그의 이성을 마비시켜 그를 아무말이나 떠드는 백치로 만들어버린다. 공작의 열정은 때로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것으로도,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한 것으로도 표현되지만 거진 다 실패로 돌아가버린다. 그 단계까지 왔다면 공작은 이미 사람들에게 백치로 낙인찍혀버리고 거의 아무도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통용되는 사랑의 개념과는 다르다. 그가 스위스에서 요양을 했을 때 만났던 불쌍한 소녀를 어떻게 대했는가를 봐도 느낄 수 있다. 나는 이것이 그의 인류애적 사랑을 보여주고 공작을 더욱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적 특성이라고 생각했는데 결말을 읽고보니 복선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가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에는 깊고 넓은 사랑이 깔려있다. 물론 레베제프 같은 비열한에게 짜증도 내고 혐오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와 같이 사람들을 이용하고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깊은 상처를 받고 파괴된 인간을 진심으로 연민하고 사랑한다. 스위스의 그 소녀도 나스따시야도 모두 사람들로부터 지독한 멸시와 고통을 받았다. 그 원인이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음에도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조롱과 비난을 받는 것이 그들의 인생에 얼마나 깊은 상흔을 남겼는지 가늠할 수 없다.

공작은 그들의 영혼을 진심으로 위로했고 구원하고자 노력했다. 그것이 그가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식이지만 그 자신을 고통스럽게 살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는 상처받은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그 상처에서 구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그것은 그에게도 깊은 상처를 남길 수 밖에 없다. 그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사람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를 생각하고 움직이게 하는 그 자체의 본성인 사랑이 그를 해치는 칼날로 변하기도 한다는 것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

그것이 그를 다시 백치로 만든 주요 원인이다. 그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때로는 누군가를 구원하기도 했지만, 어떤 사람은 오직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을 때에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사랑도 있다는 것을 몰랐다. 타인에게는 놀라운 통찰력을 발휘하여 그들도 몰랐던 그들의 본성을 파악할 수 있었지만 그의 사랑은 너무 타인에게 집중돼 있었고 정작 자신을 그처럼 사랑하지는 못했으며 자신의 운명을 타인에게서 찾았다는 것이 그가 다시 백치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스위스의 소녀는 자기희생적인 수용으로 고통을 감내하여 공작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나스따시야는 자기혐오와 자기파괴적인 방식으로 고통을 견뎠기 때문에 공작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스따시야가 잘못된 것일까? 그리고 꼭 한없는 고통을 감내해야하는 사람만이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인가?

읽는 내내 나스따시야를 동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비난하지도 않았던 이유는 그녀의 모든 행동이 사실 자신을 견디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스따시야가 보여주는 모든 말과 행동은 깊은 자기혐오에서 비롯된다. 본인이 더럽혀졌으니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혐오해도 된다는 자기파괴와 그런 사람들을 증오하는 공격성이 동시에 발현돼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만들었고 오직 그것만이 그녀 내면의 축이 되어 자신을 지탱하게 둘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작의 사랑이 버거웠던 것이고 그에게서 도망치면서도 구원을 바랬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스따시야가 몰랐던 것은 그녀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구원이 아니라 자신을 용서하기 위한 치유의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독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서 공작의 순수한 사랑을 오염시키고 공작마저 죽일 수 있다는 생각에 그에게서 도망쳤지만 공작이 자신의 독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어 그를 붙잡았다. 그렇지만 그녀의 구원의 구심점은 자신을 용서하는 것에 있었다.

자신을 용서한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그것은 용기가 필요한 것이고 동시에 타인도 용서해야 하기 때문에 매우 큰 에너지와 통찰력이 필요한 일이다. 자기성찰이라는 길고 긴 터널을 오래도록 걸어야 하는 일이다. 나스따시야 같이 상처로 너덜해진 영혼이 하기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공작은 그것을 알고 그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그녀 내면에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고 그의 선택은 비극으로 종결됐다.

그의 선함과 고결한 사랑이 결국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까우면서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는 느낌이 든다.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인물들의 선택을 통해 쓸쓸하게 체감하게 된다.

사실 난 공작의 선택에 대해 예브게니처럼 분노했고 그를 마음속으로 비난했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런 내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예브게니가 공작에게 구구절절히 비난하는 그 모든 것들은 사실 공작의 깊은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를 백치라고 단정지어버리는 편견적이고 대중적인 시각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가 왜 사랑하는 아글라야를 버리고 나스따시야에게 갔는지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로고진과 공작이 예수의 그림을 보는 장면도 그들의 운명을 암시하는 복선이었다. 공작의 사랑은 의도적이라고 생각될만큼 예수의 운명을 따라간다. 고통스러운 채찍질을 견디면서도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지켰던 그처럼 공작도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사랑했지만 그로 인해 그의 정신은 부활할 수 없었다. 그의 사랑이 소멸됐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그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그는 그저 자신을 용서하기 위한 터널에 들어간 것일 뿐이다. 세상을 여행한 대가가 이렇게 잔혹할줄 그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을 때 구원의 길은 열려있다. 그가 그 길을 걸어 평화에 도착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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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 하

소설의 등장 인물인 가브릴라 아르달리 오노비치 이볼긴은 두번째 범주의 인물에 속한다. 그는 <훨씬 더 똑똑한 사람들의 범주에 들어간다. 물론 본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독창성에 대한희망에 불타고 있기는 하다. 이 범주의 인물은 앞에서 말한 바와같이 첫번째 범주의 인물보다 훨씬 불행하다. <똑똑한 보통 사람은 잠깐 동안, 아니한평생이라 해도 괜찮지만, 자기를 천재적이고 지극히 독창적인 사람으로 상상한다 하더라도, 마음 한구석에숨어 있는 회의의 벌레가 똑똑한 이 보통 사람을 절망의 늪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명 앞에 굴복한다해도 마음 깊은 곳에 틀어박힌 허영심 때문에 완전히 중독 상태에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는 매우 극단적이다. 똑똑한 범주에 속한 절대 다수는 그처럼 비극적인 상황에 빠지지는 않는다. 기껏해야 말년에 이르러 간장이 좀 나빠지는 정도에 머문다고나 할까. 그렇지만 이 같은 범주의 인간들은 운명에 굴복하여 모든 것을 단념해 버릴 수 있게 되기까지, 젊은 시절부터 인생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상당히 오랫동안 어리석은 짓을 한다. 이 모든 것은 독창적 인간이 되겠다는 소망에서 빛어진다. 때로는 이보다 더 괴이한 경우도 있다. 독창적이 되어 보겠다는 열망이 지나쳐서 정직한 사람이 비열한 행위를 마다하지않는 경향까지 있다. 심지어 이불행한 사람들 중에서 어떤 이는정직할 뿐만 아니라 선량하기까지 하여, 가정의 신(神)으로서 가족은 물론이며 타인까지 부양하기도 한다. 평생 편한 마음으로살아가지 못한다! 이런 사람에게 자기가 인간으로서 훌륭한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그 같은 생각이 속을 뒤집어 놓는다. <내 일생을 어디에 허비했던가? 무엇이 나의 손발을 묶어 내가 화약을 발명하지 못하게 했는가? 이런 하찮은 일들만 아니었어도 나는 어쩌면, 아니 틀림없이무언가를 발견했을 것이다! 화약인지 아메리카 대륙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무언가를 틀림없이 발견했을 것이다!> 이러한 신사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대체 무엇을 발견해야 하고, 무엇을 발견할 준비를 갖춰야 되는지조차 평생 동안 확고히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발견해야 될 것이 화약인지 아메리카대륙인지 확실치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를 발견해야겠다는 고뇌와 갈망은 콜럼버스나 갈릴레이보다 조금도 뒤지지 않을것이다. - P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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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혼란 - 지성 세계를 향한 열망, 제어되지 않는 사랑의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서정일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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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깊고 넓은 사랑의 세계

그렇게 길지 않은 분량의 소설이지만 이야기가 주는 울림은 굵고 묵직하다.

자아를 찾아가는 소년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과의 사랑 이야기가 씁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단지 그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었음에 있지 않다.

여러차례 교수가 소년에게 어떠한 감정을 느꼈는지 유추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더불어 그것을 자신을 향한 남자의 경멸과 분노라고 오해하는 소년의 생각이 너무 순수해서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소년의 입장에서보다는 교수의 입장에서 사랑의 의미를 생각하게 됐다. 소년은 이 소설의 제목처럼 완전한 감정의 혼란 속에서 자신을 감싸는 정열적인 사랑의 불꽃을 전혀 보지 못한다. 그 불꽃을 점화시킨 주체는 그것이 자신은 물론 소년을 불태워버릴까봐 계속해서 꺼뜨리려고 하지만 순수한 사랑의 불꽃은 어느새 스스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교수가 엄청난 고통을 겪었음을 예상할 수 있지만 소설 말미에서 소년을 향해 고백하는 그의 진심을 통해 그것이 남자의 삶을 어떻게 다시 재정립했는지 비통할 정도로 느꼈다. 그가 살아온 인생과 그 속에서 느꼈을 수많은 혼란들이 그를 노쇠하게 만들고 파괴했을 동안 그가 그것을 어떻게 버틸 수 있었는지 안타깝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자아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만큼 큰 고통이 있을까?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을 사랑하고 사랑받고 공감받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자신의 열정을 혼탁한 정욕으로 덮어야하는 수치심이 계속해서 자신을 잡아먹을 때 또다시 자기혐오로 번지는 그 악순환을 그는 수십년간 견디고 있었다.

그런 인생에서 소년의 순수한 열정과 헌신이 그에게 얼마나 큰 의미였을지, 단순히 어떤 의미를 넘어서서 그를 신이 자신에게 보내준 마지막 에로스의 불꽃이라고 느끼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감정을 그토록 견뎌낸 남자가 대단하기까지 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사랑을 만났음에도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을 통해 그것이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빛나게 만드는 것이 아닌, 거부당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을 다시 발견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섣불리 자신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가 온 힘을 다해 자신의 감정을 제어해도 사랑의 기운은 감춰질 수 없었지만 소년은 그것을 오히려 반대로 해석해버렸다. 스승을 향한 끝없는 존경심에서 비롯된 사랑을 열렬히 표현해도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경멸과 비난이 대부분이었다. 소년은 자신의 사랑을 몰라주는 스승에게 분노하고 심지어 자기파괴적인 행동까지 일삼지만 애초에 사랑의 속성이 다르기 때문에 소년의 사랑은 보답받기 힘든 것이었다.

소년의 사랑이 과연 교수의 사랑과 동일한 성질의 것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자신의 지난 날들을 돌아봐도 스승을 사랑한 것만큼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사랑은 누군가를 갖고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더 높은 차원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정신적으로 서로 연결됐다는 특별한 느낌을 서로 공유하는 것이 이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했던 방식이었다. 더 높은 정신적 고양의 세계를 함께 탐험하며 서로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인생을 함께 만들어나갈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본능적인 사랑의 방향성을 바꿀 수는 없기에, 사랑과 욕망이 서로 충돌할수록 피폐해질 수 있기에, 이미 한 사람은 욕망으로 인해 자기혐오를 끊임없이 겪어야했기에 두 사람의 결말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스승은 소년에게 넓디넓은 인생을 항해할 수 있도록 길잡이가 돼주었다. 소년은 스승에게 마지막 사랑의 불꽃으로서 영원히 그의 기억 속에 남을 에로스가 되었다. 서로에게 다시 없을 사랑을 주고 받았던 존재로서 서로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게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사랑의 완성이 아닐까 싶다. 씁쓸함보다는 영원함으로 기억돼야 할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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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혼란

마치 얇게 열린 고문관의 입술에서 모래가 흘러나온 것처럼느껴졌고, 마모되고 단조롭게 닳아버린 대학 노트의 언어들은 혼탁한 공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이미 소년 시절에느꼈던 지루함이 오래된 골동품같은 고루한 형식주의의 공간에서 섬뜩하게 되살아났습니다. 어떤 해부학 실험을 위해 죽은 사람의 차디찬 손을 이리저리 만지는 정신의 시체 보관소로 끌려가는 느낌이었습니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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