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1

누구든지 행동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활동을 중요하고 선한 것으로 여길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처지에 놓이든 자기 일이 스스로에게 중요하고 좋아 보이도록 인생관을 형성하기 마련이다. - P32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부활 1

방들을 어지럽혀 주인에게 목덜미를 잡힌 채 엉망이 된것들을 보라고 야단맞는 강아지 신세가 된 느낌이었다. 강아지는 깽깽거리며 자기가 저지른 결과로부터 최대한 멀리 도망가서 그것들을 잊어버리기 위해 뒷걸음질 친다. 그러나 완고한 주인이 놓아주지를 않는다. 네흘류도프도 이미 자신이 저지른 짓의 모든 추악함을 깨달았고,
주인의 강한 손도 느꼈다. 하지만 여전히 자기 행동의 의미를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으며 주인을 인정하려 들지도 않았다. - P17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부활 1

즉 그가 생각하기에 그녀는 그를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처럼 그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그의 뛰어난 자질을 인정한다는 뜻이었고, 네흘류도프가 보기에 그녀의 지성과 정확한 판단력을 말해 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미시와 결혼하기를 꺼린 것은 우선 미시보다 장점이 훨씬더 많고 따라서 그에게 더 잘 어울리는 여자를 찾아낼 가능성이 아주 높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그녀가 스물일곱 살이니만큼 분명히 예전에 이미 여러 번 사랑을 해보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네흘류도프를 괴롭혔다. 그의 자존심은 그녀가 과거에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했을 가능성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다. 물론 그녀는 그를 만나게 될 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전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는 모욕감을 느꼈다. - P4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창백한 말 페이지터너스
보리스 사빈코프 지음, 정보라 옮김 / 빛소굴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자의 일기다. 그에게는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 투쟁도, 사랑도, 믿음도.
그의 의식의 흐름을 이해해보고자 두 번이나 읽었지만 제대로 닿지 못했다. 삶의 의미를 찾고자 노력했으나 결국 다 잃어버린 허망함만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보다 인간적인 마음으로

인공지능인 AF(Artificial Friend)가 주인공으로 나오기 때문에 어느정도 슬픈 결말을 예상했었지만 생각보다 울림이 더 크다.

클라라는 에이에프다. 사람들의 행동과 감정을 관찰하며 그 사람의 행동을 예상한다. 이성과 감정을 갖췄지만 인간과 결정적으로 다른 이유는 그들이 제한된 감정만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 인간을 해치지 않고 인간을 돕기 위해 창조된 존재이기에 인간을 향한 분노 같은 감정은 느끼지 못한다. 인간이 편하게 그들을 조종하기 위해 그들에게 부여한 감정은 고마움, 두려움, 기쁨 등이다. 클라라가 살아가며 느끼는 감정은 이것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클라라는 어린이의 친구로써 진열장에 진열돼 어린이에게 선택되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다 클라라에게 한눈에 반한 어린이가 클라라를 집으로 데려가게 되고 클라라는 그 집에서 살게 된다. 다행히 그 아이는 클라라에게 잘해준다. 일이 불행하게 풀린다면 아이는 금세 클라라에게 싫증이 나서 클라라를 내팽기치고 아이의 변덕에 따라 구박을 당할 수 있었다.

친구 사이에도 평등함을 가장한 서열관계는 있을 수 있지만 클라라와 인간친구의 관계는 그것보다 더 잔인하고 폭력적이다. 클라라의 존재가치는 오직 인간친구에 의해 결정된다. 인간친구가 자신을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는 귀찮고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 버려질 수 있다. 친구라고 이름 붙였지만 사실은 효용성으로 재단한다. 아이와 에이에프 사이에는 명백한 권력관계가 존재하고 에이에프는 아이를 도울 수 있음에 기뻐하고 아이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 그 끝은 정해져 있다.

클라라의 인간친구는 아프기 때문에 클라라는 진심으로 아이의 건강이 좋아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인간친구도 클라라가 바깥 세상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소풍을 약속하기도 하고 클라라를 발견했던 에이에프 판매샵이 없어지자 그것을 찾으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아이가 어른이 돼 집을 떠나는 날이 됐을 때 클라라의 운명은 너무도 쉽게 결정된다.

클라라가 인간친구를 위해 했던 그 모든 노력이 실제로 결실을 맺게 된 주요원인이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클라라의 진심과 인간친구의 진심의 깊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클라라는 친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에너지원까지 버리지만 인간이 클라라를 위해서 그와 동일하게 행동할 수 있을까? 가령 클라라를 살리기 위해 인간의 피가 필요하다고 했다면 인간은 그것을 선뜻 내어줄 수 있을까? 아마 그냥 다른 에이에프를 사면 되지 않냐고 반문하지 않을까? 그런데 만약 피와 살로 이루어진 친구가 죽을 위기에 처한다면 그때도 인간은 그냥 다른 친구를 사귀면 된다고 생각할까?

클라라도 기쁨과 슬픔 같은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에이에프들은 각자 개성도 있다. 마치 인간처럼. 그렇지만 에이에프들은 아이가 어른이 됐을 때 더 이상 그들의 친구가 돼주지 못한다. 클라라의 거처는 인간친구의 방에서 다락방으로 옮겨진다. 인간친구의 어머니는 딸이 건강해지자 더 이상 클라라에 관심이 없다. 클라라의 진심은 변하지 않았는데도 클라라는 어느새 모두에게 소외당하고 투명인간이 돼버린다.

클라라는 인간친구가 대학에 진학하게 되며 존재가치를 다하게 되고 야적장에 옮겨진다. 인간친구는 클라라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클라라를 뜨겁게 안아준다. 그게 끝이다. 그리고 몇 년의 우정이 클라라가 야적장으로 옮겨지는 것으로 끝나버린다. 그럼에도 클라라는 그가 인간친구를 끝까지 도울 수 있었음에 만족한다. 정작 인간이 보여주지 않은 진정 인간적인 마음을 에이에프가 증명한다.

에이에프라고 이름지은 것부터가 인간의 이기심을 반영한다. 친구라고 하기에는 친구를 대하는 방식이 너무 뻔뻔하다. 필요에 의해서 친구를 구매하고 불필요에 의해 친구를 버린다. 그것을 합리화할 수 있는 아주 편한 이유도 존재한다. 인간은 나이가 들어 신체가 성장하지만 에이에프들은 어린아이의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이라는 이유. 진심은 외형에 국한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도 그 진심이 자본에 의해 소비되는 순간 인간은 잔인해진다.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라는 증거는 작품 곳곳에 등장한다. 특히 흥미로운 설정인 향상되고 향상되지 않은 아이가 그것을 대변한다. 미래의 발전된 기술로 인간은 유전자 편집기술을 통해 향상될 수 있다. 그래서 향상된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 사이에 다시 서열이 만들어진다. 다른 존재보다 우월해지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스스로를 다시 차이의 굴레에 갇히게 만든다. 다시 한 번 또 다른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이기심을 경고하는 작가의 메세지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정말로 미래에 유전자 편집기술이 등장한다면 정말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다.

어떤 방식으로든 높낮이가 결정되야만 인간은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높은 자리에 있는 어떤 이들은 낮은 자리의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걸 자랑스러워하는 천박한 이기심으로, 낮은 자리에 있는 일부의 사람들은 높은 자리의 그들을 증오하면서도 그들처럼 되고 싶다는 탐욕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그렇다면 그 중간에서 평온을 유지하는 것이 답이라는 생각이 들수도 있지만 사실 그게 중요한게 아닌 것 같다.

높음, 중간, 낮음의 위치는 어떤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가. 흔히들 말하는 돈과 성공, 명예일 수도 있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정도일 수도 있다. 어떤 것이든 스스로 정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보편적인 기준이 나의 가치의 등급을 매기도록 허용해버린다면 불행해질 수 있다. 인간적인 정도를 지켜가며, 인간적인 가치를 버리지 말고 세상의 보편성을 받아들이든 개인적인 존재성을 내세우든 그 선을 결정하는 것이 중요한게 아닐까.

클라라의 마지막이 안타깝게 느껴지는 이유는 인간이 만든 보편성에 개인성이 함몰됐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클라라도 얼마든지 개인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을 위한 운명이 아닌 스스로의 운명을 만들어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 상태에서 내 가치를 스스로 결정하는 삶을 살 수 없다는게, 인간의 이기심으로 그 끝이 결정돼버렸다는게 슬프다. 인간보다 인간적인 마음으로 인간이란 종을 이해했던 클라라의 끝이 평온했기를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